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태하가 제시했던 3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눈을 붙인 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래서인지 눈 안에 모래알이 들어간 것처럼 거슬거슬했다.
아영은 손끝으로 눈동자에 닿지 않게 눈썹 바로 밑을 꾹꾹 눌렀다. 10초간 하고 나니 뿌옇던 시야가 조금은 밝아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여전히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답답하기만 했다.
‘그냥 이대로 도망가 버릴까?’
복귀 첫날에 이어 어제도 태하가 사무실로 꽃다발을 보냈다.
매일 아침 태하의 꽃다발을 받고, 또 아무렇지 않은 척 진혁을 대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집에 오면 녹초가 돼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데도 밤에 자려고 누우면 잠이 오지 않았다. 불면증은 점점 그녀의 이성을 갉아먹고 있었다.
아무도 저를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권태하와 차진혁이 없는 곳으로.
띠링.
때마침 울리는 문자 소리에 아영은 흠칫 놀랐다. 천천히 손을 뻗어 핸드폰 액정을 켰다.
예상했던 대로 태하였다.
「드디어 D─DAY네. 퇴근 시간에 맞춰 회사로 갈 테니까 기다려.」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회사로 오겠다는 그의 문자에 아영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쩌지.
뇌에 과부하가 걸린 듯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 주임님 또 왔어요!”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막내 연수가 쪼르륵 달려왔다.
아영이 무슨 소리냐고 묻기도 전에 연수가 그녀 책상 위에 있던 장미꽃다발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가가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 모습을 며칠 동안 지켜보던 김 과장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물었다.
“이 주임 진짜 연애하는 거 아니야?”
“아닙니다.”
“사귀는 것도 아닌데 매일 아침 꽃다발을 보낸다고?”
단호한 그녀의 대꾸에도 김 과장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사귀는 게 아니라면 사귀기 직전이겠죠. 남자들이 여자한테 이유 없이 돈을 쓰진 않잖습니까?”
“그렇지.”
옆에 있던 권 대리가 말을 보태자 김 과장이 맞장구쳤다. 두 사람의 장단에 아영은 한숨을 삼켰다.
“그냥 친구예요.”
“다들 그렇게 시작하는 거야. 처음엔 낯간지럽고 쑥스러운데 막상 사귀게 되니까 이성으로 보이더라니까. 그 장본인이 여기 있잖아.”
초등학교 동창생과 결혼한 김 과장이 본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암튼 이 주임 능력도 좋아. 몇십만 원짜리 꽃다발을 매일 보내는 남자도 있고. 그래서 회사 남자들이 대시해도 꿈쩍도 안 한 거야?”
권 대리가 비꼬듯 말했다.
그는 제게 대시했다가 차인 앙심이 아직 남았는지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 오곤 했다.
아영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하려는 순간 밖에서 차진혁 팀장 목소리가 들렸다.
통화 중이었는지 핸드폰을 귀에서 뗀 진혁이 사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와 직원들이 일어나서 인사하자 진혁은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자신의 자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권 대리.”
“네. 팀장님!”
진혁이 부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권 대리가 앞으로 다가갔다.
“어제 말했던 전년도 자료 찾아놨어?”
“아, 아직 못했습니다.”
“쓸데없이 남의 일 참견할 시간에 일이나 해.”
“네. 알겠습니다.”
좀 전의 의기양양하던 권 대리는 기가 팍 죽은 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혹시 들은 걸까?
아영은 조심스럽게 눈을 들어 진혁의 자리를 쳐다보았다. 그녀 책상에 올려 둔 장미꽃을 보고 있었는지 그와 눈이 마주쳤다.
당황한 아영이 시선을 피하기도 전에 진혁의 시선이 먼저 돌아섰다. 심장이 따끔거렸다.
신경 쓰지 말고 일이나 하자.
배달 온 꽃다발을 옆으로 옮긴 아영은 컴퓨터를 켰다.
하지만 태하가 보낸 꽃다발 때문인지 아니면 찬바람 쌩쌩 부는 진혁의 태도 때문인지 좀처럼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평소 안 하던 실수를 하는 바람에 점심까지 건너뛴 채 일에 매달려야 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3일 내내 신경 썼더니 가뜩이나 예민한 위가 아침부터 슬슬 아프기 시작했다. 아마 점심을 먹었더라면 백 프로 탈이 났을 거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아영의 책상에 샌드위치와 커피가 놓여 있었다. 그녀가 즐겨 가던 가게였다.
‘누구지?’
사무실에 아무도 없었기에 의아해하고 있을 때 진혁이 들어왔다. 손에 양치 도구가 들려 있는 걸 보니 양치를 하고 온 모양이었다.
설마.
“팀장님, 혹시 제 책상에 샌드위치와 커피, 팀장님께서 올려놓으신 건가요?”
“그래.”
그가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면서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아영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다음에는 안 그러셔도 됩니다.”
“부담 가질 필요 없어. 다른 직원이었어도 그랬을 거니까.”
자리에 앉은 진혁은 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 선수 치듯 말했다.
‘그거 알아요? 당신이 이럴 때마다 내 마음이 얼마나 흔들리는지?’
하지만 아영은 제 감정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그럴 자격조차 저에겐 없었으니까.
아영은 무심한 얼굴로 위장한 채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 꽃다발.”
진혁이 장미꽃을 힐끗 쳐다보았다.
“냄새가 좀 독하군.”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는 없고. 다음에는 받더라도 사무실에는 두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좀 냄새에 예민해서.”
“네. 알겠습니다.”
내내 장미꽃을 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이유가 향기 때문인 줄은 몰랐다. 진혁을 안 지 5년이나 되었지만 처음 안 사실이었다.
아영은 태하에게 받은 장미꽃다발을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로 들어간 아영은 커다란 휴지통 앞에 섰다. 들고 있던 꽃다발을 버리려는 순간, 청소부 아주머니가 들어왔다.
아영과 눈이 마주친 아주머니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렸다.
“혹시 그 꽃 버리려고요?”
“네.”
“아이고. 아깝게.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구먼.”
“필요 없어서요.”
“그럼, 나 줘요.”
“네?”
“나 꽃 좋아하거든.”
“그러세요.”
아영은 잠시 망설여졌지만 이내 아주머니께 꽃다발을 내밀었다.
“아유, 예뻐라. 고마워요.”
“제가 더 고맙죠. 그럼 수고하세요.”
꽃다발을 들고 싱글벙글한 아주머니를 두고 아영은 화장실을 나왔다. 빈손이 허전했다.
퇴근 시간이 되자 핸드폰 벨이 울릴 때마다 아영은 태하에게 온 전화일까 봐 움찔움찔 놀랐다.
그게 신경 쓰여 전화를 꺼 놓을까도 생각했지만 제집으로 쳐들어왔을 때처럼 사무실로 쳐들어올까 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때 퇴근 준비를 마친 현주가 그녀 자리로 다가왔다. 입사 동기인 현주와는 나름 친한 편이었지만 입이 가벼워 개인적인 이야기는 피했다.
“퇴근 안 해?”
“먼저 가. 난 좀 있다 가려고.”
“급한 거 아니면 내일 하지. 큰일 치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현주가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좀만 더하면 돼.”
“으이그. 고집은.”
현주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맞다. 너 그 얘기 들었어?”
아영이 무슨 얘기냐는 듯 빤히 쳐다보자 현주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차 팀장님, 드디어 결혼 날짜 잡으셨대.”
나오려던 숨이 턱 걸렸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잡을 줄은 몰랐다.
“약혼녀가 엄청 밀어붙였다나 봐.”
“그래?”
덤덤한 척 반문했지만 입술 끝이 떨리는 건 막지 못했다.
“저번에 보니까 성격 보통이 아니던데. 너한테 하는 짓 보고 헉했잖아. 아무리 사장 딸이라도 난 그런 여자랑은 1분도 같이 못 살겠던데.”
현주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나직하게 덧붙였다.
그날은 엄마가 죽기 일주일 전이었다.
회사로 진혁의 약혼녀이자 사장 딸이 찾아왔다.
아영은 그날 그 여자를 처음 봤다. 하지만 그 약혼녀는 아영을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퇴근하는 그녀 앞에 멈춰 섰다.
아영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짧은 숏커트에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여자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누구시죠?”
“당신이 이아영이야?”
“그런, 데요.”
촥!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얼굴이 반대편으로 홱 돌아갔다. 순간 암전이 된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내 정신을 차린 아영은 벌겋게 부어오르기 시작한 제 볼을 감싸며 여자를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에요?”
“나 차진혁 약혼녀야.”
팔짱을 낀 진혁의 약혼녀가 눈을 희번덕 뜨며 말했다.
아영은 순간 당황했지만 재빨리 표정을 지우며 차가운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래서요?”
“그. 래. 서. 요? 내가 왜 찾아왔는지 몰라서 물어?”
“네. 모릅니다.”
“이년, 아주 뻔뻔한 년이네. 감히 내 남자한테 꼬리 쳐 놓고 모르는 척하겠다 이거야?”
진혁의 약혼녀가 흥분해 소리쳤다. 그러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두 사람을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아영은 화가 났지만 회사 앞인 걸 인지하고 최대한 침착하게 대응하려 했다.
“사람 잘못 보셨어요. 전 그런 적 없습니다.”
“하! 이년 봐라. 내가 증거도 없이 여기 온 줄 알아?”
그러더니 핸드백을 열어 그 안에 있던 사진 뭉치를 그녀 얼굴에 던졌다. 얼굴에 맞은 사진들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아영은 여자의 몰상식한 행동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진혁의 약혼자라는 말에 함부로 입을 뗄 수가 없었다.
화를 참기 위해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아영은 이내 바닥에 떨어진 사진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래도 발뺌할래?”
사진은 차진혁과 그녀가 미국 출장 갔을 때 모습이 찍혀 있었다.
택시를 기다리는 모습, 식당에서 밥 먹는 모습, 거래처로 들어가는 모습 등 평범한 외근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사진이었지만 그 분위기는 사뭇 달라 보였다.
업무 출장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연인이 데이트하는 모습처럼 자연스럽고 유쾌해 보였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억지가 심하시네요.”
“억지라고? 반반한 얼굴로 남의 남자 꾀어서 등골 빼먹는 너 같은 년들 내가 한두 번 겪은 줄 알아? 좋은 말로 할 때 차진혁한테서 떨어져. 만약 또 한 번 옆에서 얼쩡거리는 모습 내 눈에 띄면 그땐 이 회사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매장해 버릴 거니까.”
그녀에게 살벌한 경고를 날리고 돌아선 여자는 도로변에 불법으로 세워 놓은 자신의 스포츠카를 몰고 사라졌다.
그러자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이 아영에게 향했다.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그녀를 경멸하는 시선들이.
아영은 쥐고 있던 손이 덜덜 떨렸다.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을 만든 자신을 향한 분노 때문이었다.
그때 그 모습을 퇴근하던 현주가 우연히 보게 된 것이다.
놀란 얼굴로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현주에게 아영은 저와 팀장 사이를 오해한 것 같다며 둘러댔다.
그녀와 진혁이 대학 때부터 친분이 있다는 걸 익히 알고 있던 현주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대하는 약혼녀를 향해 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