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띵동. 띵동.
초인종이 울린 시간은 밤 9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벌써 온 건가?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그로 인해 아영은 긴장된 한숨을 몰아쉰 뒤 걸음을 옮겼다.
다른 때는 제멋대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던 그가 오늘따라 초인종을 누르니 당연한 거지만 어색했다.
“생각보다 빨리 왔…….”
하지만 아영은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을 본 순간 뒷말을 잇지 못했다.
“누구세요?”
아영과 눈이 마주친 여자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아영은 제가 할 말을 여자가 하니 되레 황당했다.
“그러는 그쪽은 누구시죠?”
“난 캐롤라인 리예요. 대니얼의 에이전시 담당이죠.”
되받아치는 그녀의 말에 여자는 잠시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더니 이내 자신의 백에서 명함을 건넸다.
명함을 받아 든 아영은 놀란 숨을 삼켰다.
그의 에이전시 담당자가 이렇게 젊고 아름다운 여자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으니까.
짧은 쇼트커트에 태닝한 여자는 건강미와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그리고 재미 교포인지 아니면 어렸을 때 이민을 간 건지 한국말을 잘하긴 했지만 미국식 억양이 강했다.
여자는 아영의 표정을 보고 더는 자신에 관해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턱을 치켜들며 입을 열었다.
“이제 그쪽 소개 좀 해 주시겠어요?”
“전 권태하…… 친구 이아영이라고 합니다.”
원래는 여자친구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 차마 여자친구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친구라고요?”
그녀의 말을 비웃듯 캐롤라인이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마치 그녀를 품평하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내렸다.
“의외네요. 대니얼에게 그쪽 같은 친구가 있었다니.”
“무슨 뜻이죠?”
“지금껏 대니얼이 만나던 여자들과 취향이 달라서요.”
취향?
좋은 뜻이 아니라는 건 여자의 표정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여자는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이건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팔짱을 끼고서 도전적인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왜 그쪽이 대니얼 집에 있는 거죠?”
“사정이 생겨서 당분간 신세를 지고 있거든요.”
“뭐라고요? 그럼 지금 대니얼하고 동거하고 있다는 건가요?”
캐롤라인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격앙되었다. 마치 양의 가면을 벗어 던진 늑대처럼.
“아니요. 대니얼은, 바로 앞 친구 집에서 따로 지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을 저와 함께 지내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대로 말했다가는 여자가 가만있을 것 같지 않아 아영은 거짓말을 했다.
“기가 막혀! 당신 진짜 뻔뻔하네요. 왜 주인인 대니얼이 남의 집에서 지내는 거죠?”
“그건 제가 아니라, 대니얼이 그렇게 하자고 한 겁니다.”
“대니얼이 그러자고 했어도 당신이 거절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사람이 눈치라는 게 있다면. 아무리 신세를 질 사람이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대니얼의 집에서 지낼 수가 있는 거죠? 만약 기자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어쩔 셈이었어요? 지금이 대니얼에게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 알고나 있는 건가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눈에 띌까 봐 쥐 죽은 듯 지냈다.
그래도 행복했다. 그의 곁에 머물 수 있어서.
하지만 그마저도 욕심이었던 걸까?
“당장 이 집에서 나가요!”
“이 집 주인은 태하입니다. 그쪽이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못 나가겠다 이건가요?”
캐롤라인이 앙칼진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태하가 나가라고 하지 않는 이상 제가 먼저 나갈 생각 없습니다.”
“이봐요. 이아영 씨, 당신 때문에 대니얼 인생 망칠 수도 있어요. 알아요?”
자신이 그의 곁에 머무는 게 잘못인 걸까?
캐롤라인의 말에 휘둘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가 퍼붓는 한 마디 한 마디에 찔리고 베여 피가 났다.
그러면서도 아영은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RRRRR. RRRRR. RRRRR.
의도치 않은 눈싸움은 캐롤라인의 핸드폰 벨 소리에 깨졌다. 액정 화면을 확인한 그녀의 새빨간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헬로우─.”
캐롤라인은 아영에게 들으라는 듯이 내뱉고는 이내 나긋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지금 어디야?]
캐롤라인의 인사를 가뿐하게 무시한 태하가 다짜고짜 물었다.
아영 앞에서 자신의 인사가 무시당하자 캐롤라인의 예쁜 미간에 주름이 팼다.
하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구겼던 주름을 펴며 말했다.
“어디긴? 대니 집이지.”
[뭐? 너 설마, 아영이와 만났어?]
태하의 말에 캐롤라인이 아영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방금 만났어.”
[하.]
핸드폰 밖으로 그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거기서 당장 나와.]
“왜? 내가 못 올 데라도 왔어?”
[길게 말 안 해.]
“알았어. 가면 되잖아!”
음산한 그의 목소리에 캐롤라인이 신경질적으로 내뱉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돌아서 아영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당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착각하지 말아요. 대니에게 당신 같은 여자는 널리고 널렸으니까. 그 여자들의 결말이 어땠는지 알아요? 다 버려졌어요. 한 명도 남김없이. 그러니 정신 차려요. 대니는 절대 한 여자에게 만족 못 하는 남자니까. 지금이야 세상을 다 줄 것처럼 굴지만 돌아서면 누구보다 냉정한 사람이 대니거든요. 내 말 명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여자는 그 말을 남기고 그대로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곧바로 문이 열리고 여자를 태운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아래로 내려갔다.
여자는 사라졌지만, 여자가 한 마지막 말이 여운처럼 남았다.
사실 그와 함께 지내면서 그가 저를 특별하게 여긴다고 생각한 적이 가끔 있었다.
그런데 여자가 마치 제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내뱉은 말에 아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제 착각을 들킨 것 같아서.
혼자 남은 복도에서 귀신에라도 홀린 듯 멍하니 서 있던 아영은 집 안에서 울리는 벨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안으로 들어간 아영은 테이블 위에 있던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태하였다. 아영은 숨을 몰아쉰 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야.]
“그래.”
딱딱한 대꾸에 그녀의 기분을 감지했는지 그답지 않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방금 집으로 캐리가 찾아왔었다며.]
“캐롤라인을 말하는 거라면 맞아.”
아영은 캐리가 캐롤라인을 말한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왠지 그가 그렇게 부르는 게 귀에 거슬렸다.
[혹시, 너한테 무례하게 굴거나 하지 않았어?]
“상냥하진 않았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태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캐리 대신 내가 사과할게. 미안해.]
“왜, 네가 사과해?”
사과는 잘못한 당사자가 해야지 왜 그가 대신 사과하는지 아영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영은 가슴이 철렁했다. 둘 사이에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암튼, 지금 촬영 끝났으니까 집으로 갈게.]
전화를 끊은 아영은 무릎을 반으로 접어 제 턱 밑에 가져다 댔다.
태하와 그 여자는 무슨 사이일까?
단순하게 업무적인 사이가 아니라는 것쯤은 저를 적대시하는 여자의 시선을 보고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분명 제가 모르는 뭔가가 둘 사이에 존재했다.
그게 뭘까?
알 수 없는 불안감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태하가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이 지나서였다. 40분이면 올 거리였지만 왜 더 걸렸는지 아영은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
사실은 묻기 겁이 났다. 그 여자와 함께 있다 왔을까 봐.
“저녁은?”
“먹었어. 너는?”
“나도. 피곤하겠다. 얼른 씻어.”
사실은 속이 울렁거려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영은 그가 걱정할까 봐 거짓말을 했다.
그가 입고 있던 슈트를 벗으며 그녀의 안색을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잠깐 앉아 봐.”
막상 태하를 보자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몰라 두려워진 아영은 피하고 싶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소파에 앉혔다.
그녀 옆에 나란히 앉은 태하는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고민스러운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입을 열었다.
“캐리, 그러니까 캐롤라인은 내 에이전시 담당이자…… 친구야.”
그 여자의 행동과 표정을 보건대 단순한 친구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그녀의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떤 친구?”
저도 모르게 말투에 날이 섰다.
“뭐?”
“일반적인 친구인지, 너와 나처럼 몸을 섞는 친구인지 묻는 거야.”
“그냥 친구야.”
그녀의 말에 미간을 찌푸린 태하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말에 마음이 살짝 놓이긴 했지만 그를 향한 의심의 뿌리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신경 쓰였어?”
“조금.”
그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묻는 말에 아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실은 더 많이 신경 쓰였지만.
“기분 좋은데?”
“뭐가?”
“네가 질투해 주는 것 같아서.”
그의 말에 마음이 출렁였다.
태하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제 입술에 가져다 댔다.
뜨겁고 부드러운 그의 입술이 닿자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하지 마.”
“싫으면 더 강하게 뿌리쳐.”
손바닥에 입술을 댄 채 저를 쳐다보는 그의 강렬한 시선에 온몸이 달아올랐다.
그를 거부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얼굴이 저도 모르게 붉어진다.
그녀의 볼이 발그레해지자 그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붙여 왔다.
그녀의 입술이 스르륵 열리고, 데일 듯 뜨거운 혀가 밀고 들어왔다. 맞닿은 두 혀가 뒤엉켰다.
그가 입술을 붙인 채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전라가 된 그녀를 안은 태하는 침실로 걸어갔다.
그녀를 침대에 눕힌 뒤 그 역시 옷을 벗어 던졌다. 그의 완벽에 가까운 전라에 아영은 숨을 삼켰다.
그가 씩 웃으며 자신의 체중을 실었다. 단단하면서도 뜨거운 그의 몸이 닿자 열꽃이 핀 것처럼 홧홧했다.
그의 입술이 내려와 수줍게 움츠리고 있던 그녀의 꽃망울을 터트렸다.
“하앗!”
톡. 톡. 톡.
한 번 터지기 시작한 꽃망울은 그 밤 내내 진한 향기를 뿜어냈다.
또다시 그에게 휩쓸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