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82)

15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영은 너무 울어 탈진 상태였다. 씻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아 그대로 침대로 쓰러졌다.

푹신한 이불이 얼굴에 닿자 차가운 곳에 외롭게 있을 엄마가 생각났다.

뜨거운 눈물이 베개를 적셨다. 아영은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그러자 벌겋게 짓무른 눈가가 소금이라도 뿌린 것처럼 쓰라렸다.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다시 터진 눈물은 멈춰지지 않았다. 조그맣게 번지던 눈물이 금세 베개를 흥건히 적셨다.

쓰라린 눈가가 헐기라도 했는지 경련처럼 떨리자 아영은 두 눈을 감았다.

5일 밤낮을 거의 뜬눈으로 지새워서 그런지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잠이 쏟아졌다.

아영은 이대로 잠들어 영원히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쾅! 쾅! 쾅!

얼마나 잤을까. 누군가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하지만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마치 눈에 수분이란 수분은 다 빠져나간 것처럼 뻑뻑했다.

일어나야 하는데 몸이 마치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눈만 겨우 굴린 아영은 벽시계를 확인했다. 밤 9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눈만 잠깐 감은 것 같은데 다섯 시간을 내리 잤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밤잠도 아니고 낮잠을 이렇게 길게 자 본 적이 없었다.

쾅! 쾅! 쾅!

안에서 아무 반응이 없자 또다시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더 빠르고 다급하게 들렸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뇌까지 울리는 것 같았다.

대체 누구길래 초인종 놔두고 현관문을 두드리는 거지?

“이아영, 안에 있어?”

아영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나려는 찰나 문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두 눈이 놀라 커졌다.

설마……. 아닐 거야. 내가 잘못 들었겠지.

아영은 제 귀를 의심했다.

“있으면 대답 좀 해!”

하지만 재차 들리는 목소리에,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권태하가 맞았다.

아영은 당황을 넘어 당혹스러웠다.

오늘 촬영 있다고 했던 그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갑자기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뭘까? 아니, 그것보다 우리 집은 어떻게 알고?

그때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는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녀가 유일하게 집에 초대한 적 있는 한수인.

아영은 왜 수인이 제게 허락도 받지 않고 태하에게 제집 주소를 알려 준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전화해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제가 안에 있다는 걸 태하는 아직 모르고 있다.

어쩌지? 나가 봐야 하나?

내키지 않았다. 아니, 싫었다. 누추한 집도 모자라 방금 자다 깬 몰골을 그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냥 모른 척하고 있을까?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면 제가 없는지 알고 돌아갈 거다.

그가 무슨 일로 제집까지 찾아왔는지 그 이유가 못내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알고 싶지 않았다.

아영은 숨죽이며 그가 돌아가길 기다렸다.

그러나 포기하고 바로 돌아갈 줄 알았던 태하는 문 앞에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영은 귀를 쫑긋 세웠다.

“여보세요. 아무래도 아영이 집에 없는 것 같아.”

통화하는 사람은 친구 수인인 듯했다.

“혹시 다른 데 갈 만한 곳 알아? ……본가? 고등학교 때 살았던 동네 말하는 거야? ……혹시 집 주소 알아?”

설마, 엄마 집에 찾아가려는 건 아니겠지?

“아니야. 내가 가 볼게. 받을 것도 있고.”

그녀의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고 말았다. 낭패감에 휩싸인 아영은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엄마 집까지 찾아가게 둘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문을 열고 나가든지 둘 중에 선택해야 했다.

전자를 택하자니 지금 살고 있는 제집보다 더 낙후된 동네에 위치한 허름한 엄마 집을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할지 두려웠다.

그렇다고 후자를 택하자니 눈치 빠른 그가 뒤늦게 나온 제 저의를 모를 리 없었다.

“주소 문자로 좀 보내 줘.”

덧붙인 태하의 말에 아영은 고민할 것도 없이 현관으로 튀어 갔다. 마음이 급해 신발도 신지 않고 현관문 손잡이를 돌렸다.

달칵.

모로 몸을 돌려 통화 중이던 태하는 벌컥 열리는 현관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당연히 안에 없는 줄 알았던 그녀가 문을 열고 나오자 놀랐는지 그의 동공이 커졌다.

“가지 마. 갈 필요 없어.”

아영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짧은 거리였지만 놀란 심장이 파닥거렸다.

태하의 시선이 빠르게 그녀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내렸다. 그런 뒤 뭐라고 조잘대고 있는 핸드폰에 대고 말했다.

“아영이 방금 찾았어. 나중에 전화할게.”

그러고는 상대방의 말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뭐야?”

“뭐, 뭐가?”

그가 무서운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아영은 그의 매서운 기세에 눌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까지 계속 안에 있었던 거야?”

“어.”

그가 말하는 계속이 언제부터 말하는지 모르지만 굳이 본가에 다녀왔다는 얘긴 하고 싶지 않아 아영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집에 있었으면서 전화는 왜 안 받은 거야?”

“전화, 했었어?”

“그래. 그것도 스무 번이나 넘게.”

아영은 그가 제 연락처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전화를 스무 번 넘게 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미안. 자느라 몰랐어.”

엄마 집에 가기 전부터 핸드폰에 배터리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전화 올 사람도 없었고, 전화가 오더라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 사이에 그렇게 많은 전화를 했을 줄이야. 아영은 당혹스러웠다.

“하!”

태하는 그녀의 대답에 어이가 없는지 단정하게 정돈된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애써 삭히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아영은 지금처럼 그가 감정을 드러낸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날것의 감정을 드러낼 만큼 서로 친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그가 이렇게 화를 내는 이유가 궁금했다.

혹시 제가 잠든 사이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걸까? 그러지 않고서야 그가 제집까지 직접 찾아올 리도, 지금처럼 화를 낼 리도 없을 테니까.

혹시 수인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아니면 석현이나 지수한테?

아영은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혹시 수인이나 친구들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아니. 그 반대야.”

“반대라니?”

아영이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다들 너한테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찾아 나서려던 참이었어.”

“단지 내가 전화 안 받아서?”

“널 혼자 두는 게 불안했으니까.”

아영은 그가 불안했다는 뜻인지 아니면 친구들이 불안해했다는 뜻인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아무튼, 친구들에게 괜한 걱정을 끼친 것 같아 아영은 미안해졌다. 그래서 일부러 밝게 말했다.

“보시다시피 난 괜찮아.”

“괜찮다고 하기엔 지금 네 상태, 심해.”

태하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아영은 그의 직설적인 말에 무안해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아무리 꼴이 말이 아니어도 그렇지. 대놓고 말하는 그가 얄미웠다.

그러면서도 베개에 눌렸을 머리와 흐트러진 옷차림을 재빨리 정리했다. 그래 봤자 그의 눈에는 별 차이 없을 테지만.

“거기 말고, 여기.”

고개를 든 아영이 ‘이젠 괜찮지?’ 하는 얼굴로 쳐다보자 태하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제 얼굴을 향해 뻗어 오자 아영의 손이 본능적으로 쳐냈다.

탁!

“남의 얼굴 멋대로 만지지 마.”

그의 손이 갈 길을 잃은 듯 허공에 떠 있는 걸 본 아영은 제 행동이 지나쳤다는 걸 깨달았지만 사과는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럼, 신경 쓰이게 하지 말든가.”

“내가 뭘?”

“지금 네 얼굴, 눈 뜨고 못 볼 지경이야.”

아…….

그제야 아영은 제 얼굴 상태가 어떨지 짐작이 가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바늘로 콕콕 쑤시는 것처럼 눈 주위가 따가웠다.

보지 않아도 아마 툭 튀어나온 복어 눈보다 더 보기 흉할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가 저를 이렇게 불쌍하게 쳐다볼 리 없을 테니까.

아영은 번번이 자신이 비참할 때만 나타나는 그가 얄미웠다. 그의 잘못이 아닌 걸 알면서도 말투가 곱게 나가지 않았다.

“내 얼굴 지적하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건 아닐 테고. 찾아온 용건이나 말해.”

날 선 그녀의 반응에 좀 전까지 부드러웠던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냉랭해졌다.

“나, 내일 떠나.”

아영은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마치 지금 알게 된 것처럼 마음 한쪽이 스산했다.

서운한 건가? 잘 모르겠다. 아마 그에게 신세 진 게 많아서 그런지도 몰랐다.

“그 말 하려고 온 거야?”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한 번은 만나야 할 것 같아서.”

“나를? 왜?”

아영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어다.

“이유는 들어가서 얘기할게.”

“그건 안 돼.”

그가 집 안으로 들어올 것처럼 다가오자 깜짝 놀란 아영은 황급히 현관문을 가로막고 섰다. 자신의 구질구질한 살림을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이유를 알 리 없는 그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왜, 집에 남자라도 숨겨 놨어?”

“그랬으면 애초에 문도 안 열었지.”

“그럼 왜 못 들어가게 하는데?”

“금남의 집이거든.”

“뭐? 풋.”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던 아영은 생각나는 대로 떠들었다.

그녀의 이유를 들은 그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비웃는 거야?”

“미안. 옛날 프랑스 영화 제목하고 똑같아서.”

아영이 눈을 세모꼴로 뜨고 쳐다보자 그가 웃음을 삼킨 뒤 대답했다.

“암튼 안 되니까 찾아온 용건만 말하고 돌아가.”

“남의 거 멋대로 가져간 사람치고 꽤 당당하네.”

아영이 뜨악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뭘 가져갔다는 거야?”

“벌써 잊은 거야? 아니면 잊은 척하는 거야?”

“알아듣게 말해.”

“장례식장에서 빌려준 카드. 아직 안 돌려줬잖아.”

헉.

그 순간 그녀의 동공이 커졌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본 아버지란 작자가 조의금을 훔쳐 도망가는 바람에 그에게 카드를 빌렸던 사실을.

미쳤어. 아무리 정신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그걸 까먹고 있었을까.

아영은 제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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