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82)

33

호텔에서 열린 진혁의 결혼식은 화려했다.

입구부터 줄지어 있는 화환부터 시작해서 천 명은 돼 보이는 하객들까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식장 입구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 진혁이 눈에 들어왔다. 진혁은 긴장한 듯 표정이 경직되어 있었다.

아영은 천천히 걸어 진혁 앞에 섰다.

그녀를 발견한 진혁의 입가에 그제야 미소가 지어졌다.

“와 줘서 고맙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이걸로 짝사랑은 끝이었다.

“행복하세요.”

아영은 진심으로 진혁을 축복해 주었다.

“혼자, 왔어?”

진혁이 그녀 뒤를 둘러보았다. 태하를 찾는 듯했다.

“그럴 리가요.”

아영이 그렇다고 대답하려는 순간, 그녀의 머리 위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태하가 더없이 멋진 모습으로 눈을 맞춰 왔다.

방송국에 있어야 할 사람이 제 옆에 있자 그녀의 두 눈이 놀라 휘둥그레졌다.

“어, 어떻게 된 거야?”

“기습하고 가 버리는 건 예의가 아니지.”

주위를 의식한 그녀가 입술을 움직이지 않으며 물었다.

그러자 그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마도 그녀가 볼에 입 맞추고 간 걸 말하는 듯했다.

그 순간이 떠오르자 그녀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와 주셨군요.”

“결혼 축하드립니다.”

그때 진혁이 손을 뻗자 태하가 진혁의 손을 마주 잡으며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 태하가 진혁을 축하해 주는 모습처럼 보였겠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정말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아영이 껌딱지라서요.”

뼈가 있는 진혁의 말에 태하가 싱긋 웃으며 받아쳤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그 속에 숨겨진 차가움을 진혁은 눈치챈 듯 입가에 힘이 들어갔다.

“어머! 혹시 대니얼 권 아니세요?”

때마침 그들 근처에 있던 여자 하객 중 한 명이 태하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그 소리에 근처에 있던 여자들의 눈빛에 일제히 불꽃이 튀더니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다.

그러자 그의 근처에 있던 아영은 순식간에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태하가 그녀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진행 요원들이 달려왔다. 그사이 그의 매니저는 빠르게 태하를 피신시켰다.

멀리서 태하가 무사히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도 곧바로 호텔을 빠져나왔다.

***

띠리릭.

현관문이 열리자 센서 등이 켜졌다. 이윽고 신발을 벗는 소리가 들리더니 거실로 들어서던 발소리가 우뚝 멈췄다.

“안 잤어?”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아영을 본 태하의 동공이 놀라 커졌다.

그럴 만도 했다. 새벽 3시를 지난 시간이었으니까.

“잠이 안 와서.”

그가 들고 온 가방을 소파에 내려놓은 뒤 그녀 옆에 앉았다.

“오늘 결혼식에 멋대로 찾아가서 화났어?”

“아니. 그보다 궁금한 게 있어.”

아영은 결혼식장에서 당황하고 놀라긴 했지만 화가 나진 않았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뭔데?”

“오늘 결혼식엔 왜 온 거야?”

“너 혼자 보내기 싫어서.”

그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 그것 때문에 온 거야?”

“아니면?”

그는 다른 이유가 있을 리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나야 모르지. 다른 목적이 있어서 왔는지도.”

“다른 목적?”

“결혼식 핑계 삼아 누굴 보러 왔는지.”

“너 설마 기사 보고 이러는 거야?”

그가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들어 올리며 되물었다.

아영은 그를 쳐다보는 눈에 힘을 준 채 입을 꾹 다물었다.

집으로 가는 동안 아영은 가슴이 떨렸다. 태하가 난처해질 걸 알면서도 저를 위해 결혼식장까지 와 준 것 같아 설레기까지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부푼 마음은 산산이 부서졌다.

배우 신소유와 그의 스캔들 기사가 터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주차장에서 함께 있는 장면이 찍혔는데 그곳이 바로 진혁의 결혼식이 있던 호텔이었다.

기사에는 두 사람이 광고를 찍으면서 알게 됐고, 재미 교포 출신인 신소유의 적극적인 대시로 가까워졌으며, 지난번 스캔들의 상대 여자도 신소유일 거라고 추측했다.

처음 기사를 읽었을 때 아영은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와 만나고 있는 사람은 저였으니까.

하지만 기사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게 다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실 집에서의 생활을 제외하고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내는지 그녀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스케줄이 있으면 그런 줄로 알았지 그녀가 자세히 물어본 적도, 그가 말해 준 적도 없었다.

그러니 그가 마음먹고 양다리를 걸쳐도 그녀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무조건 지르고 보는 기사를 다 믿어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 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그녀를 괴롭혔다.

“묻잖아. 이아영.”

“그래. 기사 봤어.”

그의 매서운 눈빛에 아영은 내심 움찔했지만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너도 설마 내가 신소유 보러 갔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주차장에서 뭘 한 건데?”

그에게 심문하듯 물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와 신소유가 함께 있는 모습이 자꾸만 오버랩되자 저도 모르게 목소리에 날이 섰다.

“우연히 주차장에서 마주쳤고, 소유 씨도 결혼식에 왔다고 해서 같이 엘리베이터 타고 간 것뿐이야. 설마 내가 널 두고 양다리라도 걸칠 줄 알았어?”

그가 결백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 사진 속 두 사람은 퍽 다정해 보였다.

자신의 설명에도 그녀의 표정이 나아지지 않자 그의 눈동자가 서늘해졌다.

“네 머릿속에 내가 얼마나 나쁜 새낀지 모르겠지만 난 그런 양아치 짓은 안 해. 그러니 쓸데없는 의심은 하지 마.”

그의 단호한 얘길 듣고 나서야 아영은 내내 자신을 괴롭히던 불안이 눈 녹듯 사라지는 걸 느꼈다.

곤두섰던 그녀의 표정이 미세하게 풀어지는 걸 지켜보던 그가 얼굴을 한쪽으로 기울이며 나직하게 덧붙였다.

“대신 질투는 해도 돼.”

“뭐?”

“네가 질투하는 모습 보면 짜릿할 거 같거든.”

“꿈 깨. 그럴 일 없을 테니까.”

새침한 그녀의 대꾸에 그가 눈빛을 번뜩이더니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아영이 그를 피해 뒤로 물러났지만 이내 소파 등받이에 막히고 말았다.

“말했지. 인생은 단정 짓는 게 아니라고.”

“다가오지 마.”

“이 손으로 날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아영이 손을 뻗어 그가 다가오지 못하게 막았다.

하지만 그는 쉽게 그녀의 양손을 붙잡아 그녀의 손바닥에 제 입술을 묻었다. 그러고는 보드랍고 뜨거운 입술을 진하게 비볐다.

“읏. 하지 마.”

그의 더운 숨결이 제 손바닥에 짓이겨지자 아영이 헐떡였다.

“알잖아.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 환장하는 놈이라는 거.”

“흡!”

그의 새카만 눈동자가 그녀를 핥듯이 쳐다보며 이죽거렸다.

곧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뜨거운 입술 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

그와의 비밀 동거는 뜨겁고도 뜨거웠다.

그가 잠깐 쇼 때문에 미국을 다녀온 2주일을 제외하고는 두 사람은 단 하루도 떨어지지 않았다.

함께 요리하고, 함께 밥을 먹었으며, 함께 영화를 보고, 함께 운동하고, 함께 사랑을 나눴다.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매 순간순간이 행복했다.

그녀에게 행복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 같은 거였다. 그래서 기대하지 않았고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태하를 만나면서 행복을 알게 된 그녀는 하루하루가 꿈만 같았다.

그래서 불안했다. 그 행복이 사라질까 봐.

시간은 빨리 흘러 그가 출연 중이던 모델 오디션 프로그램이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그로 인해 한국에서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모든 방송사에서 그를 데려가려고 혈안이었다.

아영은 그가 잘된 게 기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조바심이 났다. 그가 한국에서 머물기로 한 일정이 점점 끝나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이 지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그는 유독 그녀에게 살갑게 굴었다.

최소한의 스케줄만 소화한 뒤 나머지는 그녀와 함께 보내려고 노력했다.

아영은 그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그와 헤어질 생각을 하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아 난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아영은 일부러 재미있는 척, 즐거운 척 웃었다.

그즈음 그녀는 몸에 이상을 느꼈다.

처음에는 몸살처럼 몸이 으슬으슬 춥더니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졌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걱정한 태하는 당장 병원에 가자고 했지만 늦은 시간이기도 했고,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라는 말에 곧바로 약국으로 튀어 갔다.

그가 씻으러 간 사이 사 온 약을 먹으려는 순간 머릿속에 번뜩 스치는 생각에 아영은 탁상 달력을 찾았다.

날짜를 확인하던 그녀는 이번 달 생리를 건너뛰었다는 걸 깨달았다.

설마…….

머릿속이 하얘졌다. 지금껏 생리를 한 달이나 건너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에 아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진혁의 결혼식이 있던 날 밤.

태하는 가지고 있던 걸 모두 사용하고서도 지칠 줄을 몰랐다.

아마도 그녀가 기절 직전에 피임 없이 했던 그때가 원인이 된 듯싶었다.

아직 속단하지 말자고 자신을 타일러 보았지만 마음속에 일렁이는 불안을 아영은 어쩌지 못했다.

***

그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아영은 회사에 출근한 뒤 약국을 찾았다. 임신 테스트기를 산 다음 회사 화장실로 향했다.

잠시 후 초조하게 테스트기를 쳐다보던 아영은 처음에 한 줄만 보이자 안도했다.

하지만 뒤이어 희미하게 올라오는 두 번째 줄을 본 순간 놀란 입을 틀어막았다.

‘어떻게…….’

내내 걱정하던 일이 현실이 되자 아영은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아니야. 아닐 거야.

아무리 테스트기 정확도가 95%라지만 방금 한 게 첫 소변으로 한 게 아니니 임신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날 아영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사무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산부인과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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