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간 아영은 서둘러 싱크대 위에 가방을 내려놓은 뒤 냉장고에서 2리터짜리 생수병을 꺼냈다.
컵을 꺼내 한 잔 가득 따라서 몸을 돌린 아영은 바로 등 뒤에 서 있던 태하와 부딪히고 말았다.
“앗!”
컵에 있던 물이 크게 출렁이며 그의 옷을 적시고 말았다. 그가 입고 있던 네이비색 재킷과 바지가 점점 짙은 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떡해…….”
“이런.”
슈트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본 그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자, 잠깐만. 수건 가져올게.”
그제야 닦을 걸 가져오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아영은 황급히 욕실로 뛰어갔다.
잠시 후 수건을 챙겨서 나온 아영은 그의 젖은 슈트를 닦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젖은 범위가 넓었다.
“이리 줘. 내가 할게.”
“아니야. 내가 잘못한 거니까 내가 할게.”
그때 그가 슈트 위로 분주히 움직이던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됐다니까!”
갑자기 태하가 거칠게 나오자 수건으로 열심히 물기를 닦던 아영은 당황을 넘어 황당했다.
“왜 화를 내고 그래?”
“그러니까 그만하라고 했잖아.”
“그거야 미안해서…….”
“너 때문에 자꾸 다른 생각 들잖아.”
“뭐?”
아영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쳐다보자 태하가 낮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자신의 몸을 붙여 왔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야?”
“이래도 모르겠어?”
갑자기 훅 다가온 태하를 보고 놀란 그녀가 그의 가슴을 밀쳐 내려 했지만 오히려 그는 더욱 그녀의 몸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몸이 빈틈없이 맞닿은 순간, 자신의 배를 압박하는 뜨거운 열기가 전해지자 그녀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네 탓이야.”
“이게 왜 내 탓이라는 거야?”
아영이 어이없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네가 자꾸 수건으로 자극했잖아.”
“그거야…… 암튼 미안해.”
그 순간 그에게 했던 행동이 떠올라 말을 더 잇지 못했다.
난처해진 아영은 그를 똑바로 볼 수 없어 시선을 피하며 사과했다.
“미안하다고 끝날 일 아니야.”
“그럼 어쩌라는 거야?”
아영은 불안한 얼굴로 반문했다.
“책임져.”
“뭐?”
“보시다시피 이 상태로는 운전 못 해.”
“그래서?”
태하가 은근한 눈빛으로 아래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영은 생각 없이 그의 시선을 따라가려는 제 시선을 황급히 붙잡았다.
“네가 해결해 줘.”
“설마 나보고…….”
그가 맞다는 듯 긴 눈을 휘며 씩 웃어 보였다.
그걸 보고 화가 나야 정상인데 어이없게도 아영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 제 반응이 어이없고 화가 나 일부러 차갑게 쏘아붙였다.
“미쳤어.”
“어려울 것 없어.”
그 말과 동시에 태하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델 듯 홧홧한 열기가 느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당황한 그녀가 재빨리 손을 떼려 했지만 그의 힘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를 보자 태하는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휘감고는 그대로 입술을 집어삼켰다.
“흡.”
그녀의 보드라운 입술이 사정없이 그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납게 몰아붙이는 키스에 아영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태하는 그 틈을 노려 그녀를 벽에 밀어붙였다. 그러고는 자신의 바지 버클을 찾아 끌어 내렸다.
곧이어 그녀의 입에서 놀란 숨이 터져 나왔다.
결국, 그 책임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
“권태하, 일어나.”
아영의 목소리에 감겨 있던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서서히 올라갔다.
“굿모닝.”
환한 불빛 때문에 눈이 부신지 눈살을 찌푸리던 그는 저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씩 웃었다.
양쪽으로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 그의 매력적인 미소에 단단히 무장하고 있던 그녀의 심장이 순식간에 해제돼 버렸다.
아영은 빠르게 뛰는 심장을 무시하며 냉정한 얼굴로 가장했다.
“그만 일어나. 나 출근해야 해.”
그녀에게서 찬바람이 쌩쌩 불자 그의 눈썹이 한쪽으로 삐딱하게 올라갔다.
“뭐야, 어젯밤에는 그렇게 뜨겁더니 벌써 마법이 풀린 거야?”
그의 말에 그와 새벽까지 했던 일이 떠오르자 아영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황급히 몸을 돌렸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서 옷이나 입어.”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안 재우는 건데.”
그녀의 쌀쌀맞은 태도에도 그는 크게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그래도 섭섭은 했는지 나직하게 투덜거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곧 그가 옷을 갈아입는지 맨몸에 천 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소리가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가라앉으려던 얼굴에 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하자 아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나 먼저 나갈 테니까 넌 30분 있다가 나와.”
“버스 타기 귀찮잖아. 내가 데려다줄게.”
“됐어.”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그가 그녀를 돌려세웠다.
“오늘 너랑 사귀기로 한 첫날이야.”
“그래서?”
“오늘 하루도 안 돼?”
“약속했잖아. 조심하기로.”
단호한 그녀의 태도에 그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영은 못 들은 척 가방을 챙겨 현관으로 걸어갔다.
그녀 뒤로 그의 발소리가 따라붙었다.
“있다가 가.”
“잠깐만.”
신발을 신은 아영이 인사한 뒤 막 현관문을 열려는 순간 태하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 힘이 얼마나 센지 그녀의 몸이 휘청하며 돌려졌다.
놀란 그녀가 눈을 홉떴다.
“무슨 짓이야?”
“아무리 바빠도 모닝 키스는 하고 가야지.”
“뭐? 흡.”
태하는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고는 그대로 키스를 퍼부었다.
거칠게 밀어붙일 거라 생각했던 그의 키스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마치 달콤한 꿀이라도 발라져 있는 것처럼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핥았다가 빨았다가 다시 핥기를 반복했다.
두 사람이 만들어 낸 타액 소리가 조용한 현관에 울렸다.
“그, 그만!”
그녀의 입술에 만족하지 못한 그가 입술 사이로 파고 들어가려는 순간, 그녀가 그의 가슴을 밀쳐 냈다.
짧은 키스였는데도 그가 주는 열기를 익히 기억하고 있던 몸이 순식간에 달아오르자 당황한 아영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죽을죄라도 지은 것처럼 쳐다보네.”
“멋대로 무슨 짓이야?”
“연인 사이에 모닝 키스 한 것뿐인데?”
그가 느물거리는 얼굴로 말했다.
아직도 그녀는 그와 제가 사귀기로 한 게 실감이 나지 않는데, 그는 마치 오래전부터 두 사람이 사귀었던 것처럼 대하는 게 능숙하고 자연스러웠다.
“다음부터는 하지 마.”
아영이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손등으로 닦으며 말했다.
“할 거야.”
“권태하.”
“하기 싫으면 네가 알아서 피해.”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뻔뻔한 그의 뒷모습을 있는 힘껏 노려보던 아영은 이내 씩씩거리며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
“안녕하세요.”
그녀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진혁이 고개를 들었다.
항상 밝게 인사를 받아 주던 진혁의 표정은 서늘하기만 했다.
그녀가 인사를 하려는 순간 그가 시선을 돌렸다. 명백한 무시였다. 아마도 어제 주차장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 듯했다.
갑자기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기분이 나쁜 걸까?
결혼할 여자가 있으면서 태하와의 일 때문에 자신에게 쌀쌀맞게 대하는 진혁을 보자 아영은 어이가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혁이 다정하게 대해 주지 않는 게 오히려 마음 접기에는 수월할 테니.
이후로는 다행히 일이 바빠 진혁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휘몰아치는 오전 업무가 끝난 뒤 점심을 먹고 오는데 진혁과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쳤다. 둘 사이에 서먹한 기운이 감돌았다.
하필 주위에 아무도 없어 어색함이 더해지자 아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점심, 드셨어요?”
“어. 너는?”
“저도 먹고 오는 길이에요.”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아영은 초조하게 줄어드는 숫자를 바라보았다. 그때 진혁이 지나가듯 툭 던졌다.
“어제 그 사람과, 정말 사귀는 거 맞아?”
아영이 고개를 돌리자 진혁이 깊은 시선으로 마주 보았다. 마치 진실을 확인하려는 듯 집요했다.
“맞아요.”
“어떻게 만났는데?”
“고등학교 때 같은 반 친구였어요. 최근에 우연히 다시 만났고요.”
“친구에서 갑자기 연인이 됐다는 건, 전부터 둘 사이에 뭔가 있었다는 건데…….”
“태하가 제 첫 키스 상대였어요.”
“그랬군.”
인정하는 듯한 그녀의 대꾸에 진혁의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축하해.”
“이게 축하받을 일인지는 모르겠네요.”
태하와 진짜 사귀는 것도 아닌데 막상 진혁의 축하를 받으니 마음이 이상했다.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그녀가 올라탔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진혁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안 타세요?”
“먼저 올라가. 난 잠시 들를 데가 있어서.”
“네.”
서서히 좁혀지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진혁의 시선과 마주치자 아영은 옅게 웃어 보였다. 곧이어 문이 닫히고,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걷혔다.
***
퇴근해서 집에 오니 방 안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마치 자신의 흔적을 지워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너무 깨끗해서 아영은 잠시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말로는 공개 연애하고 싶다더니 사실은 숨기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하는 괜한 의심마저 들었다.
의심? 정말 의심이 맞을까?
그의 성격이 깔끔한지 아니면 남의 집이라서 깨끗하게 치우고 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별로일까? 그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배는 고팠지만 먹을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대로 침대에 누워 버린 아영은 눈을 감았다.
밤새 그에게 시달리느라 두 시간도 채 자지 못했던 터라 피로가 쌓여 눈이 따끔거렸다. 밥보다 잠이 필요했던 아영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장 봐 온 거 냉장고에 넣어야 하는데…….’
그 뒤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