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아영은 어떻게든 그를 감당하기 위해 있는 힘껏 시트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처음 느끼는 통각이 제 몸을 덮쳐 오는 순간 그녀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주르륵.
눈물을 닦아야 했지만 붙잡은 시트를 놓으면 제 몸이 그대로 부서질 것 같아 놓을 수가 없었다. 아영은 그런 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는 용납하지 않았다. 다시 그녀의 얼굴을 제자리로 돌려놓은 그는 그녀의 눈가가 젖은 걸 보고 당황한 듯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지더니 거칠게 들이치던 움직임을 멈췄다.
“아파?”
솔직히 말해도 될까?
그녀의 머뭇거림을 눈치챈 그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의 다정한 행동에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만할까?”
그가 그녀의 얼굴 옆으로 양팔을 버티고 선 채 말했다.
빛을 등지고 있어서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치밀어 오르는 욕망을 참는 듯 얼굴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영은 갈등이 일었다. 처음이 아프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익숙해지면 괜찮다는 말에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통증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그가 몸을 겹쳐 올 때마다 제 몸이 조각조각 부서지는 것 같았다. 도저히 이 행위가 익숙해질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도 고민을 하는 건, 처음인 이 순간을 이런 식으로 끝내고 싶지 않아서였다.
무엇보다 제 몸을 다 태워 버리고 싶었다. 미련 없이, 남김없이.
생각의 끝이 정해지자 아영은 그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아니. 계속해 줘.”
예상치 못한 그녀의 대담한 답에 태하의 눈이 놀라 커졌다. 이내 가까스로 잡고 있던 이성이 날아가 버린 듯 그대로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거칠게 몰아붙이던 처음과 달리 부드럽게 입술을 겹친 그는 자신의 사나웠던 키스로 인해 부풀어 오른 그녀의 입술을 달래듯 어루만지다 이내 지그시 눌러 비볐다.
맞닿은 입술에서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르자 뻣뻣하게 힘이 들어가 있던 그녀의 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하더니 키스가 끝난 순간 활짝 열렸다. 그러자 멈췄던 그가 다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온 태하는 침대 헤드에 기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관계가 끝나자 창피함과 어색함이 찾아온 아영은 서둘러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시트로 벗은 제 몸을 가렸다.
그 잠깐 움직이는데 난생처음 쓴 근육들이 아우성을 치자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눈치라도 볼까 봐 아영은 재빨리 신음을 삼켰다.
“물 마실래?”
숨이 안정적으로 돌아오자 그가 물었다.
아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는 알몸으로 걸어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가운을 집어 들었다. 가운을 몸에 걸치곤 대충 허리끈을 묶은 뒤 냉장고로 걸어갔다.
그 일련의 행동들이 퍽 자연스러워 보였다. 마치 이런 상황이 처음이 아닌 것처럼.
그래. 저 얼굴에, 저 스펙에. 처음일 리 없지.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뒤 아영도 자신의 가운을 찾았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가운은 침대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었다.
아영은 낙심했다. 그가 보는 앞에서 알몸으로 가운이 있는 곳까지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이미 그에게 제 몸을 다 보인 뒤였지만 여전히 창피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그의 침대에서 뭉개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잠시 고민하던 아영은 시트로 대충 가리고 가기로 결정했다.
그가 보기에 꼴이 우습긴 하겠지만 알몸보다는 나았다.
아영이 침대 밖으로 발을 내민 뒤 시트를 끌어당겼다. 그 순간 시트에 무언가 눈에 띄었다.
자세히 보기 위해 시트를 가까이 끌어당긴 아영은 당황했다. 새빨간 장미꽃잎이 떨어져 있었다.
이런.
본능적으로 제 흔적이 남은 시트를 숨기기 위해 덮으려던 순간,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뭐야?”
그에게 처음인 걸 들키고 싶지 않았던 아영은 이 상황이 난처했다.
“설마, 너 처음이었어?”
아영이 얼굴을 굳힌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가 재차 물었다.
마지못해 고개를 돌리자 그가 물병을 든 채 서 있었다. 마주친 그의 시선에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맞아.”
“하!”
이미 드러난 사실에 더는 숨길 수 없었기에 아영이 솔직히 인정했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바람 빠진 소리가 새어 나왔다.
“너 뭐야?”
“뭐가?”
“왜 처음인 거 말하지 않았어?”
예기치 못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태하는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내가 처음인 게 그렇게 싫은 걸까?
“걱정하지 마. 너한테 책임지라는 소리 안 할 테니까.”
“누가 그것 때문에 그래?”
그가 미간을 구겼다.
“그럼 뭐가 문젠데?”
“몰라서 물어?”
“모르니까 묻잖아.”
“네가 미리 말만 했다면! 적어도…… 덜 아프게 했을 거야.”
그럼 원래 이렇게 아픈 게 아니었다는 건가? 아영은 비교할 경험이 없으니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하고 싶지도 않았다. 후회에는 신물이 났다.
“신경 쓸 거 없어. 난 괜찮으니까.”
“내가 안 괜찮아.”
“그럼, 내가 사과라도 할까?”
“아니. 다시 기회를 줘.”
“뭐?”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처음을 망쳤으니 만회할 기횔 달라고.”
“설마 다시 하자는 건 아니지?”
“맞아.”
아영은 그가 장난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말 돼.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권태하…… 앗!”
그 말과 동시에 그가 아영이 감싸고 있던 시트를 홱 잡아당겼다. 그러자 그의 힘을 이기지 못한 시트가 그녀의 손에서 빠져나와 저 멀리 던져졌다.
그녀가 드러난 몸을 가릴 사이도 없이 그의 커다란 몸이 그녀에게 실렸다.
“비켜.”
아영이 그의 가슴을 밀쳐 내려 했지만 그는 단단한 벽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되레 그에게 양손이 붙잡혀 머리 위로 들리고 말았다.
손쉽게 그녀를 가둔 그가 짙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했던 건 잊어. 지금부터가 우리의 처음이야.”
그렇게 시작된 관계는 처음과 달랐다. 그는 마치 그녀가 깨지기 쉬운 유리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 또 조심했다.
키스할 때도, 애무할 때도, 다시 하나가 되었을 때도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반응을 살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미간을 찌푸리거나 버거워하는 것 같으면 천천히 속도를 줄이거나 달콤한 키스를 퍼부었다.
그러자 마법처럼 매끄러워진 그녀에게 처음으로 쾌감이 찾아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통하는 짜릿한 전류에 아영은 파르르 떨며 기절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젖은 수건으로 아영의 몸을 정성껏 닦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그의 손을 피하려 했지만 그의 입술이 더 빨랐다. 그러자 그녀의 몸은 다시 버터처럼 녹아들기 시작했다.
***
따뜻했다.
그 느낌이 너무 좋아 깨고 싶지 않았다.
늦게 끝나는 엄마를 홀로 기다리다 지쳐 잠들던 그녀는 늘 엄마 품에 굶주렸다.
먹고살기 바빴던 엄마는 한 번도 그녀를 살뜰히 안아 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영은 유독 추위와 다정함에 약했다.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 이렇게 있고 싶었다.
다시 잠들려는 순간,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라고 하기엔 그 따뜻함이 너무 현실 같았기 때문이다. 마치 누군가 자신을 진짜 안고 있는 것처럼.
순간 소름이 쫙 끼쳤다.
아영은 감은 눈을 번쩍 떴다. 몇 번의 깜빡거림 후 흐릿하던 주위 사물이 선명해지자 낯선 방 안 풍경 눈에 들어왔다.
아영의 두 눈이 놀라 커졌다.
‘대체 여기가 어디…….’
눈을 빙그르르 돌려 제가 있는 곳이 어딘지 확인하려는 순간, 그녀의 허리께에 묵직함이 느껴졌다. 단단하면서도 커다란 게 꼭…….
헉!
천천히 시선을 내려트린 아영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서둘러 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아영은 제 허리를 감싸고 있는 게 손이라는 걸 알아차렸고, 그 손의 주인이 권태하라는 걸 깨달았다.
놀란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그 소리가 커 뒤에 있는 그에게 들리지 않을까 겁이 날 정도였다.
아영은 숨죽이며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다행히 그에겐 규칙적인 숨소리만 들릴 뿐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그제야 그가 잠들어 있다는 걸 깨달은 아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의 기억이 영화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그가 자신의 집에 찾아온 것부터 시작해서 밤새 그와 했던 행위들까지.
‘미쳤어. 이아영.’
밤새 몇 번이나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눈만 뜨면 키스했고, 서로를 애무하다 이내 다시 하나가 되길 반복했다.
맨정신으로 돌아와 그와 했던 낯 뜨거운 장면들이 떠오르자 도저히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아영은 그가 깨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기로 했다.
숨을 삼킨 아영은 제 허리에 둘린 그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체온이 닿자 마치 제게 전염이라도 된 듯 손바닥이 저릿했다.
서둘러. 이아영.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다잡은 아영이 그의 팔을 막 들어 올리려던 순간 그가 몸을 뒤척였다.
가슴이 철렁한 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1초. 2초. 3초……. 그렇게 10초를 더 기다렸다.
그의 움직임이 잠잠해지자 아영은 제 허리에 걸쳐진 그의 팔을 천천히 제 몸에서 떼어 낸 뒤 침대 밖으로 빠져나왔다.
하아.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제 옷만 입고 나가면 된다.
서둘러 제 옷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그녀의 시선 끝에 잠든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시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고개가 돌려졌다.
권태하는 베개에 얼굴을 반쯤 묻은 채 엎드린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자세 때문에 그의 넓은 등에 촘촘히 박힌 근육들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넓은 등과 반비례해 좁아진 허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시트 때문에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홀린 듯 멍하니 그를 보고 있던 아영은 그가 자세를 바꾸자 허리에 걸쳐져 있던 시트가 스르륵 내려오는 걸 보고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마치 남자 알몸을 처음 보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입이 마르고 얼굴까지 화끈거렸다.
‘이아영, 너 뭐 하니?’
그런 제 모습이 어이없고 한심해 속으로 욕설을 내뱉은 아영은 바닥에 떨어진 옷을 찾아 서둘러 입었다.
옷을 다 입은 아영은 테이블 위 가방과 핸드폰을 챙기다 문득 그 옆에 놓인 메모지 한 장을 발견했다.
이럴 시간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발걸음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아영은 이내 펜을 들었다.
「어젯밤에 즐거웠어. 먼저 갈게.」
짧게 느껴지긴 했지만 길게 쓰는 것도 우스워 다 적은 메모지를 그가 잘 볼 수 있을 만한 위치에 올려놓은 뒤 조용히 호텔 방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