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아영이 다시 눈을 떴을 땐 혼자가 아니었다.
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 태하를 본 순간 아영은 잠이 덜 깼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빠르게 두 눈을 깜빡거렸다.
하지만 여러 번을 깜빡거렸는데도 그의 형상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그녀 앞에 있었다.
뭐지?
“잘 잤어?”
생생한 목소리까지 들리자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아영은 놀라 침대에서 반쯤 몸을 일으켰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어, 어떻게…….”
막 잠에서 깬 터라 목소리가 잔뜩 쉬어서 나왔다.
“집에 불은 켜져 있는데 전화는 해도 안 받지, 초인종 소리에도 응답이 없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냥 들어왔어.”
“비밀번호는 어떻게 알고?”
“내가 좀 눈썰미가 좋거든.”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아마 비밀번호 누르는 걸 뒤에서 눈여겨보았나 보다. 뻔뻔한 그의 말에 아영은 어이가 없었다.
“이거 불법 침입이야.”
“그래서 신고할 거야?”
아영은 대답 대신 그를 흘겨보았다. 그렇게는 못 할 거라는 걸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아무튼, 못됐어.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그럼, 사람 걱정시키지 말든가.”
나를 걱정했다고?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아영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못 믿겠어?”
“…….”
“넌 가끔 나를 냉혈한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
아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그녀의 콧등을 톡 건드리며 말했다.
“배고프다. 밥 먹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태하가 부엌으로 어슬렁 걸어갔다.
그제야 장 봐 온 걸 아직 냉장고에 넣어 두지 않았다는 걸 떠올린 아영이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식탁 위에 있어야 할 물건 대신 밥이 차려져 있는 걸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이게 뭐야?”
“뭐긴. 앉아. 국 식었겠다.”
태하는 그녀 앞에 놓인 어묵국을 다시 냄비에 쏟은 뒤 가스를 켰다.
“……다 네가 한 거야?”
“그렇게 놀랄 거 없어. 별거 아니니까.”
아영이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묻자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가 차린 음식은 네 종류나 되었다.
막 지은 흰 쌀밥에 고춧가루로 버무린 콩나물무침과 시금치 그리고 소복이 올라와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달걀찜과 어묵국까지. 그녀가 장 봐 온 재료로 잘도 만들어 놓았다.
“대체 언제 와서 한 거야?”
“대략 한 시간 전쯤?”
“그런데 내가 한 번도 안 깼다고?”
“코 골고 잘만 자던데?”
짓궂은 그의 농담에 아영이 눈을 흘겼다.
잠귀가 밝은 그녀였다. 그런 제가 깨지 않았다는 게 아영은 믿기지 않았다.
“앉아.”
멍한 얼굴로 서 있는 그녀를 자리에 앉힌 태하는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어묵국을 그릇에 담아 그녀 앞에 놓았다.
어묵볶음을 할 생각이었지만 그가 끓여 놓은 어묵국을 보자 아영은 군침이 돌았다.
“먹어 봐. 간이 맞을지 모르겠다.”
조심스럽게 숟가락을 든 아영은 맛을 봤다.
청양고추를 넣어 매콤하고 따끈한 국물이 들어가자 저절로 눈썹이 위로 들렸다.
“괜찮아?”
그녀의 반응을 살피던 태하가 묻자 아영은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그제야 안심한 듯 그가 피식 웃었다.
“몰랐어. 네가 요리를 할 수 있을 줄은. 더구나 한식을.”
“처음엔 요리에 관심 없었어. 그런데 미국 생활 1년쯤 지나자 더는 질려서 못 먹겠더라고. 어느 날 집에서 한번 만들어 봤는데 생각보다 먹을 만하더라. 그때부터 가끔 만들어 먹었어.”
아영은 그의 얘길 들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부잣집 아들인 그가 직접 요리를 해 먹는 것도 그렇고, 요리 실력이 저보다 훨씬 좋다는 것도 그렇고. 사기 캐릭터가 따로 없었다.
꼬르륵.
그때 잠자던 배고픔이 되살아났는지 배 속이 요동쳤다.
“어서, 먹어.”
그 소리를 그도 들었는지 옅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아영은 창피함을 삼키며 숟가락을 움직였다.
불지 않아 탱탱한 어묵의 식감은 좋았고, 콩나물은 아삭했으며, 시금치는 씹을수록 고소했고, 계란찜은 부드러웠다. 저도 모르게 젓가락이 점점 빨라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식탁 위에 제 젓가락만 보인다는 걸 깨달은 아영이 고개를 들자 그가 젓가락을 든 채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안 먹고 뭐 해?”
“너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불러서.”
아영은 당혹스러웠다. 혹시 제가 허겁지겁 먹은 건가 싶어서.
누군가가 저를 위해 차려 준 밥상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사실 말은 안 했지만 아영은 속으로 울컥했다.
일에 바쁜 엄마 때문에 늘 혼자 해 먹는 것에 익숙한 그녀였다.
차려 준 밥상을 받은 기억보다 그녀가 엄마에게 차려 준 기억이 더 많았다. 그래 봤자 밥은 거의 손도 안 대고 술만 마시던 엄마였다.
그때는 그 모습이 꼴 보기 싫어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 번도 마주 앉아 엄마의 말동무나 하소연을 들어 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갑자기 떠오른 엄마 생각에 아영은 눈가가 시큰했다.
“그만 먹게?”
“다 먹었어.”
아영이 젓가락을 내려놓자 그가 미간을 좁혔다.
“나 때문에 그래?”
“아니야. 평소보다 많이 먹었어.”
그건 사실이었다. 원래 먹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은 처음으로 음식 맛을 음미하며 먹었다. 그만큼 입에 맞기도 했고, 저를 위해 차려 준 음식이라는 생각에 남기고 싶지 않았다. 결국은 남겼지만.
“앉아 있어. 설거지는 내가 할게.”
그가 빈 그릇을 들고 일어나려 하자 아영이 말했다. 그는 거절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아영은 빈 그릇을 싱크대로 옮긴 뒤 남은 반찬은 냉장고에 넣었다.
앞치마를 동여맨 아영은 설거지를 시작했다. 뒤에 앉아 있는 그가 신경 쓰였지만 아영은 설거지에 집중하려 했다.
“결혼하면 이런 기분일까?”
설거지를 마칠 무렵 그가 툭 내뱉었다.
“뭐?”
“이러고 있으니까 꼭 너랑 결혼한 기분이 들어서.”
아영이 고무장갑을 벗으며 돌아보자 식탁에 팔꿈치를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진한 적갈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쿵. 쿵.
그 순간 말도 안 되게 심장이 뛰었다.
농담일 게 뻔한 말에 동요한 자신의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아영은 다시 싱크대로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설거지하면서 튄 물을 행주로 닦는 척하며 가볍게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커피 마실 거야?”
“커피 말고 다른 건 안 돼?”
“마실 건 그것밖에 없어.”
그때 그가 일어났는지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영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럼 키스는?”
어느새 그녀 뒤로 다가온 그가 그녀를 가두듯 양손을 싱크대에 올린 뒤 얼굴을 한쪽으로 기울여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귓속을 파고들자 솜털이 오소소 일어섰다.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였다.
“짓궂은 장난 좀 그만 쳐.”
“이게 장난 같아?”
당황한 그녀가 그를 피해 얼굴을 반대쪽으로 기울이며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그가 자신의 몸을 밀착시키며 말했다.
마치 두 개의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두 사람의 몸이 빈틈없이 포개졌다.
“흡.”
아영은 제 엉덩이를 찌르듯 압박하는 존재가 무언지 깨닫고는 놀란 숨을 삼켰다.
그 순간 그가 그녀의 몸을 돌려 저를 바라보게 했다.
갑자기 방향이 바뀌자 놀란 아영이 두 눈을 빠르게 끔뻑거렸다. 그러자 태하가 싱크대와 그의 몸 사이에 단단히 가두고는 상체를 기울였다.
“잠든 네 입술에 키스하고 싶은 걸 꾹 참았어. 그러니까 보상해 줘.”
“보상?”
“네가 밥 먹을 때까지 얌전히 기다린 보상 말이야.”
그가 그녀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마치 주인의 칭찬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아영은 그의 뻔뻔함이 어이가 없었다.
오늘 새벽까지 그녀를 놓아주지 않던 그였다. 그것도 그녀가 도중에 기절하듯 잠들지 않았다면 아마 더 하고도 남았으리라.
그래 놓고 보상을 바라다니.
“난 기다리라고 한 적 없어.”
“그럼 다음부터는 기다리지 않고 덮쳐도 된다는 거네?”
“그게 아니라…… 암튼, 보상 같은 건 없어.”
아영은 말을 하면 할수록 그에게 말리는 듯한 기분이 들어 도중에 멈췄다.
“그럼 오늘도 여기서 자고 가는 수밖에.”
그녀에게 미련 없이 돌아선 그가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뭐, 뭐 하는 거야?”
“말했잖아. 자고 간다고.”
그가 양팔을 교차해 머리에 벤 채 말했다.
마치 자신의 집처럼 편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아영이 팔짱을 끼고 쳐다보았다.
“장난 그만하고, 일어나.”
“장난 아닌 거 다시 확인시켜 줘?”
“아냐. 됐어.”
그가 바지 벨트를 푸는 시늉을 하자 놀란 아영이 황급히 손을 뻗어 저지시켰다.
그녀의 만류에 그가 아쉽다는 듯 손을 뗐다.
“어떻게 할래?”
“…….”
“사실 난 키스보다 자고 가는 게 더 좋지만.”
그가 느물거리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의 말뜻을 알아차린 아영이 나직한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할게.”
“뭘?”
“키스한다고.”
“아쉽네.”
아영은 기어코 제 입에서 키스 소리를 하게 만든 그를 힘주어 노려보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은 그가 이내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러더니 자신이 앉은 침대 옆자리를 툭 쳤다.
“이리 와.”
두근. 두근.
괜히 심장이 제멋대로 뛰어 댔다. 덩달아 숨소리도 빨라졌다.
아영은 그에게 들키지 않도록 숨을 잘게 나눠 뱉으며 천천히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내가 무서워?”
“아니.”
그가 무서운 게 아니라 그와 할 키스가 무서웠다. 도중에 멈출 수 없을까 봐.
처음도 그랬고, 어젯밤도 그랬으니까. 분명 시작하면 멈출 수 없으리라.
“앗!”
그때 태하가 가만히 서 있는 그녀의 손목을 확 잡아당겼다. 균형을 잃은 그녀의 몸이 휘청하면서 그의 품으로 쓰러졌다.
태하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허리를 잡아 제 무릎 위에 앉혔다.
갑작스러운 자세에 당황한 아영이 그를 내려다보자 그가 씩 웃더니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끌어내려 입술을 포갰다.
그녀의 아랫입술을 머금은 그가 부드럽게 핥아 올렸다가 이내 지그시 비볐다.
두 입술이 마찰하면서 열기가 피어오르자 태하는 그 열기를 식히듯 혀로 그녀의 입술을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