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82)

31

차가운 공기가 투명한 살색 스타킹 속으로 훅 들어오자 아영이 부르르 떨었다.

“흡!”

그녀의 귓바퀴를 자근자근 깨물던 그가 혀끝을 세워 깊숙이 파고들었다.

질퍽한 소리와 젖은 숨결이 그녀의 신경을 적시는 동안 그의 손길은 바쁘게 그녀의 몸 위를 부유했다.

가녀린 등을 타고 내려와 잘록한 허리를 쓰다듬던 그의 손길은 이내 둥글게 솟은 엉덩이에 닿았다.

완만한 곡선과 부드러운 탄력이 손안에 이지러지자 홧홧한 열기가 온몸에 퍼졌다.

그는 터질 듯 부풀어 오른 흥분에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더는 못 참겠다. 내 목 꽉 잡아.”

그 말과 동시에 그가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갑자기 몸이 하늘로 붕 날아오르자 아영은 본능적으로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긴 다리를 이용해 성큼성큼 걸어간 그는 그녀를 넓은 소파에 눕혔다.

그녀 사이에 자리 잡은 그는 거침없는 손놀림으로 제 허리에 묶인 가운 끈을 풀어 저 멀리 던져 버렸다.

순식간에 전라의 상태가 된 그는 마치 그리스 신처럼 완벽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에 반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을 게 뻔한 제 모습이 창피해, 아영은 본능적으로 제 몸을 가렸다.

“가리지 마. 지금 네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넌 모를 거야.”

“거짓말.”

아영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뇌까렸다.

“보여 줄게. 내 말이 거짓말인지, 아닌지.”

그녀의 양손을 하나로 움켜쥔 태하는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입술의 경계를 잊어버린 것처럼 그녀의 얼굴 전체에 키스를 흩뿌렸다.

둥글게 튀어 오른 이마에, 감긴 눈두덩에, 오뚝하게 솟은 콧등에, 열에 들뜬 볼에, 잔뜩 예민해진 귓불에, 신음하지 않기 위해 힘주어 버티고 있던 턱 끝까지.

마치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무엇이라도 된 듯한 키스에 그가 다시 제 입술을 찾았을 때 아영은 부끄러움도 잊은 채 그에게 매달렸다.

그녀의 허리를 지분거리던 그의 손이 그녀의 블라우스 안으로 파고들어 한 손 가득 움켜쥐었다.

그녀의 입에서 숨넘어갈 듯 흐느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태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제 손길이 닿았던 곳에 깃털 같은 키스를 흩뿌렸다.

간질간질한 쾌감을 참지 못한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행동에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그가 그녀의 스타킹을 끌어 내리는 순간.

띵동.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누가 왔나 봐.”

다급히 그의 손을 막은 아영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제 막 본론에 들어갈 참이던 그의 입에서 낮은 욕설이 튀어나왔다.

“매니저일 거야.”

아영은 그제야 그가 매니저에게 옷과 생필품을 부탁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것도 잊고 그와 야한 짓을 하려고 했다니.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었다.

“어서 비켜.”

“걱정하지 마. 여긴 못 들어오니까.”

그가 비킬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제 위에 버티고 있자 그녀가 그의 가슴을 밀쳤다. 하지만 역시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늦게 나가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 아니야.”

“그럼 눈치껏 기다리겠지.”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빨리 나가 봐.”

못 이긴 척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태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바닥에 널브러진 가운을 집어 들었다.

그가 일어나자마자 황급히 몸을 세운 아영은 가슴 위까지 올라간 블라우스와 브래지어를 끌어 내린 다음 서둘러 스커트를 내렸다.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진 뒤 고개를 들자 저를 쳐다보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나가려고?”

“왜?”

그가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히 문제였다. 가운으로 교묘하게 가리긴 했지만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그가 흥분해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도 있었다.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가.”

“귀찮아.”

그러더니 태하는 그녀가 만류하기도 전에 성큼성큼 현관으로 걸어가 버렸다.

아영이 빠른 걸음으로 뒤따라갔지만 그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가 현관문을 벌컥 열자 그의 매니저인 용준이 양손 가득 종이 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그러다 그녀가 서 있는 걸 보고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인사를 건넸다. 아영도 따라 어색하게 인사했다.

“수고했어.”

“저…….”

태하가 그만 가 보라는 듯 말을 하자 매니저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운을 떼었다.

태하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자 용준이 그의 뒤에 있던 아영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까 팀장님께 전화 왔었습니다.”

“캐롤라인한테서?”

“네. 계속 통화가 안 되셔서 저한테 하신 것 같습니다.”

태하는 전화가 온 걸 알고 있었는지 그리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뭐래?”

“전화 좀 꼭 달라고 하셨습니다.”

“일단 알았어.”

그는 골치 아프다는 듯 주름진 미간을 손으로 꾹꾹 누르며 말했다.

용준이 돌아간 뒤 그가 소파로 돌아왔다.

생각에 잠긴 듯한 그의 표정을 본 아영이 말문을 열었다.

“에이전시에서 전화가 온 거야?”

“그래.”

“혹시 오늘 터진 스캔들 때문이야?”

“넌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나한테만 신경 써.”

그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은 뒤 키스로 입을 막아 버렸다.

***

“이 주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아영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는지 진혁이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영이 고개 숙여 인사하자 진혁이 들고 있던 커피를 내밀었다.

“잠 못 잔 것 같아서.”

“괜찮습니다.”

그녀의 거절에 진혁은 손을 거둬들였다. 잠시 둘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시선을 돌린 아영은 엘리베이터 숫자를 확인했다. 고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기사 났던데.”

초조하게 점점 줄어드는 숫자를 지켜보는데 진혁이 불쑥 내뱉었다. 아마도 스캔들 기사를 본 모양이다.

아영은 조용히 숨을 삼켰다.

“괜찮아?”

“네.”

“행동 조심해. 만약 그 남자 상대가 너라는 게 밝혀지면 아마 회사 다니기 힘들 거야.”

“알고 있습니다.”

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녀가 올라타자 뒤이어 진혁이 올라탔다.

스르륵.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아영아.”

단둘이 되자 진혁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영이 가만히 고개를 돌리자 진혁이 나직하게 덧붙였다.

“난 네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왜 제가 상처받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진혁이 단정 지어 말하자 아영은 기분이 언짢았다.

“그 남잔 너와 어울리지 않아.”

“제 분수에 안 맞는다는 건가요?”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거 알잖아.”

“아뇨. 모르겠어요. 그리고 어울리든 안 어울리든 상관없어요.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니까.”

그녀의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이 나올 줄 몰랐는지 진혁의 얼굴이 굳어졌다.

“만난 지 얼마 안 됐잖아.”

“알고 지낸 건 선배보다 더 길어요.”

“그렇다고 벌써…….”

“선배, 아니 팀장님. 앞으로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과한 관심은 자제 부탁드립니다. 팀장님 약혼녀에게 또 오해받고 싶지 않거든요.”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대로 돌아선 아영은 먼저 내렸다.

혼자 남은 진혁은 침잠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 뒤로 진혁은 아영의 부탁을 받아들인 건지, 아니면 그녀의 말에 기분이 언짢았는지 그녀를 대할 때 거리를 두었다.

사내 식당에서 그녀를 보면 일부러 멀리 떨어져 앉았고, 직원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다 그녀와 마주치면 먼저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업무 얘기를 제외하고는 일절 그녀와 말을 섞지 않았다.

처음에는 대놓고 저를 피하는 진혁의 행동에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영은 익숙해져 갔다.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일주일이 지났다.

“안 가면 안 돼?”

가방을 챙기는 그녀에게 태하가 툭 던졌다.

“일주일만 있기로 약속했잖아.”

사실 그녀도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무서울 정도로 태하에게 빠져드는 자신이 아영은 두려웠다.

진혁을 향한 마음은 5년이란 시간 동안 조금씩 축적되었다. 단기간에 좋아하게 된 게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와 지내는 일주일 동안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권태하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그와 떨어져 있고 싶었다. 이 감정의 실체가 무언지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갈게.”

“가지 마.”

그가 돌아서는 그녀를 뒤에서 와락 껴안았다.

“매일 하자고 귀찮게 안 할게. 네가 허락할 때까지 손 하나 터치 안 할 테니까…….”

“그래서 가는 거 아니야.”

“그럼?”

커다란 그의 몸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자 그녀의 두 눈이 파르르 떨리면서 감겼다.

이대로 더 있다가는 떨어지기 힘들 것 같아 아영은 저를 감싼 그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아 푼 뒤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는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한껏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집도 오래 비웠고, 언제까지 친구들에게 거짓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직도 싫어?”

그녀가 까만 눈을 깜박이자 그가 덧붙였다.

“친구들한테 우리 사이 말하는 거.”

아영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처음 태하와 만남을 시작했을 때 그는 친구들에게는 공개하자고 했다.

하지만 아영은 극구 반대했다.

서로를 좋아해서 사귄 것도 아니고, 그가 미국으로 돌아가면 끝날 관계였기에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와 스캔들이 터졌을 때 그녀의 동네를 알고 있는 수인이 ‘사진 찍힌 곳 혹시 너희 동네 아니야?’라고 물었었다.

그때 아영은 태어나 처음으로 식은땀이라는 걸 흘렸다.

비슷하지만 아니라는 그녀의 거짓말에 수인은 ‘그치, 권태하가 너희 동네에서 데이트 할 리가 없지’라며 의심을 지웠다.

“도착하면 전화할게.”

“같이 가. 차로 데려다줄게.”

아영이 따라나서려는 그의 팔을 저지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혼자 갈게. 이번에 또 찍히면 곤란하잖아.”

그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오지 마.”

“이아영.”

신발을 신은 아영이 현관문을 열려는 순간 그가 불렀다.

아영이 몸을 돌리자 그녀와 눈을 맞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음 바뀌면 언제든 돌아와.”

아영은 옅게 웃어 보인 뒤 그의 집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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