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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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여잔 잘 만났나 봐. 사장 딸하고 약혼했다는 소문 돌자마자 그렇게 깐깐하게 굴던 조 부장이 차 팀장님한테 살살거리는 거 보면.”

아영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현주가 나간 뒤 얼마 안 돼서 외부에서 바로 퇴근할 거라던 진혁이 돌아왔다.

“퇴근하신 거 아니셨어요?”

“맞아. 뭐 놓고 간 게 있어서.”

아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진혁은 그대로 그녀를 지나쳐 자신의 자리로 걸어갔다. 하지만 놓고 간 걸 챙겨서 바로 나갈 줄 알았던 진혁은 재킷을 벗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뭐지? 일할 게 더 남은 걸까?’

아영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묻지 않았다.

두 사람만 남은 사무실에 정적만이 감돌았다. 너무 조용해 아영은 침을 삼키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RRRRR. RRRRR. RRRRR.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을 확인하니 태하였다.

아영은 목소리를 죽이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도착했어.]

기어코 왔나 보다.

아직 마땅한 핑곗거리를 찾지 못한 아영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여보세요?]

그녀가 아무 말이 없자 그가 재차 불렀다.

“말해.”

[차 지하 3층에 주차했으니까 내려와.]

어쩌지.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한들, 별 뾰족한 수가 생각날 리 없었다.

“알았어.”

성격 급한 태하가 사무실로 쳐들어오기 전에 나가야 했다.

아영은 보고 있던 서류를 가방에 챙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일어나는 소리에 진혁이 고개를 들었다.

“가려고?”

“네. 먼저 가 보겠습니다.”

“기다려. 나도 가려던 참이야.”

그러더니 그녀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벗어 놓은 재킷을 걸치는데 셔츠 위로 그의 단단한 체형이 언뜻언뜻 드러났다.

자기 관리가 엄격한 그는 바쁜 와중에도 꾸준히 사이클을 탔다. 그래서인지 몸에 불필요한 살이 전혀 없었다.

“가자.”

멍하니 그의 모습을 쳐다보던 아영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앞장서 걸어가는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두 사람은 나란히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수요일이라서 다들 일찍 퇴근했는지 엘리베이터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진혁이 내림 버튼을 누르자 고층에 멈춰 있던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숫자가 내려오는 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눈 둘 곳이 마땅치 않았던 아영은 고개를 들어 내려오는 숫자만 멍하니 응시했다.

“약속 있어?”

“네.”

통화 소리가 들렸는지 그가 대뜸 물었다. 아영은 내심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대꾸했다.

“혹시 너한테 꽃 보낸 사람이 방금 전화한 사람이야?”

“네.”

“그 남자하고는 무슨 사이야? 보통 사이는 아닌 것 같던데.”

진혁이 그녀의 생각을 읽으려는 듯 깊게 쳐다보았다.

아영은 당혹스러웠다. 내내 그녀 책상에 있던 꽃을 보고도 못 본 척하던 그가 왜 이제 와서 관심을 두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 놓고 지금 와서 무슨 사이냐고 묻고 있었다. 마치 먹지도 않을 사탕을 빼앗길까 봐 조마조마하는 아이처럼 보였다.

설마 결혼하고 나서도 내가 저만을 바라봐 주길 바라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난 과연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을까?

아영은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그의 곁에 붙어 있고 싶은 제 마음을 확인한 순간 아영은 제가 얼마나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온몸의 피가 차게 식고 눈앞이 아찔했다.

그제야 아영은 그와의 인연을 여기서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킬 수 있을 때.

“사귀는 사이예요.”

“그게, 정말이야?”

진혁의 두 눈이 일순 커졌다가 이내 가늘어졌다. 그녀의 말을 못 믿는 눈치였다.

“왜요? 거짓말인 것 같아요?”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럴 거다. 그의 약혼녀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아영은 진혁을 주인처럼 따랐다.

그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강아지처럼 오매불망 그만 바라보았다.

그도 모르지 않았다. 알면서 그녀를 받아 주었고, 알면서 길들여 놓았다. 책임도 안 질 거면서.

“그런 낌새 전혀 못 느꼈거든.”

“그건 팀장님도 마찬가지셨죠.”

아영이 그의 약혼을 빗대어 말했다. 하지만 진혁은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언제부터야.”

“얼마 안 됐어요.”

한번 시작한 거짓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남자와 사귄다니. 너답지 않네.”

“선본 지 한 달도 안 된 여자랑 결혼하는 팀장님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녀의 날카로운 반박에 그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아영은 뒤늦게 말이 심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였다.

띵.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타.”

아영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진혁이 엘리베이터를 잡으며 말했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자 진혁이 뒤따라 타고는 로비 층을 눌렀다.

아영이 지하 3층 버튼을 누르자 진혁이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이내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후회할 선택,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럴 일 없습니다.”

그 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숫자는 빠르게 바뀌었다.

띵.

엘리베이터가 로비 층에 멈췄다.

“안녕히 가세요.”

문이 열리자 그녀가 인사했다. 하지만 진혁은 내리는 대신 닫힘 버튼을 눌렀다.

“안 내리세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 하자 아영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사이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지하 3층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뭘요?”

그녀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돌렸다.

“네가 어떤 남자와 만나는지.”

“팀장님이 그걸 왜 확인하는데요?”

“너랑 안 지 5년이야. 동생처럼 아끼던 후배가 처음으로 연애한다는데 제대로 된 남자와 사귀는지 알아야지.”

동생처럼 아끼던 후배…….

심장이 욱신거렸다. 움켜쥔 손바닥 안으로 손톱이 깊게 박혔다.

“정말 그게 다예요?”

바보처럼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결국 되묻고 말았다. 진혁의 찬찬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정말 날 동ㅅ…….”

띵.

그 순간 지하 3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륵 열렸다.

“이아영.”

서로를 쳐다보고 있던 진혁과 아영의 시선이 동시에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태하에게 향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눈치챘는지 태하의 눈빛이 굳어 있었다.

“권태하…….”

“뭐 해, 안 내리고.”

아영이 놀란 눈으로 멍하니 그의 이름을 부르자 태하가 재촉했다.

그제야 지하 3층에 도착했다는 걸 깨달은 아영이 황급히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진혁도 뒤따라 내리는 걸 본 태하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어떻게 된 건지 설명 좀 해 줄래?”

“아, 이분은 우리 회사 팀장님이셔.”

태하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묻자 아영이 서둘러 진혁을 소개했다.

평소 그녀답지 않게 허둥대는 모습에 태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나 이내 꾸며 낸 미소를 지으며 진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권태하라고 합니다.”

태하의 이름을 들은 진혁의 눈이 순간 커졌다가 이내 제자리로 돌아왔다.

“차진혁입니다.”

진혁이 맞잡은 손에 힘을 주자 태하도 지지 않고 힘을 주었다.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

“아영 씨가 만나는 사람이 모델 권태하 씨인 줄은 몰랐습니다.”

손을 뗀 진혁이 말했다.

아영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태하가 누군지 알아챈 모양이었다.

진혁을 자극하고자 지어낸 거짓말이었다. 태하를 염두에 두고 한 거짓말이 아니었기에 아영은 난처함에 휩싸였다.

“아영이가 그러던가요?”

태하가 아영을 힐끗 쳐다본 뒤 이내 진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닙니까?”

진혁의 말투에 의심이 서려 있었다.

그럴 거다. 지금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는 권태하와 그녀가 사귀는 사이라고 했으니 순순히 믿을 리 없었다.

어쩌지.

수 초간 침묵이 흘렀다. 태하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영은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그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입 안이 바짝 타들어 갔다.

“맞습니다. 아영이랑 사귀는 거.”

그 순간 태하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리를 휘감더니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말과 행동에 놀란 그녀의 몸이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그걸 눈치챈 태하가 긴장할 거 없다는 듯이 제 엄지로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쓸었다. 닿은 부위가 저릿해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아영이가 비밀로 하자고 했는데 팀장님께는 말했나 보군요.”

태하가 그녀를 향해 씩 웃으며 덧붙였다. 양쪽으로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매력적으로 휘어졌다.

“실례가 안 된다면 어떻게 만났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건 직장 상사로서 묻는 겁니까? 아니면 남자로서 묻는 겁니까?”

태하의 날카로운 질문에 내내 평정심을 유지하던 진혁의 눈빛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러자 뭔가를 캐치한 듯 태하의 눈빛이 일순 짙어졌다.

RRRRR. RRRRR. RRRRR.

때마침 진혁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팽팽한 긴장감이 툭 끊어졌다.

액정을 확인한 진혁의 입가가 굳어지더니 이내 몸을 돌려 전화를 받았다.

“네. 접니다.”

[진혁 씨 오고 있어요?]

핸드폰 밖으로 카랑카랑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 건 사람이 진혁의 약혼녀라는 걸 알아챈 아영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모습을 본 태하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진혁은 아직 약혼녀의 성량에 적응이 안 된 건지 뒤늦게 볼륨을 낮추고 통화를 이어 갔다.

“30분 정도 늦어질 것 같습니다.”

[빨리 오세요. 아빠 식사도 안 하시고 기다리고 있어요.]

“알겠습니다.”

서둘러 전화를 끊은 진혁이 몸을 돌리자 태하가 기다렸다는 듯이 비소를 날렸다.

“남의 연애에 관심 끄시고 팀장님 연애에 더 신경 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애인을 기다리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죠. 안 그렇습니까?”

마땅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진혁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저흰 일정이 있어서 그만 가 보겠습니다.”

진혁의 대답도 듣지 않고 아영을 자신의 차에 태운 태하는 곧바로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정승처럼 서 있는 진혁을 버려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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