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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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의 여파는 상당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태하와 지내는 게 익숙해져 버린 건지, 아영은 틈만 나면 그를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가 일어났는지 궁금했고, 점심때가 되면 밥은 먹고 일하는지 궁금했으며, 저녁이 되면 뭐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지금까지 누군가의 일거수일투족이 이렇게 궁금한 적이 없었다.

하물며 진혁에 대해서도 그런 적이 없었다.

그제야 아영은 진혁을 남자로서 좋아한 것인지 아니면 저를 아버지처럼 따뜻하게 보살펴 주는 걸 좋아한 것인지 냉정하게 돌아보았다.

그리고 곧 제 감정의 실체를 깨달았다.

진혁을 향한 제 마음은 막연한 동경과 애정 결핍에서 비롯된 감정이었다는 것을.

그래서였을까. 진혁을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우연히 손길이 맞닿았을 때 거부감이 들었던 이유가.

그땐 남자 경험이 없어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거라 생각했지만 5년이 지나도록 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태하와는 처음부터 달랐다. 졸업식 날 느닷없이 제게 키스를 퍼부었을 때도, 그와 첫 밤을 보냈을 때도 거부감 따윈 들지 않았다.

제가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에 두려움이 일긴 했지만, 그 두려움은 곧 황홀감으로 바뀌었다.

처음 아영은 그의 테크닉 때문이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하면 할수록 테크닉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가 나직하게 속삭여 주는 말에 가슴이 떨렸고, 그가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길에 온몸이 뜨거워졌으며, 그와 완전한 하나가 되었을 때는 기쁨의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태하에 대한 마음을 깨달았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그가 원하는 건 제 몸이었지 마음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아영은 평상시와 똑같이 그를 대하려고 노력했다.

그에게 전화가 오면 평상시처럼 받았고, 그가 만나자고 하면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의 집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러면 그는 몇 년은 굶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달려들었고, 아영은 못 이긴 척 그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사실 그녀 역시 애타게 그의 손길을 기다렸다.

그럴 때마다 그는 그녀가 다시 자신의 집에서 살길 원했지만 그를 향한 제 마음을 알게 된 지금, 아영은 제 마음을 들킬까 봐 거절했다.

그 무렵 뜻밖의 화재가 일어났다.

늦게 야근하고 돌아온 날 화마에 휩싸인 자신이 살던 빌라를 보게 된 아영은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1층에서 시작된 불길은 빠르게 그녀가 살던 2층으로 옮겨 가고 있었다.

매섭게 타오르는 불길을 보고 놀란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 순간 귀를 찢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소방차가 좁은 골목길을 비집고 들어오더니 40분 만에 불길을 잡았다.

때마침 야근하고 왔기에 망정이지 만약 집에 있었다면 아마 그녀는 연기에 질식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3층짜리 빌라 전체가 불타 버리고 말았다.

당장 갈 곳이 없어진 아영은 망연자실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아영은 친구 수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아빠와 싸우고 집을 나온 엄마와 같이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아영은 조용히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 아영은 모텔방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

다음 날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도 갈 곳이 사라진 아영은 퇴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태하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어디야?]

“회사.”

그에게 괜한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 집에 불이 난 사실을 말하지 않았던 아영은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집에 안 가?]

“이제 가려고.”

그녀의 대꾸에 그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여보세요?”

[너 괜찮아?]

전화가 끊어진 줄 알고 그녀가 부르자 그가 툭 던지듯 물었다.

“뭐가?”

아영은 순간 들킨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지만 이내 시치미를 뗐다.

[아냐. 오늘 집에 좀 들렀다가 가.]

“지금?”

[어. 놓고 간 게 있더라.]

“뭔데?”

[와 보면 알아.]

그의 단호한 어조에 아영은 다음에 가겠다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띵동.

초인종 소리가 울리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외출하고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셔츠 차림의 그가 서 있었다.

그의 새까만 눈동자가 제게 향하자 아영은 떨리는 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놓고 간 게 뭐야?”

“들어와.”

그녀에게 시선을 거둔 그가 돌아서자 아영은 조용히 따라 들어갔다. 거실로 들어선 아영은 그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왜 말 안 했어?”

“뭘?”

그녀 쪽으로 천천히 몸을 돌린 그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네가 살던 집 불난 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놀라 커진 그녀의 눈을 그가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떻게…… 알았어?”

“뉴스 보고.”

설마 그걸 보고 알아차릴 줄이야.

워낙 잠깐 방송에 나왔고, 자세한 집 위치도 나오지 않았을뿐더러 집 외관까지 타 버린 상황이라 모를 줄 알았다. 눈썰미 좋은 수인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됐어.”

아영은 걱정할 그를 위해 일부러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그게 끝이야? 뉴스 보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놀랄 게 뭐 있어.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데.”

“하, 넌 진짜!”

그가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러고는 이내 화를 삭이려는지 천천히 숨을 몰아쉰 뒤 입을 열었다.

“어제 어디서 잤어?”

“모텔.”

“하.”

그녀의 대꾸에 다시금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그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오늘부터 여기서 지내.”

“뭐?”

“아니면 계속 모텔에서 지낼 거야?”

할 말이 없어진 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밤새 건너편 방에서 들려오는 노골적인 소리에 아영은 귀를 틀어막아야 했다.

“오래 있으라고 안 해. 집 해결될 때까지만 여기서 지내.”

더는 거절할 명분이 없었기에 아영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 당분간 신세 좀 질게.”

“잘 생각했어.”

그제야 내내 살벌하던 그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렇게 아영은 뜻하지 않게 다시 그와 이웃사촌이 되었다.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던 남의 집 생활에 아영은 놀랍도록 빨리 적응했다.

자신에게 이런 면이 있나 싶을 정도로 남의 집에서 지내는 게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아마 수시로 드나드는 태하 때문인지도 몰랐다.

처음 태하는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왔다. 하지만 3일째 되던 날부터는 번거롭다며 초인종도 누르지 않고 제멋대로 들어왔다.

“내가 씻고 있으면 어떻게 하려고 멋대로 들어오는 거야?”

“내가 너보다 네 알몸 더 많이 봤을걸?”

낯부끄러운 소릴 능청스럽게 늘어놓는 그를 보며 아영은 눈을 흘겼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그녀가 지내는 집에서 거의 생활하다시피 했다.

점심시간, 밥을 먹고도 시간이 남아 근처 공원에서 볕을 쬐고 있는데 문득 태하와 아침에 모닝키스 때문에 다툰 게 떠올랐다.

기어코 하겠다는 그와 늦었으니 그냥 가겠다는 그녀와의 실랑이는 결국, 엘리베이터 앞까지 쫓아 나온 그의 승리로 끝이 났다.

피식. 웃음이 샜다.

누군가와 함께 지내는 게 즐거울 수 있다는 걸 아영은 처음 알게 됐다.

그동안 아영은 치열하게 살아 왔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악착같이 공부했고, 대학에 들어와서는 등록금을 내기 위해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했으며, 사회에 나와서는 누군가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제일 먼저 출근했고, 제일 늦게 퇴근했다.

그래야지만 그녀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던 불안이 가라앉았다.

그런데 태하와 지내면서 잊고 있던 여유를 알게 됐다.

그가 촬영이 없는 주말이면 서로 살을 부대끼며 12시가 넘도록 느긋하게 늦잠을 잤고, 점심을 간단하게 먹고 늘어지게 누워 영화를 봤으며, 그가 해 준 저녁을 배불리 먹은 뒤 아무도 없는 시간에 공원을 산책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그냥 걷자는 그녀의 손을 강제로 잡은 것도 모자라 깍지까지 낀 그는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손가락 마디마디에 키스하기도 했다.

하지 말라면 더 하려고 드는 그의 청개구리 기질 때문에 아영은 만류하는 것도 포기했다.

그렇게 두세 시간을 걷다 와서도 그의 에너지는 바닥이 나지 않는지 힘들어하는 그녀의 다리를 꼼꼼하게 주물러 준 뒤 따뜻한 목욕물을 받아 그녀의 몸을 정성껏 씻겨 주기까지 했다.

그러고 나면 흐물흐물해진 그녀를 안아 침대에 곱게 눕히고 그녀가 잠들 때까지 머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면 아영은 따뜻한 그의 품속에서 꿈도 없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녀의 혈색은 나날이 좋아져 눈치 빠른 직원들에게 요즘 연애하냐는 소리를 들었다.

아니라는 그녀의 말에 진혁이 뚫어지게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아영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반면에 태하와 함께 지내는 게 좋은 만큼 기자나 다른 사람들에게 들킬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점점 커져 갔다.

그리고 언제까지 그의 집에서 신세 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아영은 틈이 나는 대로 집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제집도 불타 전세금 돌려줄 돈도 없다며 보험금 처리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집주인의 말에 아영은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

시간은 쏜살같이 달려 한 달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진혁의 결혼식 날 아침은 하늘이 청명했다.

“꼭 가야 해?”

아영이 평소 안 하던 귀걸이를 하는 모습을 뒤에서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그가 툭 던졌다.

“직원들에게 간다고 했으니까.”

“네가 가고 싶은 게 아니라?”

“아니야.”

그가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들어 올리며 물었다.

순간 귀걸이를 하던 그녀의 손이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열중했다.

사실 처음에는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진혁이 다른 여자와 식장에 입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하와 함께 지내면서 진혁을 향한 감정들이 조금씩 옅어지는 걸 느낀 아영은 아직 미약하게 남아 있는 미련을 깨끗이 털어 버릴 생각으로 결혼식에 가기로 했다.

그런 다음 새로운 마음으로 태하와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갔다 올게.”

어렵게 찾은 구멍에 간신히 귀걸이를 한 아영이 몸을 돌리자 그녀의 귀 끝에 매달린 작은 큐빅이 반짝거렸다.

외출 준비를 마친 그녀의 모습을 본 그의 손마디가 침대 모서리를 힘 있게 움켜쥐었다.

“그럼 나랑 같이 가.”

“너 1시에 스케줄 있다며.”

그녀가 따라나서려는 그의 팔을 가만히 붙잡았다.

“걱정하지 마. 인사만 하고 올 거니까.”

그렇게 덧붙인 아영은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

처음이었다. 그녀가 먼저 그에게 다가간 건.

당황한 그가 얼어붙은 틈을 타 귀 끝이 붉어진 아영은 황급히 집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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