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아영이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지금쯤 일어났을까?
나오기 전에 곤히 잠들어 있던 걸 보았으니 아직 안 일어났을 확률이 높았다.
나중에 일어나서 제가 없는 걸 알면 그는 뭐라고 할까? 화를 낼까? 아니면 서운해할까?
이왕이면 후자였으면 좋겠다.
그런 제 마음이 우스워 아영은 또 피식 웃음이 났다.
그가 서운해한들 무슨 소용이라고. 어차피 다시 볼 일도 없는데 말이다.
이아영, 유치해지지 말자. 또 남자한테 데고 싶지 않으면.
권태하는 지나가는 바람일 뿐이야. 그냥 지나가게 둬.
그렇게 결심하고는 제 마음이 흔들리기 전에 핸드폰 전원을 껐다.
핸드폰을 뒤집어 협탁 위에 올려놓은 아영이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탈의하고 거울 앞에 선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목, 가슴, 배 할 거 없이 태하가 남긴 키스 자국이 수도 없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태하는 어젯밤 집요하리만치 그녀에게 집착했다.
시간이 가는 게 아깝다며 1분 1초도 그녀를 제 품에서 놔주지 않으려 했다. 하물며 샤워할 때도 따라 들어와 그녀를 안았다.
욕실에서의 모습이 떠오르자 그녀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미쳤어, 이아영. 그만 떠올려.’
아영은 그의 생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자신을 벌주듯 샤워기 레버를 올렸다.
차가운 물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얼마나 차가운지 뇌까지 얼어 버린 느낌이었다. 아영은 이를 악물고 샤워를 했다.
샤워를 끝내고 나왔을 때 그녀는 그의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온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추워 서둘러 몸에 물기를 닦아 낸 다음 침대에 깔아 놓은 전기 장판 온도를 최대한 올려 그 속으로 파고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서서히 올라오자 몸의 떨림도 차츰 줄어들었다.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점점 깜빡거리는 속도가 느려지더니 이내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투둑. 투둑.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깼다. 잠이 덜 깬 눈으로 방 안을 보니 사위가 어둑어둑했다.
대체 얼마나 잔 거지? 분명 잠들기 전엔 낮이었는데…….
전기 장판을 켜고 자서 그런지 오랜만에 푹 잔 것 같았다.
시간이 궁금했던 아영은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 화면을 터치하는데 먹통인 채로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 맞다. 전원 꺼 놨었지.’
그제야 자기 전 일부러 핸드폰 전원을 꺼 놓은 게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권태하는 잘 갔으려나. 3시 비행기라고 했으니 아마 지금쯤 비행기 안이겠지.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핸드폰으로 향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돌려 버렸다.
태하의 연락이 궁금하긴 했지만 내내 피해 왔던 진혁의 흔적을 보고 아무렇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또 흔들려 진혁에게 전화라도 건다면 그땐, 회사를 그만둬야 할지도 몰랐다.
어떻게 들어온 회사인데. 절대 그만둘 수 없었다.
아영은 태하에게 미안했지만 전원을 켜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미국으로 돌아가면 다시 볼 일도 없거니와 그도 제 존재 따윈 바로 잊어버릴 테니까.
물이나 마시고 정신 차리자.
“으윽.”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아영은 신음을 흘렸다. 온몸이 녹슨 깡통 로봇처럼 삐걱거리는 것 같았다.
아마 밤새 한 번도 써 보지 못한 근육을 무리하게 써서 그런 것 같았다.
아영은 움직일 때마다 새어 나오는 신음을 꾹 참으며 부엌으로 걸어갔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갈증을 해소했다.
“하아.”
차가운 물이 들어가자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꼬르륵.
정신이 드는 건 그녀의 뇌만은 아니었는지 위에서 배고프다는 신호를 보냈다.
생각해 보니 오늘 하루 내내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게 떠올랐다.
다시 냉장고를 연 아영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먹을 만한 게 김치 빼고 아무것도 없었다. 달걀이라도 있었으면 간단하게 계란 프라이로 때웠을 텐데 아쉬웠다.
하는 수 없이 상비로 준비해 둔 라면을 찾았지만 그마저도 언제 먹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쉴 사이 없이 꼬르륵거리는 위 때문에 뭐라도 먹긴 먹어야 했다.
편의점이라도 가야 하나?
하지만 비가 와서 나가기 싫었다. 간편하게 앱으로 주문할 생각으로 핸드폰을 찾던 아영은 이내 그만두었다.
핸드폰 전원을 켜고 싶지 않아서였다.
진혁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와 있다면 바보처럼 희망을 걸 자신이 싫었고, 안 오면 안 온 대로 실망할 자신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영은 도망치듯 지갑과 우산을 챙겨 집을 나왔다.
비가 와서 그런지 바람이 찼다. 카디건 입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편의점으로 걸어가는데 갑자기 앞에 주차된 차에서 헤드라이트가 강하게 비췄다.
‘뭐야. 매너 없게.’
아영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쓰고 있던 우산을 내려 빛을 가렸다.
탁.
차에서 누군가 내렸다. 헤드라이트 불빛을 등지고 있어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상당히 키가 큰 남자였다. 마치 누구처럼.
쿵. 쿵.
심장이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그때 차에서 내린 남자가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왔다.
저벅. 저벅.
빗소리에 묻힐 만도 한데 남자의 구두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유독 긴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마주 오는 남자를 피해 옆으로 비켰다. 그러나 옆으로 지나쳐 갈 거라고 생각했던 남자가 그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우산을 반쯤 내리고 가던 아영의 시선이 제 발 앞에 멈춰 선 남자의 구두에 쏠렸다. 낯선 구두였다.
‘누구지?’
그 순간 들고 있던 우산이 위로 들렸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눈과 입이 놀라 벌어졌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네.”
그녀의 넋이 나간 얼굴을 본 태하가 쓰게 웃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오늘 오후 3시 비행기라고 하지 않았어?”
“맞아.”
그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그런데 왜 여기 있어?”
“공항에 안 갔으니까.”
당연하면서도 당연하지 않은 얘길 했다.
“그러니까 왜?”
그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아영이 답답하듯 되물었다.
“나도 궁금해. 내가 왜 공항이 아닌 여기로 왔는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여기서 계속 얘기하긴 곤란할 것 같은데. 일단 어디 들어가서 얘기하자.”
그녀 뒤에서 한 무리의 사람이 걸어오는 걸 본 그가 말했다.
그의 시선을 좇던 아영의 표정이 난감해졌다. 단체로 어딜 다녀오는지 대여섯 명의 여자가 깔깔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어디로 갈래?”
아영은 그와 단둘이 있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점점 가까워지는 사람들 소리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네 차로 가.”
“매니저 있어서 안 돼.”
마치 그의 말을 증명하듯 그들을 비추고 있던 헤드라이트 불빛이 때마침 꺼졌다. 난처해진 그녀가 말을 이었다.
“카페까지 가려면 한참 내려가야…….”
“사람 많은 곳은 안 돼.”
맞다. 그가 유명인이라는 걸 자꾸 까먹는다.
잠시 고민하던 아영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럼, 조금만 걸어가면 공원이 있어. 거기서 얘기해.”
“지금 비 오는데?”
“그럼 갈 만한 데가 없어.”
“가까운 데 놔두고 뭘 고민해?”
“우리 집은 안 돼.”
그가 눈짓으로 그녀의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황한 아영은 곧바로 거절했다.
“왜, 남자라도 숨겨 놨어?”
그의 말도 안 되는 억측에 아영이 어이없다는 듯 노려보았다.
“아니면 안 될 이유가 없잖아. 지금 상황에선 그게 최선일 것 같은데.”
저에겐 태어나 처음으로 갖게 된 소중한 집이었지만 하루에 수백만 원짜리 스위트룸에서 지내는 그에겐 하찮게 보일 터였다.
그래서 그에겐 절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때 그녀 뒤에 오던 일행이 어느새 근처까지 왔는지 말소리가 가까워졌다.
연령대가 젊은지 오가는 대화에 모르는 단어가 많았다.
그렇다는 건 젊은 층에 인기가 많은 권태하를 그들이 알아볼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들킬지도 몰랐다.
그에게 다시 공원으로 가자는 말을 하려던 순간, 뒤에서 오던 일행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야, 저 차 머스탱 아니야?”
“머스탱?”
“대니얼 권이 타던 그 차 말이야.”
갑자기 그의 이름이 등장하자 아영은 흠칫 놀랐다. 그도 들었는지 턱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헐. 어디! 어디?”
“저기 가로등 밑에 주차된 차. 보이지?”
“대박! 진짜 기사에 난 차 색깔이랑 똑같네? 설마, 이 동네에 대니얼 온 거 아니야?”
여자 중 하나가 꿈에 부푼 표정으로 말했다.
“에이. 설마. 대니얼이 이런 산동네에 왜 있겠어?”
“촬영하러 왔을 수도 있잖아.”
“그러네! 야, 우리 배도 부른데 산책 겸 공원 쪽으로 가 볼까? 가끔 거기서 드라마 촬영도 하니까 운 좋으면 볼 수도 있잖아.”
숨죽이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영은 공원까지 물 건너가자 이내 체념한 얼굴로 나직하게 내뱉었다.
“따라와.”
그대로 몸을 돌린 아영은 자신이 사는 빌라 출입구로 들어갔다.
삑. 삑. 삑. 삑. 삑. 삑.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태하가 뒤에 서 있어서 그런지 이상하게 손끝이 떨렸다.
아영은 도둑 들까 봐 비밀번호를 길게 설정해 놓은 걸 처음으로 후회했다.
띠리릭. 다행히 실수 없이 문이 열렸다. 그러자 겨우 신발 두 켤레만 놓을 수 있는 좁은 현관이 드러났다.
아영이 먼저 신발을 벗고 들어가자 곧이어 그가 뒤따라 들어왔다.
현관문이 닫히고, 이내 두 사람은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니 아영은 좁은 방 안이 더 좁게 느껴졌다.
어서 할 말만 하고 그를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한 아영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바로 뒤에 그가 서 있는 걸 보고 흠칫 놀랐다. 하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했다.
“말해. 어떻게 된 건지.”
“너무하네.”
“뭐가.”
“어쩔 수 없이 들어왔어도 손님은 손님인데, 마실 거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집에 물하고 커피밖에 없어.”
뻔뻔한 그의 말에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꾹 눌러 삼킨 아영이 말했다.
“커피 줘.”
몸을 돌린 아영은 주방으로 걸어가 가스레인지 위에 커피 주전자를 올렸다. 그런 뒤 집에 두 개뿐인 머그잔을 꺼냈다.
그때 뒤에 있던 그가 툭 내뱉었다.
“집이 널 닮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