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82)

13

“미안하지만 난 빠질게.”

아영은 엄마를 보낸 뒤라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있을 자신이 없었다. 괜히 갔다가 저 때문에 분위기만 망칠 것 같아 거절했다.

“너 빠지면 뭉칠 이유가 없지.”

“그래. 며칠 동안 잠 못 자고 피곤했을 텐데 집에 가서 쉬어.”

석현과 수인까지 동조하면서 약속이 파투 나게 생기자 지수가 아영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아영아, 그러지 말고 가자─. 이런 날 집에 혼자 있으면 기분만 더 다운돼서 안 돼. 오래 안 붙잡을게. 시원하게 맥주 한 잔만 하고 가자. 응?”

“알았어.”

아영은 썩 내키지 않았지만 연차까지 써 가며 고생해 준 지수의 부탁을 더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다섯 사람은 장례식장 근처 삼겹살집으로 향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문을 연 곳이 삼겹살집밖에 없었다.

삼겹살이 익을 동안 지수와 석현은 태하에게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물었다.

태하는 미국에 가기 전 완벽하게 영어를 구사하지 못해 어려움이 많았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에이전시에 있는 다른 모델들보다 경력이 짧아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하루에 세 시간 이상을 자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모두 태하의 말에 집중하느라 삼겹살이 익는 줄도 몰랐다.

아영은 노릇하게 구워진 삼겹살을 먹기 좋게 잘랐다.

“먹으면서 말해.”

“어머, 언제 다 익었대?”

“그러게. 진짜 맛있겠다.”

아영의 말에 지수와 석현이 눈을 반짝이며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러더니 삼겹살을 맛보고는 맛있다는 말을 연발했다.

수인 역시 점심을 거른 터라 허기가 졌는지 상추에 고기를 큼지막하게 싸서 먹었다.

작은 입으로 야무지게 먹는 모습을 보자 아영은 안 먹어도 배가 부르는 것 같았다.

“넌 안 먹어?”

그녀가 삼겹살을 굽기만 하고 먹지를 않자 태하가 불쑥 물었다.

“아, 난 천천히 먹으려고.”

아영은 밥 생각이 없다고 하면 괜히 신경 쓰일 것 같아 돌려 말했다.

그러나 태하는 그녀의 말을 곧이듣지 않은 듯했다. 집게와 가위를 빼앗아 간 걸 보면.

“내가 할게.”

“아니…….”

“너 아침도 안 먹었잖아.”

날 걱정해 주는 걸까?

아영은 얼떨떨했다.

“와! 권 스타가 구워 준 삼겹살 먹어 보는 거야?”

“그래. 많이 먹어.”

갑자기 끼어든 지수의 익살스러운 말에 석현과 수인이 웃었다. 태하도 싫지 않은지 지수의 장난을 받아 주었다.

누군가 구워 준 고기를 먹기만 했을 태하는 의외로 삼겹살을 잘 구웠다.

“먹어.”

“아니, 난 괜찮…….”

“구워 준 사람 성의 생각해서라도 먹어.”

태하는 잘 익은 고기만 골라 그녀 앞접시에 담아 주었다. 아영은 계속되는 그의 친절이 낯설고 부담스러웠다.

그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수가 질투가 났는지 입술을 삐죽거렸다.

“뭐야, 지금 아영이만 챙겨 주는 거야?”

“넌 안 챙겨 줘도 잘 먹잖아.”

“난 누가 챙겨 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 거지!”

“이러면 됐지?”

지수의 말을 들은 태하는 그녀 앞접시에 삼겹살을 수북이 쌓아 주며 말했다.

지수는 아영보다 제 접시에 놓인 삼겹살이 많은 걸 보고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메바 같은 단순한 지수의 모습에 석현은 ‘노답’이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국엔 언제 돌아가는 거야?”

“이틀 뒤에.”

석현이 제 빈 잔에 소주를 따르며 묻는 말에 태하가 간결하게 답했다.

“그렇게 빨리? 오랜만에 들어왔으니 더 있다 갈 줄 알았는데.”

아쉬운 건 지수만이 아니었다. 분명 처음 마주쳤을 때는 불편했는데, 곤란할 때 여러모로 도움을 준 그가 떠난다고 하니 아영 또한 괜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일주일 뒤에 밀라노에서 쇼가 있어.”

“오, 역시. 권 스타.”

석현이 엄지를 치켜세우자 태하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렇게 세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해외여행 하는 기분일 것 같은데. 어때?”

“여행보다는 출장 다니는 기분에 가까워. 쇼 직전까지 긴장의 연속이거든.”

“듣고 보니 모델도 쉬운 일이 아니구나.”

옷만 입고 워킹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수인은 제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혹시 같이 무대에 선 여자 모델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었어?”

“글쎄.”

“사귄 여자는?”

지수의 기습 질문에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음료수 잔에 서린 물방울만 만지고 있던 아영의 손길이 우뚝 멈췄다.

“야, 당연히 있었겠지. 눈앞에 예쁜 여자들이 왔다 갔다 하는데 없을 수가 있나. 되레 5년 동안 없는 게 이상하지. 안 그래?”

“그, 그치?”

찬물을 끼얹은 석현의 말에 지수도 수긍했는지 풀 죽은 얼굴이 되었다.

아영은 태하의 연애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재력가의 아들인 데다 세계적인 모델인 그가 저처럼 돈 버느라 연애할 시간이 없었을 리는 없을 테고. 아마 그의 능력과 외모라면 수십 번은 하고도 남았으리라.

“없었어.”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었다는 거야? 사귄 여자가 없었다는 거야?”

“둘 다.”

“뭐? 그게 정말이야?”

마치 제 얘기가 아닌 것처럼 무미건조한 태하의 말에 지수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아영 역시 믿기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혹시 사귀는 사람이 있는데 기사에 날까 봐 비밀로 하는 건 아닐까? 아니면 너무 많아서 우리 앞에서 관리하는 걸 수도 있었다.

이유야 모르지만. 암튼 그만큼 그의 얘기는 현실성이 떨어졌다.

“말도 안 돼! 너보다 안 생긴 나도 그동안 세 명이랑 사귀었는데?”

“내가 연애 안 한 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석현 또한 믿지 않는 눈치였다. 되레 태하는 놀란 얼굴의 친구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당연하지. 네 그 잘난 얼굴로 손가락 까딱만 해도 넘어올 여자가 한 트럭일 텐데 그동안 아무와도 사귄 적이 없다니. 아니면 너 혹시…… 무슨 문제 있는 건 아니지?”

석현이 태하의 하반신을 은근한 시선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자 태하가 어이없다는 듯 헛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없어. 그딴 거. 단지 내 눈에 들어온 여자가 없었을 뿐이야.”

“대체 눈이 얼마나 높은 거야?”

“얘기가 그렇게 되나?”

“눈이 높으니까 세계에서 난다 긴다 하는 톱모델들을 봐도 눈 하나 깜박 안 하지. 안 그래?”

태하가 그건 수긍 못 하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암튼, 진심으로 궁금하다.”

“뭐가?”

“네가 과연 어떤 여자랑 사귈지.”

“그러게. 나도 궁금하다.”

태하의 시선이 스치듯 맞은편 아영에게 향했다.

RRRRR. RRRRR. RRRRR.

그때 태하의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둔 태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액정 화면을 확인한 그의 미간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한 태하는 핸드폰을 들고 식당 밖으로 나갔다.

태하가 나간 뒤 넷만 남게 되자 지수가 물었다.

“권태하 진짜 만나는 여자 없었을까?”

“그렇다잖아.”

수인이 듣고도 뭘 또 묻냐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지수가 태하가 나간 출입구를 힐끗 쳐다본 뒤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게이는 아니겠지?”

“뭐?”

“생각해 봐. 고등학교 때 권태하 좋다고 쫓아다닌 여자애들 엄청 많았잖아. 그런데 거들떠도 안 봤잖아. 안 그래?”

“듣고 보니 그러네.”

“분명 우리가 모르는 뭔가 있는 게 분명해. 그러지 않고서야 저 얼굴에 저 몸매에 만나는 여자가 없다는 게 말이 돼?”

지수가 수상쩍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있긴 뭐가 있어? 괜히 멀쩡한 사람 의심하지 말고 오빠한테 술이나 따라 봐.”

지수의 얘기에 석현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오빠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생일은 너보다 내가 더 빠르거든!”

“그깟 일주일 차이 가지고 생색은.”

“그깟 일주일이라니! 그 일주일 동안 내가 먹은 분유량이 얼만데!”

“그렇게 따지면 내가 너보다 분유는 더 많이 먹었거든!”

“야! 둘 다 그만해! 유치해서 못 들어 주겠네.”

지수와 석현의 투덕거림을 옆에서 보고 있던 수인이 참다못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지수와 석현은 말이 아닌 눈으로 싸웠다.

때마침 통화가 끝난 태하가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미안하지만 먼저 가 봐야겠다.”

“왜? 무슨 일 있어?”

자리로 돌아온 태하가 말에 석현이 놀라 물었다.

“아버지가 얼굴 좀 보자고 하시네.”

“뭐야? 본가에서 지내는 거 아니었어?”

“왔다 갔다 하기 불편해서 호텔에서 지냈거든.”

태하가 말한 이유가 석연치 않았지만 석현은 묻지는 않았다.

“미국 가기 전에 또 보긴 힘들겠지?”

“아마도. 출국 전날까지 촬영이거든.”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해야겠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가끔 연락은 하고 지내자.”

“그래.”

태하가 석현이 내민 손을 잡으며 말했다.

“권태하, 내 번호 저장했지? 미국 가서도 꼭 연락해야 해!”

“야, 푼수 짓 그만해.”

“내가 뭘─.”

지수의 다급한 외침에 옆에 있던 수인이 눈치를 줬다. 그러자 지수가 억울하다는 듯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옅게 웃던 태하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아영에게 향했다.

내내 앞에 쌓아 놓은 고기와 눈싸움이라도 하듯 고개도 들지 않던 그녀가 저를 쳐다보고 있자 태하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마음 잘 추스르길 바라.”

“그럴게. 와 줘서 고마웠어.”

태하는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지만 이내 마음이 바뀌었는지 ‘갈게’라는 짤막한 인사와 그대로 돌아섰다.

아영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자 알 수 없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이상했다.

***

아영은 잠이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동안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 것인지 씻지도 못하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시끄러운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

무시하고 다시 자려고 했지만 이미 잠은 달아난 뒤였다.

아영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여전히 시끄럽게 울리고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 화면에 뜬 익숙한 이름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놀란 심장도 덩달아 뛰었다. 진혁이었다.

장례식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그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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