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이제 생각이 났나 보네?”
낭패감이 깃든 그녀의 얼굴의 보며 태하가 느릿한 어조로 되물었다.
“안 믿을지 모르지만, 일부러 안 돌려준 거 아니야.”
“글쎄. 나로서는 곧이들리지 않네.”
그녀의 호소에도 그는 제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큰일이다. 꼼짝없이 도둑으로 몰릴 판이었다.
아영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그에게 매달리듯이 말했다.
“네가 오해해도 할 말 없는 상황인 거 아는데, 장례비 결제하고 바로 돌려줄 생각이었어. 그런데 네 옆에 친구들이 계속 붙어 있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어. 나중에 따로 돌려줘야지 했는데 정신이 없어서…… 암튼 기껏 빌려줬는데 제대로 챙기지 못해서 미안해. 내 불찰이야.”
아영은 어떻게든 그를 이해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하면 할수록 자꾸 변명처럼 들리는 것 같아 말을 멈추고 사과부터 했다.
태하는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마치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집요했다.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에 점차 숨이 막혀 올 즈음 그가 툭 내뱉었다.
“정 그렇게 미안하면 술이나 한잔 사든지.”
***
아영은 평범한 엄마를 가지고 싶었다.
학교 갔다 오면 따뜻한 밥을 챙겨 주고, 운동회나 소풍이면 색색의 재료를 넣은 김밥을 싸 주며, 학교 생활이 힘들어 투정 부리면 ‘힘들었구나’라고 제 등을 토닥여 주길 바랐다.
하지만 순옥은 평범함과 거리가 멀었다.
하루가 멀다고 마신 술 때문에 집에는 빈 소주병이 가득했고, 그로 인해 맨정신일 때보다 취해 있을 때가 더 많았다.
그녀는 취하면 밤새도록 재생 버튼을 누른 것처럼 한 얘기를 또 하고 또 했다.
아영은 그런 엄마가 창피하고, 싫었다. 그래서 우연히 길거리에서 마주쳤을 때 저도 모르게 못 본 척 피하고 말았다.
그날 술에 잔뜩 취한 순옥의 말이 떠올랐다.
“이년아, 너 그러는 거 아니다! 네년 하나 보고 지금껏 살아온 엄마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엄마가 그렇게 창피하디?”
한참 목소리를 높여 주정을 부리던 순옥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읊조렸다.
“넌 내가 창피할지 모르지만…… 딸꾹. 그래도 내가 태어나서 제일 잘한 짓이 뭔 줄 알아? 바로 네년 낳은 일이야.”
그때까지 그녀는 자신이 엄마 인생의 혹이라고 생각했다. 원치 않은 임신으로 학교를 그만두게 만든 장본인이었으니까.
그런 자책감 때문에 엄마에게 더 다가가지 못했다.
그런데 엄마가 돌아가신 뒤에야 깨달았다. 엄마는 나름의 방식으로 저를 사랑했다는 걸.
돌이켜 보면 저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자신을 임신했다.
원치 않으면 지울 수도 있었지만, 엄마는 그러지 않았다. 엄마의 인생을 포기하면서까지 저를 선택한 것이다.
엄마의 마음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이제 다시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데…….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해 놓고, 정작 가까이 있는 엄마의 마음 하나 알지 못했다.
깊은 후회와 번뇌가 뒤엉켜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이 괴로움을 잊게 해 준다면 아영은 뭐든 하고 싶었다.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던 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술병을 든 아영은 자신의 빈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잔을 들어 올리자 아슬아슬하게 담겨 있던 술이 출렁이며 밖으로 흘렀다. 아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으로 가져갔다.
연거푸 석 잔을 들이켜자 그때까지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던 태하가 잔을 빼앗았다.
“그만 마셔.”
“이리 줘.”
태하는 보란 듯이 그녀의 술을 마셔 버렸다.
제멋대로 제 술을 마셔 버린 그를 보며 아영은 미간을 구겼다.
“무슨 짓이야?”
“너 취하면 데려가기 힘들어.”
“너한테 데려다 달란 말 안 할 테니까 이리 줘.”
그녀의 말에도 태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됐어. 다시 시키지 뭐. 저기…….”
“이아영.”
아영이 직원을 향해 손을 들자 그가 그녀의 팔을 강제로 잡아 내렸다.
“놔.”
아영이 그를 노려보자 그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마셔. 그러면 줄게.”
아영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마지못해 그녀의 잔에 술을 채웠다.
아영은 단숨에 들이켰다. 쓰디쓴 술이 식도를 타고 빠르게 스며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괴로움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떠올라 그녀를 괴롭혔다.
“권태하.”
“말해.”
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은 아영이 그를 불렀다. 태하가 고개를 돌리자 눈이 마주쳤다.
깊고 고요한 시선이 제게 향하자 아영은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나랑 잘래?”
“뭐?”
그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방금 들었잖아.”
“다시 말해 봐.”
그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되물었다.
저를 향한 강렬한 눈빛에 아영은 아차 싶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였고,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포기하고 밀고 나갔다.
“나랑 자자고.”
“너 이거 몇 개야?”
“왜, 내가 취한 것 같아?”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태하가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이며 물었다.
아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평소보다 술을 많이 마시긴 했지만 취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아직은.
태하는 꼭 확인해야겠다는 듯이 대답을 재촉했다.
“이게 몇 개인지나 말해.”
“두 개.”
아영은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지만 대답을 들은 그의 표정은 오히려 더 복잡해 보였다.
그가 순순히 응해 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긴 했지만 친하지도 않았을뿐더러 5년 만에 만나서 갑자기 자자고 했으니 그로서는 황당할 거다.
한참 후 그가 입을 열었다.
“너, 나 좋아해?”
“뭐?”
그녀가 눈에 띄게 당황하자 그가 쓰게 웃었다.
“됐고. 왜 나야?”
아영은 말문이 막혔다.
글쎄. 왜일까?
엄마의 사랑을 깨닫자마자 엄마를 잃었다. 그리고 좋아했던 사람에게 배신 아닌 배신을 당했다.
이제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엄마 때문에 가슴이 아팠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매일 봐야 하는 상황이 괴로웠으며, 태어나 처음 본 아버지란 사람에게 당한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이유가 필요해?”
“날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가 갑자기 자자는데 이상하잖아. 안 그래?”
꿰뚫어 보는 듯한 그의 시선에 아영은 제 생각을 읽힐까 봐 술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노란 황금빛 액체가 든 술잔을 빙그르르 돌렸다.
“별다른 이윤 없어.”
“없다고?”
그의 눈빛이 순간 짙어졌다.
“지금 네가 내 앞에 있어서 말한 것뿐이야.”
“그 말은 내가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뜻이야?”
“상관있어야 하는 거야?”
“내가 먼저 물었어.”
아영이 질문에 질문으로 답을 하자 그가 잘생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영이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어렵네.”
“뭐가?”
“남자랑 자는 거. 다들 원나잇은 어떻게 하나 몰라.”
아영은 그가 거절할 핑계를 찾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질문에 대한 답은 피하면서 본인이 한 질문에만 집착하는 걸 보면.
“권태하, 내키지 않으면 그냥 거절해. 괜한 핑계 찾지 말고.”
아영은 실망감을 감추며 내뱉었다.
그냥 가게 내버려 둘걸.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괜한 말을 꺼내서는 분위기만 이상해지고 말았다.
아영은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제 앞에 남아 있는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독한 위스키가 식도를 할퀴듯 내려가자 절로 미간과 콧잔등에 주름이 팼다.
익숙하지 않은 술이 들어가서인지 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와 동시에 혈관을 타고 술기운이 퍼지는 걸 느꼈다.
안주도 먹지 않고 다시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연거푸 두 잔을 들이켜자 취기가 훅 올라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에게서는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해 주면 덜 창피하고 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만 일어나자.”
더는 그의 침묵을 견딜 수 없었던 아영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순간 머릿속이 핑 돌았다.
재빨리 테이블 모서리를 붙잡았다. 그러자 빙글빙글 돌던 세상이 멈췄다. 꼴사납게 넘어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안도한 아영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잠깐만.”
뒤에서 그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영은 그대로 술집을 빠져나왔다.
자정을 넘은 시간이라서 그런지 거리는 조용했고, 한산한 도로에는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만 즐비하게 서 있었다.
이대로 가 버릴까?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도저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의 얼굴을 다시 볼 낯이 없었다.
그가 황당해하겠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오늘 이후로 그를 다시 볼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에 조급증이 일었다.
아영은 서둘러 택시 정류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채 몇 걸음도 내딛기 전에 그녀의 손목이 붙잡힘과 동시에 몸이 반대로 홱 돌려졌다.
“앗.”
균형을 잃은 그녀가 휘청하자 태하의 다른 손이 그녀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하늘이 빙그르르 도는 느낌에 아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짧은 어지럼증이 가시고, 아영은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 태하의 성난 눈빛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꼴사납게 들키고야 말았다.
“너무한 거 아니야?”
“뭐가.”
아영은 시치미를 뗐다.
“술은 네가 사기로 한 것 같은데.”
아.
그의 거절에 낯 뜨거워 도망치기 바빠 술값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영은 얼굴이 벌게졌다.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아영은 자꾸만 그 앞에서 실수만 연발하는 자신이 창피해 숨고 싶었다.
“미안. 술값 얼마 나왔어? 지금 줄게.”
아영이 그가 낸 술값을 주기 위해 가방을 열어 지갑을 찾았다.
“술값은 됐고. 하나만 묻자.”
아영이 지갑을 찾던 손길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거절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어?”
“뭘.”
“다른 남자라도 찾을 생각이었어?”
아영은 그가 자신의 제안은 거절해 놓고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게 왜 궁금한데?”
“말해 봐. 정말 다른 남자라도 찾으러 갈 생각이었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