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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촉이 젖어 든 아영의 입술을 깊숙이 베어 문 그가 깊게 빨아당겼다. 그러자 그녀의 입술이 허리케인에 빨려 갈 듯 빨려 올라갔다.
“읏.”
흥분을 이기지 못한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탄력 있는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찌릿한 아픔과 저릿한 쾌감이 동시에 강타하자 아영이 신음을 흘렸다.
이제 곧 그의 혀가 격렬하게 밀고 들어올 거라는 생각에 긴장한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던 태하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강하게 몰아치던 그의 입술이 갑자기 떨어져 나가자 당황한 그녀가 감은 눈을 떴다.
검게 일렁이는 그의 눈동자가 지그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끝인가?
아영이 더운 숨을 내뱉으며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가 히죽 웃더니 이내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그녀의 입술을 엄지로 쓱 문질러 닦아 주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아 있던 그녀를 가뿐하게 들어 올려 제 옆에 내려놓았다.
“갈게.”
“간다고?”
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아영이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럼, 가지 말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영은 이 상황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그도 그럴 게, 그는 분명 흥분해 있었다. 당장 그녀 안으로 들어가도 무방할 만큼.
그런데 갑자기 키스를 멈추고 가겠다고 하니 그녀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벌써 나한테 싫증이라도 난 걸까?
벌써라니? 나 혹시 아쉬운 건가? 아니면 섭섭……. 설마. 그럴 리가.
그녀의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을 본 태하가 그녀의 콧등을 톡 하고 건드렸다.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어. 더 하면 못 멈출 것 같아서 그런 거니까.”
그녀가 그의 말을 이해 못 하고 빤히 쳐다보자 그가 덧붙였다.
“어제도 나 때문에 거의 잠 못 잤잖아.”
일부러 멈췄다고? 나 때문에?
뜻밖의 사실에 아영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어제 내가 짐승처럼 군 거 나도 후회하니까.”
그가 짐승처럼 군 건 맞지만 싫지 않았다. 만약 싫었다면 완강하게 거부했을 그녀였다.
그와 몸을 섞으면 섞을수록 마치 중독된 것처럼 그의 품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가 이렇게 미안해할 일은 아니었지만 아영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제 말을 그녀도 인정한다고 생각한 것인지 그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문단속 잘해.”
자신의 벗어 놓은 재킷을 챙겨 든 그가 툭 내뱉고는 이내 돌아서서 현관문으로 성큼 걸어갔다. 그러고는 문을 열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
그 뒤 일주일 동안 태하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처음 하루 이틀은 바쁜가 보다 하고 넘겼다. 그런데 셋째 날이 되자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넷째 날로 넘어가자 걱정은 이내 짜증으로 바뀌었다. 그가 아무 일 없이 잘 지내고 있다는 걸 TV에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가 심사를 맡은 모델 오디션 프로그램은 그가 출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첫 방송부터 모든 매체에서 실시간 1위를 할 만큼 엄청난 관심을 끌어모았다.
그는 심사위원 중 가장 빛이 났고, 카리스마가 있었으며, 자신의 경험담을 녹여 낸 냉정한 심사평은 참가자뿐만 아니라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청자들까지 단숨에 매료시켰다.
아영은 자신이 얼마나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 뒤로 권태하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권태하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되레 그가 저에게 했던 말과 행동들이 떠올라 좀처럼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도 야근 확정이었다.
톡. 톡.
모두 다 퇴근한 사무실에 앉아 모니터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데 누군가 파티션을 두드렸다. 고개를 드니 진혁이 서 있었다.
“끝나려면 멀었어?”
“아니요.”
엘리베이터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눈 이후, 진혁은 곧바로 해외 출장 때문에 자리를 비웠던 터라 열흘 만에 보는 거였다.
하지만 아무리 출장으로 자리를 비웠다 해도 그동안 그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당황스러웠다.
그만큼 태하 덕분에 그의 생각을 많이 털어냈기 때문일까?
“그럼 잠깐 보자.”
진혁이 사무실을 먼저 빠져나가자 가방을 챙긴 아영은 사무실을 정리하고 그를 뒤따라 나왔다.
두 사람은 사무실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카페로 향했다.
주문한 커피가 나왔지만 할 말이 있다던 진혁은 말없이 커피만 마셨다.
아영은 그가 보자고 한 용건이 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가 먼저 입을 열길 기다렸다.
침묵이 답답하게 느껴질 즈음 진혁이 재킷 주머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녀 앞에 내밀었다. 고급스럽게 디자인된 봉투는 굳이 열어 보지 않아도 뭔지 알 것 같았다.
“청첩장이야.”
“이것 때문에, 저 보자고 하신 거예요?”
“약혼 얘기 먼저 못 한 거 내내 마음에 걸리더라. 그래서 청첩장은 너한테 제일 먼저 주고 싶었어.”
잔인한 배려였다.
커피는 입에도 대지 않았는데 쓴 물이 올라온 것처럼 입 안이 썼다.
“올 거지?”
가고 싶지 않았다. 그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모습 따윈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 사람과 같이 올 수 있으면 와.”
“그럴게요.”
진혁이 태연하게 덧붙인 말이 아영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하지만 지금껏 자존심 하나로 버텨 왔던 아영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딱 거기까지였다. 더 있다가는 감춰 둔 속내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올까 봐 아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먼저 일어나야 할 것 같아요.”
“왜?”
진혁이 뜨악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약속 있는 걸 깜박했어요.”
“주문한 커피라도 마시고 가지.”
진혁이 아쉬운 눈길로 말했다.
“죄송해요. 지금 가도 늦어서, 먼저 가 볼게요.”
아영은 진혁이 붙잡기라도 할까 봐 도망치듯 카페를 나왔다.
뒤에서 그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영은 돌아보지 않았다. 가슴에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던 그녀의 시야에 편의점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아영은 발걸음을 멈췄다. 진혁의 결혼 소식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상태로 집에 들어가 봤자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소주 두 병과 육포를 샀다.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는데 헤드라이트 불빛이 깜빡였다. 눈이 부신 아영이 손을 올려 빛을 가리는데 때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액정 화면을 확인한 아영은 걸음을 멈췄다. 태하였다.
일주일 동안 연락 한 번 하지 않은 그의 전화에 화가 남과 동시에 심장이 둥둥 울렸다.
아영은 흥분을 가라앉힌 다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야.]
나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핸드폰을 쥔 그녀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무슨 일이야.”
[얼굴 좀 보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얼굴 좀 보자고 말하니 아영은 어이가 없었다.
“지금 밤 10시야.”
[그래서?]
그는 뭐가 문제냐는 듯 말했다. 뻔뻔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저한테 만나자고 매달릴 때는 언제고, 일주일 동안 버려둬 놓고 이제 와서 대뜸 얼굴 좀 보자니.
그의 말을 단칼에 거절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아영은 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보기 싫어도 봐야 해. 나 지금 너희 집 앞이거든.]
“뭐?”
깜짝 놀란 아영이 재빨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헌옷 수거함 근처에 주차된 차에서 헤드라이트 불빛이 두 번 연속 깜빡였다. 아영은 그 차가 권태하의 차라는 걸 깨달았다.
[타.]
“안 타. 돌아가.”
[그럼, 내가 너희 집으로 갈까?]
마지막에 그와 있었던 일이 떠오른 아영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결정해.]
그가 제집으로 온다면 그때와 같은 일이 또 벌어질 게 뻔했다.
그때 그가 멈추지 않았다면 아영은 또다시 그의 품에 매달려 밤새 헐떡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낯부끄러운 짓은 한 번이면 족했다.
마지못해 몸을 돌린 아영은 그의 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창문이 짙게 선팅되어 있어 그가 운전석에 있는지 아니면 뒷좌석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조수석에 타.”
그때 태하가 운전석 창문을 살짝 내려 말했다.
아영이 조수석에 올라타자 트레이닝복에 야구 모자를 눌러쓴 태하가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보는 평상복 차림이 낯설어서 그런지 그는 다른 사람 같았다.
좀 더 어려 보이고 남자다워 보인달까?
반면 일에 찌들어 피곤하고 지친 자신의 모습이 그의 눈에 얼마나 초췌하게 보일지 생각하니 한시라도 빨리 그의 시야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래서 아영은 그의 시선을 피해 정면을 응시한 채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퉁명스러운 그녀의 말에 부드러웠던 그의 표정이 사라졌다.
“일주일 만에 보는 사람한테 너무 야박하네.”
“피곤해. 빨리 가서 쉬고 싶어.”
얼굴은 쳐다도 보지 않은 채 편의점 봉투만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태하가 갑자기 그녀의 손에 들린 봉투를 확 잡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봉투 안에 담긴 소주병이 부딪치며 소리가 났다.
“뭐 하는 짓이야?”
당황한 그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빨리 쉬고 싶다는 사람이 이건 왜 샀어?”
“이리 줘.”
아영이 봉투를 빼앗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그는 되레 더 멀리했다.
아영은 봉투에 제 손이 닿지 않자 그를 노려보는 눈에 힘을 줬다.
“말해. 무슨 일이야.”
“아무 일도 없었어.”
그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잘 마시지도 못한 술을 두 병이나 샀다고? 그것도 소주를?”
그녀의 주량을 대충 알고 있던 그가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네가 나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안다고 잘난 척해? 내가 없다고 하면 없는 거야. 그러니까…….”
“혹시 그 새끼 때문이야?”
“……아니야.”
아영은 저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뒤늦게 아니라고 했지만 그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