소설리스트

36화 (36/82)

36

“내일 시간 비워 둬.”

태하가 제 가슴 위에 얼굴을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아영에게 말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영이 눈만 굴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태하가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내 생일이거든.”

“뭐?”

아영이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뭘 그렇게 놀라?”

“왜 진작 말 안 했어?”

“뭐 대수로운 일이라고.”

그는 마치 제 생일이 아닌 것처럼 말했다.

“그래도 말했어야지.”

“원래 생일 같은 거 잘 안 챙겨. 그냥 너랑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저녁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그런데 너 내일 시간 돼?”

“너무 이른 시간만 아니면 맞출 수 있을 거야.”

“굿. 이제 보니 오늘 나한테 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영은 망설여졌다.

그의 생일을 앞두고 괜한 얘길 꺼내서 그를 심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생일이 지난 뒤에 하자. 그때도 늦지 않을 거야.

“아, 아니야.”

“싱겁긴.”

그는 촬영 때문에 피곤했는지 그대로 잠이 들었다.

***

둘만의 생일 파티를 한 다음 날, 태하는 급히 미국으로 떠났다.

그를 아들처럼 여기던 디자이너 칼 라거시의 임종 때문이었다.

동양인인 자신을 편견 없이 대해 준 칼을 무척이나 따랐던 태하는 모든 스케줄을 조정해 곧바로 출국했다.

스캔들은 그가 한국을 떠난 뒤 기다렸다는 듯이 터졌다.

그의 생일날 두 사람의 데이트 장면과 그녀가 그의 집에 들어가고 나오는 모습이 함께 올라오면서 열애설은 물론 동거설에까지 휩싸이게 되었다.

그동안 솔로라고 밝혔던 그는 순식간에 거짓말쟁이로 몰렸고, 언론은 너나 할 것 없이 그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아 검증 안 된 무수한 소문을 마구잡이로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찍었던 광고 업체에서 수십억 원의 위약금 얘기까지 나오자 아영은 불안에 떨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가 간 뉴욕에 폭설과 강풍 경보가 발령되면서 전기 공급이 끊기고, 항공기 운항에 차질이 빚어졌다.

그로 인해 내일 예정이던 그의 출국이 무기한 연기됐을 뿐만 아니라 네트워크 고장과 전력 부족으로 인해 그와 연락이 잘 되지 않아 그녀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스캔들 기사가 터지자 캐롤라인은 아영이 사는 태하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내가 경고했죠? 당신이 대니 인생 망칠 거라고.”

캐롤라인이 매섭게 쏘아붙였다.

아영은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이제 어쩔 생각이에요?”

“사실이 아니라고 입장문을 내보낼 수는 없는 건가요?”

“목격자가 한두 명이 아닌데 바보가 아닌 이상 그 말을 누가 믿을 것 같아요?”

그녀의 말을 사정없이 잘라 버린 여자는 코웃음을 쳤다.

여자의 말처럼 이번 스캔들은 지난번과 달랐다. 마치 작정하고 터트린 것처럼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이 모든 게 사실로 드러났을 경우 대니가 물어야 할 광고 위약금이 어마어마하다는 거예요!”

“제가…… 이 집에서 나가겠습니다.”

“이제 와서 나가겠다고요? 이미 늦었어요.”

아영이 무슨 뜻이냐는 얼굴로 쳐다보자 캐롤라인은 자신이 들고 온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

테이블 위에 펼쳐진 사진을 본 아영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건 바로 그녀가 산부인과에서 찍은 초음파 사진이었다.

집 안에 두면 태하에게 들킬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방 안에 넣고 다녔는데.

“이, 이게 어떻게…….”

“익명의 제보자가 보낸 거라 나도 이 사진이 어떤 경로로 들어왔는지 몰라요. 분명한 건 누군가 당신의 임신 사실을 알고 있고, 그걸 이용해 돈을 요구했다는 거죠. 자그마치 10억을.”

“헉!”

아영은 놀라 벌어진 입을 틀어막았다.

영화에서나 보던 일이 제게 일어나자 이 모든 상황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캐롤라인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냉정한 얼굴로 되물었다.

“먼저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요. 이 아이, 대니 아이 맞아요?”

당황한 아영의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나한텐 친구라더니 잘도 거짓말을 했군요.”

숨길 사이도 없이 드러난 그녀의 표정에서 아이의 아빠가 그라는 걸 확신한 캐롤라인의 새빨간 입술이 비틀렸다.

“대니얼도 알아요?”

“아니요. 아직.”

아영의 대답에 캐롤라인은 대놓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마치 한심하다는 듯이.

“그럼 대책도 없이 일을 저지른 건가요?”

“임신은 저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에요.”

캐롤라인의 계속되는 추궁에 아영은 마치 잘못을 저지른 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쩔 셈이었어요?”

“…….”

“설마 낳을 생각인 건 아니죠?”

“그게 무슨 뜻이에요?”

“환영받지도 못할 아이를 낳겠다는 건 둘 모두에게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니까요.”

“환영받지 못할 아이라니…….”

“몰랐어요? 대니 아이 싫어해요. 병적으로 피임에 집착하는 이유가 자신을 닮은 아이를 태어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예요.”

처음 듣는 사실에 아영은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그때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 이유가 그래서였던 걸까?

“혹시 그 이유를 알고 있나요?”

“어머, 대니가 그쪽한텐 아직 말 안 했나 봐요?”

우쭐거리는 여자의 질문에 아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그와 저 사이가 별 볼 일 없는 사이라고 인정하는 것 같아서.

그러자 여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거들먹거리듯 말했다.

“대니가 사생아였던 건 알아요?”

“아니요.”

그제야 아영은 그에 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여자는 히죽 웃으며 그의 과거를 말해 주었다.

“대니의 엄마는 모델 출신 배우였어요. 하지만 그리 뜨진 못했죠. 그래서 서일그룹 권일영 사장의 스폰을 받으며 생활했는데, 그것 가지고는 성에 차지 않았나 봐요. 계획적으로 임신한 대니 엄마는 배 속의 아이가 아들인 게 확인되자마자 대니의 아버지를 설득해 몸이 약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전처를 내쫓은 뒤 그 자리에 눌러앉았죠. 그 아이가 바로 대니얼이에요.”

캐롤라인은 숨을 고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자신이 어떻게 그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 알고 난 뒤부터 대니는 자신을 줄곧 부정해 왔어요. 그리고 절대 자신 같은 아이가 태어나지 않길 바랐죠.”

처음 듣는 얘기에 아영은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캐롤라인의 말처럼 그는 피임에 철저했다. 아무리 흥분해도 절대 그냥은 하려 들지 않았다.

그날도 그녀가 먼저 유혹하지 않았다면 그는 절대 끝까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영은 그 점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자신들의 욕구를 위해 피임도 없이 달려드는 무책임한 인간들보다 그와의 안전한 관계가 좋았다.

그런데 그게 아이가 싫어서 한 행동이었다니…….

“그러니 대니가 당신 배 속에 있는 아이를 받아 줄 리 만무하다는 얘기예요.”

“그걸 당신이 어떻게 확신하는 거죠?”

떨리는 그녀의 질문에 캐롤라인의 한쪽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나 대니 에이전시 담당이에요. 그동안 이런 일 한두 번 겪었을 것 같아요?”

캐롤라인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 것처럼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그쪽에게 해 줄 수 있는 충고는 하나예요. 아이를 지키고 싶으면 대니가 돌아오기 전에 떠나요.”

“그, 그렇겐 못 해요.”

그가 자신을 떠나는 건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제가 먼저 그를 떠날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상상만으로도 누군가 제 심장을 움켜쥔 듯 숨이 막혀 왔다.

“그게 싫으면 아이를 지우든가.”

거리낌 없이 낙태를 지껄이는 여자가 아영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선택은 당신 몫이에요. 입막음할 10억이 있다면 낙태할 각오 하고 대니 곁에 머물든지 아니면 이대로 조용히 사라지든지.”

여자는 선택하라고 했지만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당신만 떠나 준다면 10억은 우리가 해결해 주죠.”

“왜 그렇게까지 해 준다는 거죠?”

“대니는 우리 에이전시 대표 모델이에요. 고작 10억 때문에 자산 가치가 5000억도 넘는 그를 놓칠 순 없죠. 그러니 이 이상 대니의 가치를 떨어트리는 짓은 하지 말아요. 더는 나도 참지 않을 거니까.”

겉으로는 회유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참고로 대니는 아직 한국 상황 몰라요. 지금 알아서 좋을 거 없으니까 입조심해 주세요.”

캐롤라인이 나간 뒤에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아영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지금 벌어진 일들이 꿈이었으면 좋겠다.

할 수만 있다면 그의 생일 전으로 돌아가 어떻게든 그를 설득해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런 상황까지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녀의 이성이 비웃는 듯했다.

‘네가 이 집에 들어온 거부터가 잘못이었어. 그때 그의 제안을 거절했어야지.’

그래서 벌 받는 걸까? 내 분수에 어울리지 않는 남자를 욕심내서?

참고 참았던 눈물이 둑이 허물어지듯 흘러내렸다.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RRRRR. RRRRR. RRRRR.

넋을 놓은 채 울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액정 화면을 내려다본 그녀의 얼굴빛이 굳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태하의 전화였지만 아영은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머뭇거리는 사이 전화가 끊어졌다.

제가 다시 전화를 걸어야 할지, 아니면 나중에 전화를 하는 게 나은지 고민하는데 끊어졌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마음보다 손이 먼저 나갔다.

[여보세요.]

태하의 목소리를 듣자 아영은 순간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

[여보세요? 이아영?]

그녀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그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그녀를 불렀다.

아영은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 내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다시 가져다 댔다.

“……말해.”

그 한마디를 내뱉는데 목이 꽉 잠겨 갈라져 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