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집이 널 닮았네.”
뜻 모를 소리에 고개를 돌린 아영은 컴퓨터 책상 앞에 있는 의자가 아닌 제 침대에 앉아 있는 태하를 발견하고 어이가 없었다.
그는 마치 제 침대인 것처럼 양팔을 뒤로 뻗은 채 편하게 앉아 있었다.
190센티에 육박하는 그가 앉아 있으니 그녀의 싱글 침대가 어린이용처럼 작아 보였다.
“무슨 뜻이야?”
되묻는 말투에 날이 섰다. 제대로 된 살림살이 하나 없는 제 방이 그에게 좋게 보일 리 없었으니까.
인터넷에서 구매한 싸구려 싱글 침대와 몇 번 쓰지도 않았는데 경첩이 빠져 버린 두 짝짜리 장 그리고 제가 이사 오기 전 살았던 방 주인이 버려 달라며 놓고 간 검은색 철제 책상과 교체한 지 오래된 낡은 월넛 색상의 싱크대까지. 색깔도 디자인도 다 제각각이었다.
“아담한 게 꼭 너 같아서.”
아담하다고?
키가 168센티인 그녀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칭찬인지 비꼬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아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칭찬이야.”
그가 오해하지 말라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양쪽으로 올라간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자 갑자기 맥박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삐─.
때마침 울리는 주전자 소리에 퍼뜩 정신이 돌아온 아영은 황급히 고개를 돌린 뒤 가스를 껐다.
컵에 뜨거운 물을 부은 다음 티스푼으로 천천히 커피를 저었다. 열이 오른 얼굴이 식을 때까지.
어느 정도 열이 가라앉은 걸 느낀 아영은 양손에 머그잔을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커피를 내밀자 그가 몸을 바로 세웠다.
아영은 그와 최대한 먼 곳에 앉았다. 그래봤자 그의 긴 다리로 두세 걸음이면 닿을 거리였다.
조용한 방 안에 빗소리만 가득했다.
아영은 태하가 언제쯤 얘길 꺼낼지 기다렸다. 그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커피를 홀짝이며 책상에 꽂힌 책들을 살펴보았다.
커피를 절반이나 비울 때까지도 그가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자 답답한 마음에 아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말해. 어떻게 된 건지.”
“뭐가.”
그는 알면서도 되물었다. 아영은 짜증이 나려는 걸 꾹 참고 다시 말했다.
“미국 왜 안 갔냐고.”
태하는 그제야 손에 든 커피를 옆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그녀의 얼굴에서 뭔가를 찾으려는 듯 집요하게.
“그건 네가 잘 알 텐데.”
“알아듣게 말해.”
“전화는 왜 꺼 놨어?”
“몰랐어. 전원이 꺼져 있을 줄은.”
차가운 그의 눈동자가 그녀의 시선을 꿰뚫듯 쳐다보았다.
“내 전화 피하려고 일부러 전원을 끈 게 아니라?”
“믿든 안 믿든 그건 네 자유야.”
말투는 묻고 있었지만 표정은 확신에 차 있었다. 눈치 빠른 그의 말에 당황한 아영은 커피를 마시는 척하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다시는 나 안 볼 생각이었어?”
그의 정확한 지적에 커피를 머금은 그녀의 입술 끝이 떨렸다.
“묻잖아. 나 안 볼 생각이었냐고.”
그녀가 동요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그가 다그치듯 물었다.
이미 제 생각을 간파당한 마당에 더는 거짓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아영은 솔직해지기로 했다.
“그래.”
그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아영은 무시하고 덧붙였다.
“어차피 너 미국 돌아가면 다시 보기 힘든 거 사실이잖아.”
“아, 그래서 미리 연락을 차단했다? 어차피 또 볼 일 없으니까?”
그녀의 말에 그가 피식, 기가 찬 웃음을 터트렸다.
아영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그의 눈빛이 서늘하게 굳어지더니 단 두 걸음 만에 그녀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그의 큰 키 때문에 그녀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이거 놔.”
아영이 그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턱에 힘을 주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되레 짙게 깔린 눈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내가 안 돌아가겠다면.”
“뭐?”
그녀의 두 눈이 놀라 커졌다.
“내가 한국에 남겠다고 하면, 너 어떻게 할래?”
아영은 터무니없는 말에 헛웃음이 났다. 해외에서 한창 주목받고 있는 지금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겠다고? 그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말이 되는 소릴 해.”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내가 판단해. 그러니까 대답이나 해.”
그가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제야 아영은 심장이 덜컹거렸다. 왠지 그냥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아서. 꼭 진심처럼 들려서.
그래서 뭐? 권태하가 너랑 사귀기라도 할 것 같아? 정신 차려, 이아영. 권태하는 단지 네 반응이 궁금해서 떠보려는 것뿐이야.
그래. 그렇겠지.
자기 전엔 아무런 말도 없다가 이제 와서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아마 말도 없이 먼저 가 버린 제가 괘씸해서 이러는 걸 테다. 그러니 휩쓸려서는 안 돼.
“달라질 건 없어.”
“달라질 게 없다고?”
덤덤한 그녀의 대꾸에 그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래.”
“밤새 나와 침대에서 뒹굴어 놓고?”
“하룻밤의 일탈일 뿐이었어. 너도 몰랐던 거 아니잖아. 그러니까 잊어. 나도 잊을 테니까.”
무표정한 얼굴로 침착하게 대꾸하는 그녀의 모습이 그를 더 열받게 했는지 그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그러더니 그녀의 턱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못 잊겠다면.”
“그 정도로 좋았다니 기분 나쁘지 않네. 하지만 그 이상은 바라지 마.”
“미안하지만 그건 힘들 것 같은데?”
“권태하.”
그의 눈빛에 떠오른 집착을 본 아영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니까 내가 경고했잖아. 나와 자고 나면 더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그래서 조용히 사라져 줬잖아.”
태하가 낮게 으르렁거리자 아영이 차게 말했다.
“누가 마음대로 사라지래.”
“내가 말도 없이 가서 자존심 상해서 이러는 거야?”
비꼬는 듯한 그녀의 말에 그의 눈빛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네 말대로 나 혼자 침대에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자존심 상했어. 씹다 버린 껌 같은 기분이었거든. 그래도 남겨진 메모를 보고 급한 일이 있었겠지 하고 이해하려 했어. 그런데 씻고 나와서 너한테 전화를 걸었을 때 핸드폰 전원이 꺼져 있다는 소릴 듣는 순간 피가 차게 식더라고.”
“…….”
“말해 봐. 정말 날 피해 도망간 거야?”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가 대답을 종용했다.
RRRRR. RRRRR. RRRRR.
그 순간 그의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던 태하는 방해를 받자 짜증이 났는지 미간을 와락 구기더니 그녀의 턱을 놔주었다. 그러고는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했다.
액정에 찍힌 국제 전화 번호를 본 순간 그의 표정에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몸을 돌려 전화를 받았다.
“대표님…….”
[권태하, 너 뭐야? 비행기 안 탄 거 사실이야?]
그가 인사도 하기 전에 전화 밖으로 벼락같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뒤에 있던 그녀가 움찔 놀랄 정도였다.
“네. 그렇게 됐습니다.”
그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아니면 예상했는지 별다른 반응을 보지 않았다. 되레 차분하게 응수했다.
[그. 렇. 게. 됐. 습. 니. 다? 사람 놀라게 해 놓고 태평하게 그런 소리가 나와! 너 때문에 내 수명이 1년이나 단축됐어. 알아?]
“죄송합니다.”
[하, 마음에도 없는 사과는 됐고. 정말 ‘도전 슈퍼모델’ 심사위원 할 거야?]
기다렸다는 듯이 넙죽 사과하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대표가 콧방귀를 꼈다.
“해 보려고요.”
[잡아 놓은 화보 촬영하고 광고는 어떻게 하고?]
“일주일 내내 촬영하는 게 아니니 일정에 차질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 못 지키게 되면 위약금은 제가 물겠습니다.”
[그렇게 네 멋대로 할 거면 네가 대표 해!]
반박할 여지 없는 그의 말에 짜증이 났는지 대표가 신경질을 부렸다.
“그건 계약 기간 끝나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야, 권태하!]
“농담입니다.”
웃음기 없는 태하의 말에 대표는 혈압이 오르는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더니 조금 진정시킨 뒤 이내 진지하게 물었다.
[처음에 제의했을 때 그런 거 절대 안 한다며 싫다고 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무리해서까지 하려는 이유가 뭐야?]
그때 뒤에 있던 그녀를 힐끗 쳐다보던 그가 이내 나직하게 내뱉었다.
“제 인생에 전환점이 필요한 것 같아서요.”
[전환점? 무슨 전환점?]
“지금 밖이라서 자세한 얘기는 따로 전화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안 자고 기다릴 테니 오늘 꼭 전화해.]
대표는 그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정말 한국에 있기로 한 거야?”
“들은 대로.”
대표의 쩌렁쩌렁한 목소리 때문에 상황을 전부 들은 아영이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영은 어안이 벙벙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한국에 머물기로 했다니. 그녀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
“그 얘길 왜 이제야 하는 거야?”
“미리 말하면 뭐가 달라져?”
그걸 말이라고.
“그럼, 너한테 자자고 하지 않았을 거야.”
“그래서 후회돼?”
그의 새카만 눈동자가 허공을 갈랐다.
후회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가 만약 한국에 머물 거라는 걸 알았다면 절대 자자고 하진 않았을 거다.
그래서 후회한다고도, 후회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자 후회한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어졌다.
“난 후회 안 해.”
후회 안 한다고?
그녀의 커다란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넌 어땠는지 모르지만 난 좋았거든. 내내 생각날 정도로.”
필터를 거치지 않은 솔직한 그의 말에 아영은 낯이 뜨거웠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난 하룻밤으로 끝내고 싶지 않아.”
“뭐?”
“너와 계속 만나고 싶어.”
그의 강렬한 눈빛이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