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대기를 기다리는 동안 수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곧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아영은 심호흡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아영은 긴장한 얼굴로 인사했다.
“우리 병원은 처음인 것 같은데 무슨 일로 오셨어요?”
“……임신했는지 확인 좀 하려고요.”
온화한 얼굴의 여의사가 차트를 보며 물었다. 아영은 마른침을 삼킨 뒤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여의사가 차트에 적힌 미혼이라는 글자를 훑는 게 느껴졌다.
그 순간 아영은 마치 자신이 불장난을 저지른 청소년처럼 느껴졌다.
“테트스기는 해 보셨어요?”
“……네. 두 줄 나왔어요.”
“그렇군요. 일단 옷 갈아입고 올라오세요.”
아영은 간호사 안내를 받아 치마를 갈아입은 뒤 기계 위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TV에서만 보던 민망한 자세로 앉았다.
“차갑습니다.”
커튼 뒤로 여의사 목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차가운 무언가가 그녀 안으로 들어왔다. 아영은 처음 느끼는 이질감에 놀라 숨을 삼켰다.
여의사는 꼼꼼히 그녀의 자궁을 검사했다.
곧 초음파 화면에 무언가 잡혔다.
“축하드려요. 임신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영은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아영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최대한 담담한 얼굴로 병원을 나왔다. 하지만 병원을 나온 순간 다리가 떨려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간신히 근처 카페로 들어간 아영은 숨을 돌린 뒤 진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상태로 회사에 복귀해봤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앉아 있을 자신이 없었다.
[여보세요.]
차분한 진혁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아영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입을 열었다.
“이아영입니다.”
[말해.]
“반차를 썼으면 해서요.”
[갑자기 반차라니, 무슨 일 있어?]
그동안 한 번도 반차를 써 본 적 없는 그녀였으니 진혁이 놀랄 만도 했다.
“몸이 좀 안 좋아서요.”
[어디가 안 좋아?]
물어보는 어투에 걱정이 묻어났다.
“몸살, 인 것 같습니다.”
아영은 사실대로 말할 수 없어 몸살로 둘러댔다.
[약은 먹었어?]
“좀 쉬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알았어. 처리해 놓을게.]
그녀의 목소리에서 고집스러움을 느꼈는지 진혁은 무슨 말인가를 덧붙이려다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이 주임.]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진혁이 그녀를 불렀다.
“네.”
[참지 말고, 아프면 병원 가.]
아영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끝나자 눈이 부시도록 밝던 화면이 까맣게 암전됐다. 그게 마치 제 미래처럼 느껴졌다.
집에 돌아온 아영은 막막했다. 기쁨보다 당황이 컸고, 당황보다 난처함이 컸으며 난처함보다 두려움이 왈칵 일었다.
그와 몸을 섞으면서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평소에 피임에 철저했던 그였고 그녀 역시 이런 상황이 올까 봐 따로 피임약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질 출혈이 있어 잠시 피임약을 멈춘 사이 태하는 미친 듯이 그녀를 갈구했다.
흥분이 최고조로 올랐을 때 남아 있는 피임 도구가 없다는 걸 깨달은 그는 곤혹스러워했다.
그날 아영은 뭐에 홀린 사람처럼 오늘은 괜찮다며 그를 이끌었다.
피임 도구 없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허락했던 그날 덜컥 임신이 되고 말았다.
아영은 아직은 평평한 자신의 배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제 배 속에 태하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임신했다고 하면 그는 뭐라고 할까?
아마 처음에는 저처럼 당황하고 놀라겠지? 그래. 그럴 거야.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일 테니…….
그런 다음 어떻게 할까? 그와 저 사이에 생긴 아이니 기뻐해 줄까?
아영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혼도 안 한 사이에 덜컥 임신했으니 기쁨보다는 부담이 클 것이다.
더더구나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중요한 때에 자신의 임신은 그의 성공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다.
나 어떡하지.
“뭐 해?”
불도 켜지 않은 채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아영은 갑자기 거실 불이 환해지자 눈이 부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무슨 일 있었어?”
“일은 무슨. 감기약이 센지 잠깐 머리가 멍해서 앉아 있었어.”
그녀 앞으로 다가온 태하가 걱정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자 아영은 저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나려 했다.
당황한 아영은 황급히 시선을 내려트렸다. 다행히 그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소파에 등을 기대앉았다.
“병원은 다녀왔어?”
“어? 어.”
순간 산부인과를 말하는 줄 알고 당황했던 아영은 그가 내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했다.
“뭐래? 감기래?”
“……응.”
“요즘 감기 유행이라더니. 약 잘 챙겨 먹어.”
“그럴게.”
그는 오늘 촬영이 피곤했는지 엄지와 검지로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오늘 촬영 힘들었어?”
“힘든 것보다 열두 시간 꼬박 했더니 눈이 빠질 것 같아.”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아영이 안쓰러운 얼굴로 묻자 그가 희미하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기다려. 안대 가져다줄게.”
“됐어.”
아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그가 그녀의 팔을 잡아 다시 소파에 앉혔다. 그러고는 그녀의 무릎 위에 머리를 베고 누웠다.
“잘 거면 들어가서 자.”
“잠깐만 이렇게 있자.”
그가 눈을 감고 말했다.
그녀가 소파 중간에 앉는 바람에 그의 긴 다리가 소파 밖으로 튀어나왔다.
“편한 침대 놔두고…….”
“난 네 무릎이 더 편해.”
아영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고 있는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넓은 이마 위로 아무렇게나 내려온 검은 머리카락, 짙고 반듯한 눈썹, 양쪽으로 길게 뻗은 눈꼬리, 가지런히 펼쳐진 긴 속눈썹, 곧게 뻗은 콧대, 섬세한 선으로 이루어진 혈색 좋은 입술, 단단한 턱선까지.
그는 언제 봐도 조각상처럼 아름다웠다.
아영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이마 위로 흐트러진 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좋다.”
“뭐가?”
“네가 내 머리 만져 주는 거.”
그는 기분이 좋은지 말하면서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영은 제게 머리를 내맡긴 채 제 무릎을 베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자 가슴 끝이 찌르르 울렸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권태하.”
“응.”
아영은 제가 긴장하고 있다는 걸 들키지 않도록 천천히 숨을 몰아쉰 뒤 이내 입을 열었다.
“넌 애 좋아해?”
“아이 말하는 거야?”
“어.”
느닷없는 그녀의 얘기에 그는 의아했는지 감은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고는 대답 대신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영은 아이에 대한 그의 생각을 알고 싶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싫어, 해?”
“좋아하는 편은 아니야.”
일순 그의 표정이 씁쓸해지자 아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글쎄……. 어렸을 때 기억이 좋지 않았거든.”
어렸을 때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는 걸까?
저와 달리 부족함 없이 자랐기에 당연히 그의 유년이 행복했을 거라 생각한 아영은 예상치 못한 그의 대답에 당황했다.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보다는, 혼자 외롭게 보낸 시간이 많았거든. 그래서 기억나는 추억이 하나도 없어.”
“부모님께서 많이 바쁘셨던 거야?”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어머니 돌아가신 뒤 아버지는 일에만 매진하셨어. 일주일에 한 번 겨우 얼굴을 볼 정도였거든. 투정 부릴 시간도 없었어.”
그가 쓰게 웃었다.
“부모님의 사랑을 제대로 못 받고 자라서인지 아이를 보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난감해하는 그를 보며 아영은 가슴이 아팠다.
태하는 제 이야기로 인해 분위기가 다운됐다고 생각했는지 애써 밝은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 얘긴 왜 물어?”
“어? 그, 그냥 궁금해서.”
그녀가 평소와 다르다고 생각했는지 몸을 일으킨 태하가 빤히 쳐다보았다.
“왜, 왜 그렇게 쳐다봐?”
“너 무슨 일 있지?”
“일은 무슨! 없어. 그런 거.”
아영은 순간 가슴이 철렁해 저도 모르게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던 태하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너 모르지?”
“뭐가?”
“너 거짓말 할 때마다 여기 귀 끝이 붉어지는 거.”
당황한 그녀는 재빨리 손을 올려 귀를 가렸다. 귀 끝이 뜨거웠다.
민망해진 아영은 대답 대신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 순간 태하가 그녀의 허리에 양손을 감싸며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말하고 싶을 때 해. 기다릴 테니까.”
“……그럴게.”
아영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언제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 오랜만에 같이 씻을까?”
“뭐?”
“요즘 내가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같이 못 씻었잖아.”
태하가 그녀를 안은 손에 힘을 주며 은근하게 허리를 움직이자 맞닿은 곳에 단단한 열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나 피곤해.”
“누가 하재? 같이 씻기만 하자는 거야.”
거짓말.
그와 같이 씻으면서 한 번도 그냥 나온 적이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아영은 매번 달콤한 그의 말에 넘어갔다.
하지만 오늘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씻고 와. 나 급하게 메일 보내야 할 게 있어.”
“그래.”
태하는 실망하는 것 같았지만 더는 요구하지 않았다.
그가 욕실로 들어간 뒤 아영은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며 속으로 말했다.
“아가야, 네 아빠는 아직 널 만날 준비가 안 됐나 보다.”
또다시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신경계가 고장이라도 났는지 시도 때도 없이 변덕을 부리는 이 감정 때문에 아영은 그에게 들킬까 봐 겁이 났다.
***
일주일이 지났다.
그 뒤 몇 번이나 그에게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일이 생겨서 하지 못했다.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아영은 점점 더 초조해져 갔다.
더 뒤로 미뤄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아영은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늦어?」
「11시쯤 끝날 것 같은데. 왜?」
「할 얘기가 있어서.」
「무슨 얘기?」
「전화로는 그렇고. 오면 얘기해.」
「급한 거 아니면 피곤할 테니 자고 내일 얘기해.」
「기다릴게.」
「알았어. 끝나면 바로 갈게.」
그녀의 고집스러움을 느꼈는지 태하는 뒤로 물러났다.
문자가 끝이 나자 아영은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시간은 더디 흘렀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아영은 그에게 할 말을 연습했다.
먼저 그에게 제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뒤 자신의 임신 사실을 말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