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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 선배가 왜 전화했을까?
이틀 뒤 출근하기로 했으니 회사 일은 아닐 거다.
고민하는 사이 전화가 끊어졌다. 안도와 서운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아영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때 핸드폰에 문자가 떴다.
「전화 안 받네. 지금 너희 집으로 가는 중이야.」
문자를 확인한 그녀의 두 눈이 놀라 커졌다.
서둘러 진혁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으로 넘어가기 전에 그가 전화를 받았다.
[나야.]
“…….”
마음이 급해 번호부터 누른 아영은 진혁의 목소리가 들리자 말문이 턱 막혀 나오지 않았다.
[여보세요? 이아영?]
그녀가 아무 말이 없자 대번에 걱정이 묻어났다.
“……네. 말씀하세요.”
서둘러 숨을 크게 들이쉰 아영이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너, 괜찮아?]
진혁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운 걸 보니 아마 소식을 듣고 전화한 모양이었다.
“이제 좀 괜찮아요.”
[내가 옆에서 힘이 돼 줬어야 했는데. 하필 출장 가 있는 사이에 그런 일이…… 암튼 미안하다.]
“선배가 왜 미안해요. 그러지 마세요.”
[암튼, 지금 한강대교 건너는 중이야. 30분 후면 도착할 거야.]
“오, 오지 마세요.”
[왜?]
“저 지금 밖이에요.”
아영은 진혁이 집으로 찾아올까 봐 거짓말을 했다.
[그럼 지금 있는 곳 주소 말해. 거기로 갈 테니까.]
“그러지 말고 다음에 봬요. 오늘 선배 만나면 못 볼 꼴 보일 것 같아서 그래요.”
진혁을 집에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한 핑계이기도 했지만 지금 선배 얼굴을 보면 아이처럼 붙잡고 엉엉 울어 버릴 것 같아서 싫었다.
[그래. 네 마음 편해지면 연락해.]
아영이 진혁을 처음 만난 건 대학에 들어와서였다.
조교였던 진혁은 우연히 그녀의 가정사를 들은 뒤로 시시때때로 그녀를 챙겨 주었다.
엄마에게 받아 보지 못한 챙김이라서 그런지 아영은 싫지 않았다.
아영은 대학 졸업 후 진혁을 따라 JS에 입사했다.
2년 사이 진혁은 능력을 인정받아 초고속 승진으로 팀장이 되어 있었다. 그런 진혁이 아영은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어 악착같이 일했다. 그녀의 갈망을 익히 알고 있던 진혁은 묵묵히 도와주었다.
그런 진혁을 조금씩 마음에 품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감정을 드러내는 게 익숙하지 않았던 아영은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의 주위를 맴도는 것밖에는.
그러나 눈치 빠른 진혁은 그녀의 마음을 알아챈 듯했다. 때때로 마주치는 시선에서 그걸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런데도 진혁은 그녀에게 거리를 두지 않았다. 오히려 더 그녀를 살뜰히 챙겼다.
괜찮은 식당을 발견했다며 혼자 가긴 뻘쭘하니 같이 가자고 했고, 새로운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어디서 공수해 오는지 공짜 영화 티켓이 생겼다며 함께 보러 갔다.
그리고 주말이면 집에만 박혀 책만 읽는 그녀를 불러내 코에 바람 좀 쐐야 한다며 억지로 야외로 드라이브를 시켜 주곤 했다.
그래서 아영은 기대했다. 그도 저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고.
하지만 있는 줄도 몰랐던 그의 약혼녀가 나타나 제 따귀를 때렸을 때 깨달았다. 그 모든 게 저만의 착각이었다는 걸.
배신감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그 배신감은 이내 허탈감으로 바뀌었다.
지금껏 그는 단 한 번도 저에게 사귀자거나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저 혼자 생각하고 저 혼자 착각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거다.
그가 원망스러웠다.
저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면 그런 다정한 눈빛으로 보지 말았어야 했다. 저를 챙겨 주지도, 받아 주지도 말고 냉정하게 내쳐야 했다.
그 순간은 좌절했겠지만 오랜 시간 동안 감정 낭비는 하지 않았을 거다.
이미 켜켜이 쌓여 버린 그를 향한 감정을 지우는 게 아영은 너무 힘이 들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비참함 때문인지 서운함 때문인지도 모를 눈물을 아영은 한참 흘렸다.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는데 아영은 헛웃음이 났다.
엄마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남자한테 빠져 울고 있는 제 모습이 너무 한심하고 처량해 보여 화가 났다.
그런 제 모습이 꼴도 보기 싫었던 아영은 도저히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손이라도 바쁘면 진혁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무작정 엄마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문득 유품 정리할 때 꼭 부르라던 수인의 말이 떠올랐지만 3일 내내 고생한 수인을 다시 부르기 미안해 연락하지 않았다.
다시 찾은 엄마 집은 이상하게 낯설었다.
몇 년을 이곳에서 엄마와 살을 부딪치며 살았는데 남의 집에 온 것처럼 어색했다. 그래서 선뜻 신발도 벗지 못한 채 눈만 굴려 집 안을 둘러보았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거실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빨래들이었다. 아마도 세탁기에 서 꺼낸 뒤 건조대에 널기 귀찮아 던져 놓았을 거다.
그리고 부엌 쪽으로 향하던 그녀의 눈에 싱크대에 넘치도록 쌓여 있는 그릇들이 보였다.
지금이 겨울이라서 다행이지 여름이었으면 어떤 상태였을지 상상하자 아영은 진저리가 쳐졌다.
순옥은 바깥일과 달리 살림을 잘하지 못했다. 옷을 벗으면 아무렇게 던져 놓기 일쑤였고, 먹고 나면 바로 치우지 않아 벌레가 꼬여도 내버려 두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살림은 그녀 몫이 되었다. 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한숨을 삼킨 아영은 신발을 벗고 안방으로 향했다. 문고리를 잡는데, 엄마를 처음 발견한 곳이 안방이라는 소리를 들어서 그런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긴장된 숨을 내뱉은 아영은 천천히 안방 문을 열었다. 한눈에 들어온 안방 모습은 거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년 내내 깔려 있던 요와 이불이 한쪽에 방치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작은 상 위에 안주로 먹다 남은 멸치와 빈 소주병이 뒹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소주병을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마치 그 소주병이 엄마를 죽인 것 같아서. 사실은 술이 아니라 술을 죽도록 마신 엄마의 잘못인 걸 알면서도.
아영은 치밀어 오르는 충동을 억누르려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빠르게 요동치던 가슴이 아주 조금 진정되는 듯했다.
몇 번에 걸쳐 심호흡한 아영은 화장대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집 앞 슈퍼에서 사 온 10리터짜리 쓰레기봉투 입구를 벌린 뒤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는 자질구레한 것들이 많았다. 손톱깎이부터 시작해서 받아 놓고 쓰지도 않은 샘플 화장품과 녹이 슨 싸구려 귀걸이와 고장 난 손목시계, 쓰다 남은 건전지 등등.
아영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서랍을 빼 쓰레기봉투 안에 쏟아부었다.
두 번째, 세 번째 서랍도 크게 다르지 않아 금세 서랍들을 다 비운 아영은 맞은편 장롱으로 자리를 옮겼다.
옷이라고 해 봤자 많지 않았다. 코트 몇 벌과 겨울에 주야장천 입고 다녀 색이 바랜 빨간색 패딩이 보였다.
너무 많이 입어 솜이 죽은 패딩을 보자 울컥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
지금 울어 봐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억지로 눈물을 삼킨 아영은 패딩과 코트를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그런 뒤 장롱 밑에 딸린 서랍을 열었다. 티셔츠와 바지가 뒤섞여 있었다.
아영은 묵묵히 그 옷들을 비웠다.
그런데 옷을 다 비우고 나니 서랍 안쪽에 광목천으로 둘러싸인 작은 상자 같은 게 보였다.
그걸 꺼내 조심스럽게 풀어 본 아영은 깜짝 놀랐다. 그건 아기 때 입는 배냇저고리였다.
누렇게 색이 바래고 얼룩이 진 걸 보면 아마도 제가 아기 때 쓰던 거였나 보다.
그걸 엄마가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제가 어렸을 때 신었을 제 손보다 작은 신발과 양말 그리고 그 밑에는 작은 수첩 같은 게 보였다. 겉에 산모 수첩이라고 적혀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첫 장을 넘기자 흑백 초음파 사진과 함께 짤막하게 적힌 메모가 보였다. 아영은 차례대로 읽어 내려갔다.
「임신 5주 차.
내 배 속에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임신 8주 차.
오늘 처음으로 아기 심장 소리를 듣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아가야, 미안해. 맘껏 기뻐하지 못해서.」
「임신 12주 차.
사랑이에게 손과 발이 생겼다. 이제 더는 울지 않기로 했다. 사랑이를 지키려면 강해야 하니까.」
「임신 20주 차.
오늘 사랑이가 갈비뼈를 차는데 뻐근할 정도로 아팠다. 날 닮아 성질이 보통이 아닌 것 같다. 그래도 건강하게만 자라 줘. 사랑해~」
「임신 32주 차.
오늘은 일하는데 숨이 찼어. 사랑이가 그만큼 많이 컸다는 증거겠지. 그 사실이 기쁘면서도 두렵더라. 나보다 행복하게 키우고 싶은데 그럴 수 없을까 봐.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 널 위해서라면 엄만 뭐든지 할 수 있어. 그러니까 건강하게만 태어나 줘. 알았지?」
그렇게 자신을 낳기 하루 전까지 일기처럼 기록된 엄마의 산모 수첩을 다 읽고 나자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아영의 눈에서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서둘러 눈물을 닦아 보았지만 한 번 터진 둑은 그대로 무너져 홍수가 되었다.
“흐으흑…….”
아영은 순옥이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매일 술만 먹으면 너 때문에 내 인생을 망쳤다며 그녀 탓을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아영의 자존감은 바닥으로 내려갔고,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어떻게든 엄마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 열심히 공부했지만 엄마는 칭찬 한 번 해 주지 않았다. 되레 다른 꼬투리를 잡아 그녀를 혼냈다.
중학생이 되면서 죄책감은 사라지고 반항심이 생겼다.
그래서 제 탓을 하는 엄마에게 나도 엄마 딸이길 바란 적 없다고, 원하지도 않았는데 왜 태어나게 했냐고 따졌다.
그때 순옥은 충격을 받았는지 허옇게 질린 얼굴로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순옥을 보면서도 아영은 미안하지 않았다. 되레 그동안 제가 받은 상처만큼 순옥도 아파하길 바랐다.
이제야 아영은 제가 얼마나 순옥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었는지 그리고 제가 얼마나 나쁜 딸이었는지 깨달았다.
지금껏 엄마의 입장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학생 신분으로 임신해서 학교까지 포기하고 기댈 만한 가족 하나 없이 홀로 저를 키워 온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흐으으으윽. 미안해. 엄마……. 내가, 내가 잘못했어. 엄마가 날…… 사랑하는지도 모르고…… 상처 준 거 미안해. 절대 날…… 용서하지 마. 흑흑흑.”
산모 수첩을 가슴에 품은 아영은 순옥을 향한 죄책감에 목놓아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