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상황 설명할게.”
“운전하다 빡치면 곤란하니까 차 멈추면 해.”
차가 대로변에 접어들자 아영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운전대를 힘주어 잡고 있던 태하가 차갑게 내뱉었다.
화를 삭이려는 듯 억눌린 그의 목소리에 아영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차는 빠른 속도로 내달렸다. 어디로 가는지 궁금했지만 묻는다고 그가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아 포기했다.
한 시간 뒤 그의 차가 멈춘 곳은 한적한 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강이라곤 했지만 어두워 그게 강인지 호수인지 식별이 잘 되지 않았다. 드문드문 보이는 가로등은 있으나 마나 했다.
그가 안전벨트를 풀자 아영이 창밖을 살피며 물었다.
“여긴 어디야?”
“예전에 답답하면 가끔 오던 곳이야.”
그 말은 지금 그의 속이 답답하다는 뜻일 테다. 아영은 그 원인이 저인 것 같아 미안했다.
“내려.”
태하가 차에서 내리자 아영은 하는 수 없이 따라 내렸다.
늦은 밤도 아니었건만 도시에서 벗어난 밤은 짙고 어두웠다. 그나마 헤드라이트를 끄지 않아 서로의 얼굴은 묻히지 않았다.
팅.
차에서 내린 태하가 담배를 꺼내 물고는 지포 라이터를 올리자 적막한 밤에 울리는 금속 소리가 유난히 날카롭게 들렸다.
“두 사람 무슨 사이야?”
태하가 희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물었다.
“말했잖아. 우리 회사 팀장님이라고.”
“단지 그뿐이야?”
“그래.”
그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더니 이내 한층 짙어진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아영, 적어도 사람을 속이려거든 티는 안 나게 해야지.”
설마 눈치챈 걸까?
아영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허옇게 질려 가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태하가 거칠게 내뱉었다.
“그 새끼 뭐야?”
“그 사람, 너한테 욕먹을 사람 아니야.”
그녀가 방어하자 그의 눈빛이 냉랭해졌다.
“그럼 어떤 사람인데?”
“팀장님은 아무 잘못 없어. 그러니까 우리 얘기에 끌어들이지 마.”
“끌어들인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
반박할 말이 없어, 아영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솔직히 말해. 너 그 팀장이랑 바람피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럼, 사람 돌게 하지 말고 솔직히 말해!”
그가 거칠게 쏘아붙였다. 이미 모든 게 드러나 버린 상황에서 더는 숨겨 봐야 의미 없다고 판단한 아영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내가 그 사람을…… 꽤 오랫동안 좋아했어.”
“얼마나?”
“5년.”
“하!”
태하는 기가 막힌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이내 미간을 좁힌 채 되물었다.
“그 사람은 알아? 네가 좋아한 거?”
“아마도.”
“알면서 널 옆에 뒀다고? 나쁜 새끼네.”
아영이 그를 노려보자 태하는 모른 척 말을 돌렸다.
“그래서?”
“…….”
아영은 막상 결심했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아 길게 심호흡을 했다. 태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얼마 전에 그 사람이 약혼했다는 소리를 들었어.”
“그래서 홧김에 나랑 사귄다고 거짓말했다는 거야?”
“…….”
홧김은 아니었지만 차라리 그가 그렇게 생각하게 두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녀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듯 태하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네 복수에 날 마음대로 이용한 거야?”
“멋대로 끌어들여서 미안해. 너한테 피해 안 가도록 할게.”
그녀의 사과에 한참을 말없이 쳐다보던 그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더니 이내 툭 내뱉었다.
“상관없어.”
그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태하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진짜로 만들면 되니까.”
“뭐?”
“넌 그 남자에게 보여 줄 애인이 필요하고, 난 네가 필요하니까. 나와 진짜로 사귀면 아무 문제 없는 거잖아. 안 그래?”
“미안하지만 난 너와 사귈 생각 없어.”
그녀의 단호한 대꾸에 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럼, 네 거짓말이 들통나게 될 텐데 괜찮아?”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
그녀의 눈썹이 성마르게 올라갔다.
“맞아.”
그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 그의 뻔뻔함에 화가 난 아영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진짜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야? 나 아니어도 여자 많잖아.”
“맞아. 많아. 하지만 지금 내가 원하는 너야.”
그때 3일 전 태하가 했던 말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섹스 때문에 이래?”
그는 대답 대신 차게 웃었다. 그가 부정하지 않자 아영은 확신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 다른 남잘 좋아하는 여자한테 매달릴 만큼?”
그의 표정이 무섭게 일그러지더니 그녀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러더니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그녀와 시선을 깊게 맞추었다.
“중요해. 지금도 너만 보면 하고 싶어 미치겠거든.”
“미쳤어…….”
노골적이다 못해 낯 뜨거운 말에 면역이 없는 아영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아영, 하나만 물을게. 만약 그 새끼가 약혼녀 몰래 너한테 만나자고 하면 너 거절할 자신 있어?”
“…….”
절대 진혁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아영은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결심하고 또 결심했건만 마음 한편에 웅크리고 있는 미련의 싹은 여전히 그녀를 흔들고 있었다.
그제야 아영은 깨달았다. 마음은 아무리 결심해도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태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쓰게 웃었다. 그러고는 이내 자신만만한 얼굴로 덧붙였다.
“그러니까 나랑 만나. 내가 그 새끼 잊게 해 줄 테니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아영은 의문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왠지 그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그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내가 못 잊으면?”
“그땐 깨끗하게 헤어져 줄게.”
“그게 정말이야?”
“난 거짓말은 안 해. 정 못 믿겠으면 각서라도 써 주고.”
그의 확고한 태도에, 내내 망설이던 아영은 이내 결심했다.
“각서는 됐고. 약속은 지켜.”
“잘 생각했어.”
그녀가 수락하자 양쪽으로 말려 올라간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휘었다.
그 모습을 보자 왠지 그가 쳐 놓은 거미줄에 걸린 기분이 들었지만 아영은 무시했다. 그녀는 그만큼 진혁을 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아영이 정면을 주시한 채 입을 열었다.
“부탁이 있어.”
“뭔데?”
정면을 주시하던 그가 힐끗 그녀를 쳐다보았다.
“우리 사귀는 거 비밀로 했으면 해.”
“이유는?”
그의 미간이 못마땅하다는 듯 좁혀졌다.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거 원치 않아. 내 사생활이 없어지는 것도 싫고.”
“난 숨기고 싶지 않아.”
“뭐? 그럼 공개 연애라도 할 셈이야?”
“물론.”
“소속사에서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내가 속한 에이전시는 그런 거 터치 안 해. 터치한다 해도 따를 생각도 없지만.”
그가 자신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던 아영은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자 당혹스러웠다.
연예인들의 연애는 인기와 직결되는 민감한 문제였다. 특히나 한국에서는 더더욱.
그래서 대부분 유명 연예인들은 파파라치들을 통해서 들통이 나지 않는 한 결혼 직전이 아니면 연애 사실을 공개하는 걸 꺼렸다.
그런데 해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그가 공개 연애를 하게 되면 얼마나 시끄러울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리고 그의 인기에 얼마나 치명적일지도.
“공개 연애를 하는 순간, 한국에서 네 인기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질 거야.”
“상관없어.”
“상관없다고?”
“런웨이가 좋아서 모델 된 거야. 인기를 좇을 거였으면 배우나 가수가 됐겠지.”
그가 미련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영은 그를 막무가내라고 해야 할지 저돌적이라고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래도 난 공개 연애 하고 싶지 않아.”
“네가 원치 않으면 얼굴 공개 안 하면 돼.”
“파파라치들이 수시로 따라붙을 텐데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그럴 일 없겠지만, 만약 기사 나면 절대 네 얼굴 나가는 일 없도록 할 거야.”
“그래도 싫어.”
그녀가 끝까지 의견을 굽히지 않자 태하는 나직한 한숨을 쉬며 이내 덧붙였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싫다는 건 아직 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겠지. 알았어. 네 뜻에 따를게.”
그 뒤로 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태하가 집 앞에 차를 세우자 아영이 안전벨트를 풀며 말했다.
“집에 물 있어?”
“물?”
내릴 채비를 하던 아영은 갑작스러운 태하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부터 목말랐거든.”
“그럼 오면서 편의점에 들르지 그랬어?”
“내비게이션 신경 쓰느라 목마른지도 몰랐어.”
며칠 전 찾아왔을 땐 매니저가 운전해서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기다려. 가져다줄게.”
“뭐 하러 번거롭게 그래. 내가 가서 마시고 오면 되지.”
아영이 차에서 내리려 하자 태하가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러더니 그녀의 대답도 듣지 않고 먼저 차에서 내려 그녀의 집 쪽으로 성큼 걸어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영은 서둘러 차에서 내려 그 앞을 막아섰다.
“자, 잠깐만.”
양팔을 뻗은 채 앞을 막고 있는 모습을 태하가 빤히 쳐다보자 아영은 호흡을 정리한 뒤 말을 이었다.
“집 청소 안 해서 엄청 더러워. 그러니까 여기서 기다리…….”
“난 상관없어.”
“내가 상관있어.”
그녀가 목소리까지 높이며 강경하게 나오자 미간을 좁히던 태하가 한 걸음 다가섰다.
갑자기 그가 거리를 좁혀 오자 당황한 아영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등 뒤로 1층 현관문이 닿았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는 걸 확인한 태하가 그녀 앞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오자 아영은 숨을 삼켰다.
“뭐가 그렇게 두려운데?”
“뭐?”
“내가 덮칠까 봐 그래?”
“누, 누가 그렇대?”
속마음을 들킨 아영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밤이라서 다행이었다.
“아니면 문 열어. 목말라 죽겠으니까.”
태하가 숙였던 상체를 세우며 말했다.
아무것도 드러나 있지 않은 그의 표정을 보자 저 혼자 예민 떨었다는 생각에 민망해진 아영은 그의 시선을 피해 재빨리 등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