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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은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전화를 받았다.
“어떻게 된 거야?”
그녀가 인사도 생략한 채 차갑게 묻자 그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파파라치 따돌리려고 일부러 다른 차로 바꿔 갔는데 눈치챌 줄 몰랐어. 지금 소속사에서 입장문 만들고 있으니까 조만간 반박 기사 나갈 거야. 그러니 걱정 안 해도 돼.]
“알았어.”
그의 차분한 설명에 울렁거리던 속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아침에 인사도 없이 먼저 가서 미안해. 잠든 지 한 시간도 안 된 너를 도저히 깨울 수가 없어서 그냥 갔어.]
“덕분에 더 잤으니까 됐어.”
사실은 기분 나빴지만 티를 내고 싶지 않았던 아영은 마음과 다르게 말했다.
[내심 서운할까 걱정했는데 너무 아무렇지 않아 하니까 이건 이것대로 자존심 상하네.]
지이잉.
「5분 뒤 회의 시작이야. 빨리 와.」
그때 현주에게서 문자가 왔다.
“그만 들어가 봐야 해. 나중에 통화해.”
전화를 끊은 아영은 서둘러 비상구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이후로는 업무가 바빠 그와 통화할 시간이 없었다.
***
피곤함에 지친 몸으로 집으로 향하던 아영은 제집 앞에 카메라를 들고 서 있는 기자들을 보고 기겁하고 돌아섰다.
오후에 그의 소속사에서 친구 사이일 뿐이라는 입장문을 내자 그의 팬이던 연수와 현주는 그럴 줄 알았다며 안도했다.
그 반응을 보며 아영은 한낱 해프닝으로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온 아영은 떨리는 손으로 태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바쁜지 받지 않았다.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 때문에 모텔에라도 가야 하나 생각하고 있던 그때 그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미안. 촬영 중이라 전화 못 받았어.]
핸드폰에 찍힌 부재중 번호를 보고 전화한 모양이었다.
“우리 집 앞에 기자들이 찾아왔어.”
그가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기자들이랑 마주쳤어?]
“아니.”
[다행이다. 그래서 지금 어디야?]
“버스 정류장.”
[주소 보내 줄 테니까 일단 거기로 가 있어.]
“아니야. 그냥 이 근처 모텔에서 잘게. 출근하려면 옷도 갈아입어야 하고 또…….”
[특종에 목맨 사람들이야. 그런 사람들이 순순히 돌아갈 것 같아? 아마 너 들어올 때까지 며칠이고 집에 안 가고 지키고 있을걸.]
“설마 그렇게까지…….”
[내 말 못 믿겠으면 한 번 가 보든가.]
그의 확신에 찬 어조에 아영은 갈등이 일었다.
누구보다 이 바닥의 생리를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그냥 하는 소리는 아닐 터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아영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보내 줘. 주소.”
전화를 끊자마자 주소가 적힌 문자가 왔다. 아영은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40분 뒤 도착한 곳은 한남동에 있는 고급 오피스텔 건물 앞이었다.
택시에서 내린 아영은 그가 알려 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9층에 도착한 아영은 두 개의 현관문 중 1903호 앞에 멈췄다.
천천히 심호흡한 후 비밀번호를 눌렀다.
띠리릭.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렸다.
아영이 손잡이를 당겨 안으로 들어가자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그곳에 누군가 있었다.
“왔어?”
“……네가 왜 여기 있어?”
태하는 막 씻고 나왔는지 가운 차림에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예상치 못한 그의 등장에 그녀의 두 눈이 놀라 휘둥그레졌다.
“일단 들어와.”
그가 자리를 옮기자 현관 앞에 멍하니 서 있던 그녀는 그제야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뭐 좀 마실래?”
“어떻게 된 건지부터 말해.”
그녀의 재촉에 태하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근처에서 인터뷰가 있었어. 끝나자마자 곧바로 여기로 온 거야.”
흔들림 없는 그의 눈동자를 보니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여긴 누구 집이야?”
아영이 거실을 둘러보며 물었다. 30평대 정도 돼 보이는 이곳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인테리어가 모두 새것처럼 깨끗했다.
“친구 집이야. 어학연수 간 동안 내가 잠시 사용한다고 했어.”
“그런데 나보고 여기서 지내라고?”
“여긴 내가 지낼 거고, 넌 앞집에서 지내면 돼.”
“앞집?”
아영은 이 집에 들어오기 전 바로 맞은편에 현관문이 하나 더 있던 게 떠올랐다.
“너랑 같이 지내고 싶지만 네가 싫다고 할 것 같아서.”
“나 때문에 일부러 집을 따로 구했다는 거야?”
“그런 건 아니고. 계속 호텔에서 지내는 게 불편해서 지낼 집을 알아보던 중이었어.”
“본가에서 지내면 되잖아.”
아영은 왜 멀쩡한 집을 놔두고 따로 집을 구하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촬영 시간이 불규칙적이다 보니 밤늦게 들어가는 경우가 많을 텐데 그럴 때마다 신경 써야 하는 게 싫더라고. 그러던 차에 우연히 친구 놈 집에 들렀는데 집이 괜찮더라고. 맞은편 집 비었다기에 바로 계약했지.”
그제야 아영은 의문이 풀렸다.
“그러니까 불편하겠지만 스캔들 잠잠해질 때까지만 여기서 지내.”
“언제 잠잠해질 줄 알고?”
“그리 길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당장 갈아입을 옷도 없고, 또…….”
“그건 걱정할 것 없어. 당분간 입을 옷이나 생필품은 이따 매니저가 사 올 거니까.”
“……알았어.”
더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아영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제야 그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쳤다.
“아직 저녁 전이지?”
“어? 어.”
“오는 길에 초밥 사 왔는데 같이 먹자. 일단 손부터 씻고 와. 욕실은 저쪽이야.”
소파에서 일어난 태하가 현관 근처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고는 그녀의 대답도 듣지 않고 부엌으로 걸어가 식탁 위에 포장된 초밥을 꺼냈다.
갑작스럽게 터진 스캔들이 신경 쓰여 점심을 건너뛰었던 아영은 초밥 냄새를 맡은 배 속이 맹렬하게 꼬르륵거리자 하는 수 없이 욕실로 향했다.
“앉아.”
“고마워.”
그녀가 손을 씻고 나오니 태하가 식탁에 포장해 온 초밥을 세팅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영이 맞은편에 앉자 그가 포장된 나무젓가락을 건넸다.
아영은 부드러운 연어 초밥부터 집었다. 쫀득한 밥알과 싱싱한 연어 살이 입 안에 어우러져 씹을수록 맛이 더했다.
아영은 그가 저를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다양한 초밥을 맛보는 데 집중했다.
“더 먹어.”
“아냐. 덕분에 잘 먹었어.”
순식간에 그녀 앞에 놓인 초밥이 사라지자 태하가 제 몫의 초밥을 그녀 앞에 놓았다. 그러자 아영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사실 맛있어서 먹으려면 더 먹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챈 아영은 그의 시선이 신경 쓰여 더 먹을 수가 없었다.
“커피 어때?”
“아니. 가서 쉬고 싶어.”
“그럴래?”
그가 아쉬운 표정을 뒤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가운 차림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아무리 2세대만 사용하는 층이라지만 그의 거리낌 없는 행동에 아영은 내심 당황스러웠다.
맞은편 집 앞에 선 그가 뒤따라온 그녀를 돌아보았다.
“비밀번호는 네 생일이야.”
“내 생일은 어떻게 알고?”
아영이 뜨악한 얼굴로 물었다.
그가 제 생일을 알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걸 그의 집 현관 비밀번호로 설정했다는 것에 더 놀랐다.
“내가 너에 대해 알고 있는 거 다 말하면 놀랄걸?”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태하는 그녀의 질문에 대한 답은 피한 채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영은 궁금했지만 이내 눈앞에 보인 집 안 풍경에 입을 다물었다.
구조는 좀 전의 집과 똑같았지만 인테리어는 심플하면서도 곳곳에 배치된 가구는 하나같이 고급스러웠다.
무엇보다 그를 위해 맞춤형으로 꾸며 놓은 집이었다.
“아무래도 여긴 나보다 네가 지내는 게 나을 것 같아. 난 그냥 아까 있던 집에서 지낼게.”
아영이 다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리자 그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건 안 돼.”
“왜?”
“남의 집에서 널 지내게 할 순 없어.”
“잠깐 있는 거잖아.”
“그래도 싫어. 너한테서 다른 남자 냄새나는 거.”
그의 억지에 아영은 미간을 좁혔다.
“그냥 여기서 지내.”
태하가 그녀의 손목을 자신의 코 밑에 가져다 댔다.
“네 몸에 내 냄새 배게.”
그녀의 체향을 깊숙이 들이마시며 나직하게 덧붙였다.
살갗에 그의 뜨거운 숨결이 닿자 아영은 놀란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던 그가 이내 그녀의 손목에 입술을 문질렀다. 촉촉하면서도 열기 띤 입술이 닿자 그녀의 맥박이 미친 듯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그, 그만해.”
아영이 다른 한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하지만 태하는 되레 그녀의 허리를 제 몸에 가까이 끌어당겼다.
제 복부를 찌르는 단단한 이질감을 느낀 아영의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졌다.
“미쳤어…….”
“내가 생각해도 그런 것 같아. 너만 떠올리면 이렇게 되는 바람에 오늘 몇 번이나 촬영 중단할 뻔했는지 몰라.”
사실 그녀 또한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목에 두른 익숙하지 않은 스카프가 거슬릴 때마다 그가 제 목을 깊게 빨아당겼던 기억이 떠올랐고, 무심코 가슴 끝이 옷에 쓸릴 때마다 저릿한 감각이 온몸에 퍼져 몇 번이나 움찔움찔 떨어야 했으며, 허리와 아랫배가 조여 올 때는 지난밤 그와 격렬했던 행위들이 떠올라 다리 사이가 뜨거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때 그의 얼굴이 내려왔다. 아영은 피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보이지 않는 줄에 묶인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곧 그의 입술이 닿았다.
데일 듯 뜨거운 입술이 진득하게 비벼 오자 그녀의 입술이 허물어지듯 벌어졌다.
태하는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녀 안으로 파고들었다.
촉촉하게 젖은 그녀의 혀가 닿자마자 휘감은 뒤 격렬하게 뒤섞었다. 노골적이면서도 야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움켜쥐던 그의 손이 그녀가 입고 있던 스커트를 끌어 올렸다.
그때 미약하게 남아 있던 그녀의 이성이 그의 손을 저지했지만 태하는 더 깊고 야한 키스를 퍼부어 그녀의 방어벽을 무너트렸다.
그녀의 손이 힘없이 물러났고, 그는 거침없이 그녀의 스커트를 허리까지 끌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