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말해 봐. 정말 다른 남자라도 찾으러 갈 생각이었냐고.”
“글쎄.”
당연히 집에 갈 생각이었지만 아영은 왠지 사실대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것에 대한 속 좁은 복수라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녀의 도발에 태하의 눈빛이 번뜩였다.
“충고하는데, 후회할 짓 하지 마.”
그는 아영이 정말 다른 남자와 잘 거라고 생각했는지 내뱉는 말투가 거칠었다.
“늦었어. 이미 후회하고 있으니까.”
“나한테 자자고 한 걸 후회한다는 소리야?”
“그래. 차라리 모르는 남자였다면 지금보다 덜 쪽팔렸을 테니까. 암튼 아까 얘긴 못 들은 걸로 해.”
아영이 어깨에서 흘러내린 가방을 고쳐 매며 말했다. 태하의 새카만 눈동자가 그녀를 에워쌌다.
“그렇게 못하겠다면?”
순간 아영은 당황했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뭐, 상관없어. 어차피 오늘 이후로 다시 만날 일 없을 테니까. 먼저 갈게.”
하지만 아영이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다시 그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왜 이래?”
그에게 잡힌 손목이 아파 아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좋아. 네 제안 받아 줄게.”
“뭐?”
아영은 제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자자며. 어디로 갈래? 너희 집으로 갈까? 아니면 내가 묵고 있는 호텔로 갈까?”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난 이런 거로 장난 안 해.”
아영은 급반전된 상황에 어안이 벙벙했다.
“갑자기 마음이 변한 이유가 뭐야? 혹시 내가 불쌍해 보이니?”
그녀가 생각나는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갑자기 그가 저를 좋아하게 될 리도 없었고, 없던 성욕이 불쑥 생겨났을 리도 없었다.
“동정심 때문에 여자랑 잘 정도로 자애로운 성격 아니야. 나.”
“동정이 아니면 뭔데?”
그가 진득한 시선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영은 그의 시선을 받아 내는 게 버거웠지만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듯 서로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의 침묵이 숨 막히게 느껴질 즈음 그가 툭 내뱉었다.
“네가 다른 놈하고 자는 걸 두고 볼 수 없어서.”
“왜, 네가 갖기는 싫고, 남 주려니까 아깝니?”
“이아영.”
그의 얼굴에 언뜻 짜증이 서렸다.
“아니면 뭔데?”
아영으로서는 그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설마 제가 다른 남자와 자는 게 싫어서 그렇게 말했을 리는 없을 테니까.
그때 술집 밖으로 누군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따라와.”
뒤를 힐끗 쳐다보던 태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걸 보고 그녀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그에게 손목이 잡혀 있던 아영은 그대로 딸려 갈 수밖에 없었다.
“어딜 가는데?”
“따라와 보면 알아.”
“알았으니까 손은 놓고 가.”
하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없다는 듯 말없이 걷기만 했다.
그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려던 아영은 그의 손이 더욱 옥죄어 오자 이내 포기했다.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뜻밖에도 그의 차가 주차된 주차장이었다.
“타.”
“설마, 운전하려고?”
아영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저만큼은 아니지만 그도 술을 마셨기 때문이다.
“대체 네 머릿속에서 난 얼마나 나쁜 놈인 거냐?”
태하가 잘생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왜 타라는 건데?”
“너도 알다시피 나 유명인이야. 괜히 나랑 있는 모습 찍히면 나뿐 아니라 너도 힘들어져.”
거기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아영은 아차 싶었다.
그가 귀국하는 날부터 지금까지 연예란에 하루도 빠짐없이 그에 관한 기사가 났다.
그가 누구와 밥을 먹는지까지 기사에 날 정도로 그에 관한 대중의 관심이 대단했다.
그제야 그가 왜 몸을 사리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그가 뒷좌석 차 문을 열어 주었을 때 아영은 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넌 왜 뒤에 타?”
태하가 운전석이 아닌 제 옆자리에 올라타자 아영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자 태하가 차 문을 닫으며 말했다.
“앞뒤로 앉아서 얘기할 순 없잖아.”
차가 대형 세단이었는데도 그가 옆에 앉자 아영은 차 안이 비좁게 느껴졌다.
그가 뒷자리에 탈 줄 모르고 어중간하게 앉았던 아영은 제 허벅지에 그의 허벅지가 닿을까 봐 긴장돼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와의 간격을 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그와 달리 저만 그를 의식하는 것 같아 꾹 참았다.
“매니저가 이쪽으로 오고 있어.”
“이 시간에?”
아영은 이 시간에 매니저를 왜 불렀냐는 투로 말했다. 그러자 그가 억울하다는 듯 덧붙였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일 때문에 통화하다가 어디냐고 묻길래 대답했을 뿐이야. 굳이 오겠다는 사람 말릴 이유도 없고…….”
RRRRR. RRRRR. RRRRR.
말하던 도중 전화벨이 울리자 그가 양해를 구한 뒤 전화를 받았다.
전화한 사람이 매니저인지 그는 간략하게 위치를 설명한 뒤 전화를 끊었다.
아영은 걱정이 앞섰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기사에 나는 상황이었기에 늦은 시간 저와 함께 있는 걸 매니저가 좋아할 리 없었다.
“나랑 있는 거 매니저가 알아도 괜찮아?”
“상관없어.”
그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한국과 달리 미국 에이전시는 자기 소속 모델들의 사생활에 대해서 관여를 안 하는 걸까? 아니면 그가 신경 쓰지 않는 걸까?
아영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매니저는 근처에 다 와서 전화한 건지 몇 분 뒤 바로 왔다. 그러다 그 옆에 그녀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이런 상황이 처음은 아닌지 능숙하게 표정을 바꿔 눈인사를 건넸다.
아영도 덩달아 눈인사를 건넸다. 그러면서도 제가 누구인지 말해야 하는지 아니면 태하가 소개해 주길 기다려야 하는지 고민에 휩싸였다.
그러나 인사가 끝난 뒤에도 태하는 두 사람을 소개해 줄 생각이 없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제 할 말만 하는 걸 보면.
“어디로 갈지 정했어?”
아영이 두 눈만 깜빡인 채 쳐다보자 그가 덧붙였다.
“너희 집으로 갈지, 아니면 내가 묵고 있는 호텔로 갈지 정했냐고.”
그는 매니저가 앞에 앉아 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신경 쓸 거 없어.”
아영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운전석에 앉은 매니저를 힐끗 쳐다보자 그가 매니저 눈치 볼 필요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말했다.
그는 괜찮을지 모르지만 아영은 신경이 쓰였다. 그것도 무척이나.
“너희 집으로 갈까?”
“안 돼.”
그녀의 입에서 곧바로 거절의 말이 튀어나오자 태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호텔로 가.”
“네.”
그가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매니저를 향해 말했다. 매니저는 이 상황이 궁금할 텐데도 별다른 말 없이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
이내 차는 매끄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차 안은 적막했다. 하지만 그걸 깨닫지 못할 정도로 아영은 혼자만의 생각에 휩싸여 있었다.
‘나 잘하는 짓일까?’
막상 차가 호텔로 출발하자 아영은 덜컥 겁이 났다.
‘정말 권태하와 자게 되는 걸까?’
순간 그와 한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상상하자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권태하가 아닌데.
내가 왜 이러지…….
아무래도 오늘 하루 너무 힘들어서 심장에 과부하가 걸린 것 같다.
그냥 집으로 가 달라고 할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장난하냐고 화를 낼지도 몰랐다. 가만히 있는 그를 먼저 유혹한 사람은 저였으니까.
지금 와서 없었던 일로 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어쩌지…….
아영은 초조한 마음에 제 손등에 손톱을 박았다. 살이 움푹 패고 얇은 살갗이 벗겨져도 아픈 줄도 몰랐다.
그때 그의 손이 뻗어 와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란 아영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뭐야.”
“긴장할 필요 없어.”
“내가?”
아영이 아닌 척 되묻자 그가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초승달 모양의 손톱자국이 쿡쿡 박혀 있는 손등을 보여 주었다.
그제야 아영은 자신이 제 손등에 손톱을 박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오른 아영은 그에게 잡힌 손을 홱 잡아 뺐다.
다행히 그는 순수히 놓아주었지만 그에게 잡혔던 손에 땀이 났다. 차 안이 더웠다.
***
“앉아.”
태하가 현관에서 얼어붙은 것처럼 서 있는 아영에게 말했다.
마치 마법에 걸렸다가 풀린 사람처럼 그제야 걸음을 뗀 아영이 소파에 앉았다.
매끄러운 소파는 푹신해 보였지만 잔뜩 긴장해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앉은 그녀는 소파의 푹신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호텔 스위트룸은 처음이었다. 제가 사는 집보다 열 배는 커 보이는 룸을 보자 아영은 괴리감을 느꼈다.
10평 남짓한 집도 어렵게 대출을 받아 산 저와 달리 그는 하룻밤에 수백, 수천만이나 하는 스위트룸에서 지내고 있다는 게.
“마실 거 줄까?”
“물이면 돼.”
재킷을 벗어 소파 등받이에 걸쳐 놓은 태하가 거실 한쪽에 비치된 냉장고를 향해 걸어갔다.
그가 재킷을 벗자 셔츠 위로 언뜻언뜻 드러난 근육이 눈에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새가 날개를 펼치듯 양쪽으로 우아하게 뻗은 어깨, 드넓은 평야를 연상시키는 등, 그리고 군살 하나 없는 허리와 그 아래 길게 쭉 뻗은 다리까지. 너무 완벽해서 현실적이지 않았다.
그의 뒷모습을 넋을 놓고 보고 있던 아영은 그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자 재빨리 시선을 틀었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심장이 쿵쿵 뛰었다.
“물 대신 탄산수는 어때?”
“사, 상관없어.”
티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버벅거리고 말았다. 바보같이.
“마셔.”
“고마워.”
어느새 다가온 그가 탄산수를 건넸다. 차 안에서부터 목이 마르기도 했지만 긴장감 때문인지 더 목이 탔다.
뚜껑을 딴 아영은 서둘러 갈증을 채웠다.
그러다 입 안에 채 담기지 못한 탄산수가 턱을 타고 흘러내리자 당황한 아영이 황급히 손등으로 닦아 냈다.
하지만 그보다 빠르게 목을 타고 흘러내린 탄산수가 블라우스 사이로 사라졌다.
읏. 차가워.
차가운 탄산수가 비좁은 골짜기 사이로 주르륵 흘러내리자 아영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었다.
칠칠치 못한 제 모습이 창피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탄산수를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