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82)

22

뭐? 나와 만나고 싶다고? 왜?

아영의 마음에 의문이 들었다.

‘뭐긴 뭐겠어? 방금 말했잖아. 너랑 한 잠자리가 좋았다고.’

그녀의 이성이 찬물을 뒤집어씌웠다.

그 뜻이라고?

‘설마 하룻밤 사이에 널 좋아하게 됐을까 봐? 순진하긴. 마음 없이도 가능한 게 남자야.’

그녀의 이성이 코웃음 쳤다.

그제야 그의 제안이 뭘 뜻하는지 알아챈 아영은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지금 대답하기 힘들면 천천히 생각해 보고 말해 줘도 돼.”

“아니. 지금 말할게.”

그녀에게서 대답이 늦어지자 그가 말했다. 더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아영이 덧붙였다.

“내 대답은 거절이야.”

그녀의 거절에 그의 길쭉한 눈매가 일그러졌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분명히 너도 좋았던 거로 아는데. 아니야?”

아영은 말문이 턱 막혔다. 처음 하는 관계였지만 아픔도 잊은 채 그가 선사하는 쾌락에 정신없이 빠져들었으니까.

그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가 닿았던 몸속 저 깊은 곳에서 습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아영은 들키지 않도록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맞아.”

그녀가 인정하자 그의 한쪽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하지만 너랑 더 얽히고 싶지 않아.”

그의 입가에 번지던 미소가 서서히 사라지더니 이내 차가워진 그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듯 움켜쥐었다.

“나랑 잔 그 순간부터 우린 이미 얽혔어.”

“너답지 않게 왜 이래?”

아영이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는 놔주지 않았다.

“나다운 게 뭔데?”

“여자한테 매달리는 스타일 아니잖아. 너.”

“나도 놀랐어. 가겠다는 여자를 붙잡은 적은 네가 처음이거든.”

뻔한 수작인 걸 알면서도 아영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가 왜 선수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런 말 하면 다른 여자들은 넘어갔을지 모르지만 난 아니야.”

“상관없어. 내가 넘어오게 만들 테니까.”

그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마치 그런 일은 식은 죽 먹기라는 듯이.

“권태하…….”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서로 원할 때 편하게 만나.”

원할 때? 편하게?

그의 뒷말이 목구멍에 탁 걸렸다.

“섹파라도 하자는 거야?”

“상관없어. 뭐라고 부르든.”

그녀의 말에 그의 눈빛이 일순 서늘해지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아영은 그가 부정하지 않자 입가에 씁쓸함이 맴돌았다. 장례식장에서의 진지한 모습을 보고 생겼던 호감이 사라졌다.

“깊은 관계가 싫으면 일단 가볍게 만나.”

그녀에게서 대답이 늦어지자 그가 어렵게 생각할 거 없다는 듯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넌 뭐가 그렇게 쉬워?”

“어렵게 생각하면 시작도 못 해. 난 후회하긴 싫거든.”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아마 거절을 당해 본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이런 그에게 지금 거절해 봤자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게 뻔했다. 어쩌면 제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더 집착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아영은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면서 시간을 벌기로 했다. 어차피 두세 달 뒤면 떠날 그였으니까.

“생각할 시간을 줘.”

시간을 달라는 그녀의 말에 그가 미간을 좁혔다.

“얼마나.”

“일주일.”

“길어. 3일로 해.”

그가 단칼에 거절했다.

“뭐? 그건 너무 짧아.”

원래 그녀는 2주일로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허락할 것 같지 않아 일단 일주일로 말한 뒤 점차 늘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3일이라니. 아영은 기가 막혔다.

“그게 내가 참을 수 있는 최대야.”

단호한 그의 표정이 더는 타협할 여지가 없음을 말해 주었다.

***

장례를 치른 뒤 첫 출근이었지만 그동안 밀린 업무 때문에 야근하고 있던 아영은 피곤한 목을 꾹꾹 주물렀다.

RRRRR. RRRRR. RRRRR.

때마침 울리는 벨소리에 액정을 들여다본 아영은 진혁의 이름이 뜨자 손을 멈칫했다.

아침에 태하가 보낸 꽃다발 때문에 정신이 없어 진혁이 출장 간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태하는 그녀가 출근하는 시간에 맞춰 장미꽃다발을 보냈다.

처음에는 잘못 배달 온 거라 생각했다. 그 흔한 입학식이나 졸업식에서도 꽃다발을 받아 본 적 없었으니까.

하지만 꽃다발과 같이 온 카드에는 정확히 그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좋은 하루 보내라는 메모와 그의 이니셜도 함께.

아영은 태하의 생각을 떨쳐 내듯 고개를 흔든 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출근 잘 했어?]

“네.”

[그때보다 목소리가 괜찮아서 다행이다.]

아영은 무거워지는 통화가 싫어 말을 돌렸다.

“부산 출장 가신 건, 잘 해결되셨어요?”

[공장에서 폐수 처리 설비가 고장 난 것도 모르고 방류했다가 인근 마을에서 무단 방류로 신고하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 진정시키느라 고생 좀 했지.]

“힘드셨겠네요.”

[우리가 잘못한 거니까 납작 엎드리는 수밖에. 그건 그렇고 지금 어디야?]

“회사예요.”

[아직 퇴근 안 했어?]

“네. 일이 좀 남아서요.”

[그럼, 일 끝나고 잠깐 볼 수 있어?]

“지금 부산 아니에요?”

갑자기 보자는 말에 아영이 놀라 물었다.

[서울 톨게이트 지나는 중이야. 아마 한 시간 후면 회사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급한 얘기면 그냥 전화로…….”

[전화로 할 얘기 아니라서 그래.]

다른 때 같으면 알았다고 물러섰을 진혁이었지만 오늘따라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더는 안 된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럼, 회사 근처 카페에서 봐요.”

전화를 끊고 나니 순간 잘하는 짓인가 싶었다.

그에 대한 마음을 접기로 해 놓고 이렇게 따로 만나는 건 자신을 더 힘들게 할 뿐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마지막으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한 시간 뒤 그녀가 카페에 도착하고 10분 뒤 진혁이 도착했다.

“빨리 오셨네요?”

“다행히 차가 안 막혔어.”

“커피는 제가 미리 주문했어요.”

진혁이 맞은편에 앉자 아영이 말했다.

“잘했다.”

5년을 알고 지냈기에 그의 커피 취향은 빠삭했다.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화장을 안 해서 그런가 봐요.”

진혁은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의 안색부터 살폈다.

아영은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제 맨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급한 마음에 대충 세수만 하고 나왔던 터라 저를 향한 진혁의 시선이 거북했다.

“잠은 좀 잤어?”

“네.”

“어머님은 잘 보내…….”

“덕분에 잘 보내드렸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진혁은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아영은 모르는 척 말을 잘랐다.

진혁과 마주 앉아 있는 이 순간이 아영은 버거웠다. 그래서 그에게 재촉했다.

“할 얘기가 뭐예요?”

“…….”

그답지 않게 쉬 말을 꺼내지 못했다. 몇 번의 머뭇거림 뒤에야 진혁이 툭 내뱉었다.

“미안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속에 억눌려 있던 마음이 울컥 차올랐다.

“뭐가요?”

“약혼 얘기, 미리 말 못 해서.”

“선배가 왜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목소리에 날이 섰다.

진혁이 가만히 저를 응시하자 자신이 흥분했다는 걸 깨달은 아영은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솔직히 서운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 감정이고. 아무 사이도 아니었는데 선배가 굳이 저한테 약혼한 걸 말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아버지가 위독하셔. 의사 말로는 길어야 6개월밖에 못 사신다더군.”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아영의 두 눈이 놀라 커졌다.

그동안 진혁 아버님의 심장이 안 좋으신 건 알고 있었지만 상태가 그렇게 나빠진 줄은 몰랐다.

진혁은 덤덤하게 말하려고 애쓰는 듯했지만 애써 참고 있다는 게 역력히 보였다.

“언제 그렇게…….”

“쓰러지신 지 두 달 됐어.”

그제야 그의 얼굴이 간간이 어두웠던 이유가 그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전혀 몰랐다. 최근 그가 맡은 프로젝트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뿐.

“그런데 아버지는 가망 없다는 의사 말에 죽기 전에 내가 결혼하는 모습이 보고 싶다더군. 차마 싫다고 거절할 수 없었어.”

“…….”

“일주일 뒤에 바로 선이 잡혔어. 나가 보니 맞선 상대가 사장님 딸이더군. 몰랐어. 아버지하고 우리 회사 사장님과 친분이 있는 줄은. 거기서도 결혼이 급했는지 바로 날짜를 잡자고 하더라. 다행이다 싶었어. 어차피 해야 할 결혼이라면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건강하실 때 하는 게 나았으니까.”

“후회하지, 않으시겠어요?”

“이대로 아버지를 보내도 후회하긴 마찬가지야. 어차피 후회할 거라면 아버지라도 마음 편하게 보내드리고 싶어.”

진혁이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달리 방법이 없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래서 아영은 가슴이 아렸다.

“그분…… 마음에 드셨어요?”

다른 무엇보다 이 부분이 제일 궁금했던 아영은 숨죽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시선을 내리뜬 채 테이블에 놓인 커피잔을 매만지던 진혁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RRRRR. RRRRR. RRRRR.

그 순간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액정 화면을 응시하던 그의 눈가가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녀에게 양해를 구한 진혁이 고개를 비스듬히 돌린 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진혁 씨 어디예요?]

통화 음량이 큰 건지 아니면 전화 건 여자의 목소리가 큰 건지 아영의 귀에까지 소리가 들렸다. 더구나 여자는 술에 취한 건지 발음이 어눌하게 들렸다.

생각보다 큰 소리에 진혁은 황급히 볼륨을 낮췄다.

“밖입니다……. 아니, 괜찮습니다. ……지금 거기로 가죠.”

전화를 끊은 진혁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미안하지만 그만 일어나야 할 것 같다.”

아영은 그가 지금 누구에게 가는지 알 것 같았지만 굳이 묻고 싶지 않았다.

다만, 이제 정말 진혁을 제 마음에서 내보내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가슴이 바늘로 찌른 듯 따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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