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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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섭은 상주석에 앉길 거절했다.

이유를 묻는 아영에게 진섭은 순옥이 미혼모라는 사실을 조문객 중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이제야 나타나 남편 노릇 한다고 그 자리에 앉는다면 분명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게 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욕먹는 건 상관없지만 저로 인해 그녀와 순옥이 욕먹는 건 참을 수 없다며 눈물을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석현이 하고 있던 조의금 관리를 자신이 하겠다고 나섰다.

아영은 순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돈 관리는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 해도 맡기는 게 아니라고 정색하면서 가족인 자신이 하겠다고 하니 말릴 수가 없었다.

이제야 왜 진섭이 그토록 그 자리에 앉으려고 했는지, 왜 새벽에 자다 말고 그 앞을 서성거렸는지를 깨달았다.

아영은 마치 상복 치맛자락이 진섭의 멱살이라도 된 듯 움켜쥐었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 마디가 하얘지고 부들부들 떨렸다.

그때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영은 제발 자신에게 오는 소리가 아니길 바랐다. 지금 이 꼴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이 무심하게도 구두 소리가 그녀 앞에서 멈췄다.

내리깐 그녀의 시선 끝에 먼지 하나 없는 깨끗한 구두코가 보였다.

그 구두가 이탈리아 최고급 수제화라는 걸 깨달은 순간 아영은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아도 구두의 주인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아영은 이 거지 같은 상황에 미친년처럼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제일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이 제 앞에 나타나서.

“이아영.”

낮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리자 그녀의 두 눈이 경련하듯 파르르 떨렸다.

떨림이 멈추지 않아 아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넘칠 듯 아슬아슬하게 차올랐던 눈물이 결국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투둑.

눈물이 떨어지자 상복이 더 짙은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제 눈물을 보고 당황한 아영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내 제 턱을 잡은 손에 의해 강제로 돌려졌다.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저를 보고 있는 태하가 보였다.

“무슨 일이야.”

“신경 쓰지 마.”

아영이 그의 손을 쳐 낸 뒤 두 볼에 흘린 눈물 자국을 서둘러 닦았다. 그러고는 힘이 풀린 두 다리에 억지로 힘을 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는지 일어서기도 전에 발목이 꺾이고 말았다.

풀썩 주저앉기 직전 태하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휘어 감았다.

“이러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발목이 꺾인 것뿐이야.”

아영은 엉망으로 일그러졌을 제 얼굴을 감추며 그를 밀어냈다. 하지만 단단한 그의 가슴은 벽이라도 된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영은 번번이 제가 난처할 때마다 나타나는 그가 전혀 고맙지 않았다. 되레 원망스러웠다. 저의 못난 꼴만 보이는 것 같아서.

“놔줘.”

“인대가 늘어났을 수도 있어.”

그의 말처럼 꺾인 발목에 힘을 주자 찌릿한 통증이 일었지만 못 서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던 이유부터 말해.”

그녀가 말해 주기 전까지는 놔주지 않겠다는 듯 태하가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에게 잡힌 허리가 옥죄어 오자 아영이 움찔거렸다. 태하는 다시 한번 눈빛으로 종용했다.

집요한 그에게 벗어날 방법은 없어 보였다. 이유를 말하는 것밖에는.

“잠깐 현기증 나서…… 앉아 있었을 뿐이야.”

아영은 생각나는 대로 둘러댔다. 하지만 그는 전혀 믿는 것 같지 않았다. 저를 향한 그의 눈빛이 가늘어지는 걸 보면.

“너 이러는 거, 아까 찾으러 간다고 했던 사람 때문이지.”

말투는 물어보는 어투였지만 표정은 확신에 차 있었다.

뭘 알고 하는 말일까?

“아니.”

하지만 단호한 대답과는 다르게 그녀의 눈빛은 바람처럼 흔들렸다.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태하가 나직하게 덧붙였다.

“다 들었어.”

“……뭘?”

아영은 묻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불안이 스멀스멀 기어오르자 아영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 아버지가 찾아왔다는 얘기.”

커다래진 눈이, 다급히 들이켠 숨이, 그리고 딱딱하게 경직된 그녀의 표정이 그의 얘기가 맞는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감출 사이도 없이 드러난 제 표정에 더는 숨길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아영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알았어?”

“우연히 석현이와 지수가 하는 얘기 들었어.”

아영은 다 알고 왔으면서 제 앞에서 모른 척 묻는 그가 괘씸하고 미웠다.

“아버지가 찾아온 건 맞지만 조의금과는 상관없는 일이야.”

“조의금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헉. 조의금에 대해서는 몰랐던 거야?’

태하의 표정에 뜨악함이 스치자 그제야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누가 조의금에 손이라도 댔어?”

“네가 상관할 일 아니야.”

그녀의 표정에서 뭔가 일이 있었음을 눈치챈 그가 다그치듯 캐물었다.

하지만 그것까지 그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영은 재빨리 표정을 감추며 차갑게 내뱉었다.

“혹시 조의금에 손댄 사람이 네 아버…….”

RRRRR. RRRRR. RRRRR.

때마침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그의 말이 잘려 나갔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던 아영은 그 전화가 구세주처럼 느껴졌다.

“놔줘.”

그녀의 말에 태하는 순순히 제 손을 놔주었다. 아영은 그에게 몸을 반쯤 비튼 뒤 액정 화면을 확인했다.

금강 장례식장.

아영은 떨리는 숨을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301호 이아영 상주님 되시죠.]

“네. 그런데요.”

[금강 장례식장인데요. 9시에 나가시기 전까지 장례비 결제 부탁드립니다.]

아영은 잠시 잊고 있던 현실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금액이 얼마인가요?”

[오늘까지 593만 원입니다.]

“아, 알겠습니다.”

예상보다 큰 금액에 아영은 터지려는 신음을 가까스로 삼키며 대답했다.

전화를 끊은 그녀의 손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조의금 들어온 돈으로 장례비를 해결할 생각이었던 아영은 순간 머릿속이 암전이라도 된 듯 암담해졌다. 당장 장례비를 낼 돈이 그녀의 수중에 없었기 때문이다.

월급 받으면 절반은 학자금 대출금으로 나가고, 나머지 절반으로 전세 대출금과 제 생활비를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부족하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로 빠듯한 생활이었다. 그러다 보니 저축할 돈도 없었다.

그리고 불필요한 지출을 하지 않기 위해 교통카드 이외에는 현금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한도가 최소 금액으로 설정되어 있어 신용카드로 긁을 수도 없었다.

수인이에게 부탁해 볼까?

아영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대출까지 받아 이사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아니면 석현이나 지수?

거기까지 떠올린 아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석현은 정년으로 퇴임하신 아버지를 대신해 위암에 걸리신 엄마의 병원비를 대느라 허덕이고 있었고, 지수는 명품을 좋아해 월급 대부분을 쏟아부었다. 그것도 모자라 대출까지 받아서 산다는 얘길 수인에게 전해 들은 기억이 났다.

‘어쩌지? 당장 그 큰돈을 마련할 방법이…….’

사채.

그때 그녀의 뇌리에 스치는 단어에 아영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사채가 얼마나 무서운지 순옥을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녀였지만 지금 당장 장례비를 해결할 방법이 그것밖에는 없었다.

“내가 내 줄게.”

“뭐?”

갑자기 툭 던진 태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아영이 그를 돌아보았다.

“누가 조의금 갖고 튀는 바람에 장례비 낼 돈 없어서 곤란하잖아. 그러니 내가 장례비 대신 내 주겠다고.”

이미 그녀의 통화 내용만으로 상황을 전부 파악했는지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아영은 그에게 모든 걸 들켜 버렸다는 사실이 비참하고 창피했다. 그래서 객기를 부렸다.

“필요 없어.”

“지금 자존심 챙길 상황 아니지 않나?”

비수처럼 날아든 그의 말에 그녀의 표정이 차갑게 경직되었다.

그의 말처럼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당장 장례비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녀의 엄마는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된다.

살아생전 고생만 했던 엄마를 죽어서까지 고생시킬 순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그의 손을 무턱대고 덥석 잡을 수도 없었다.

썩은 동아줄일 수도 있었으니까.

“갑자기 도와주겠다는 이유가 뭐야?”

“별 뜻 없어. 우연히 네가 곤경에 처한 걸 알게 됐고, 마침 내게 그만한 돈이 있어서 도와주겠다는 것뿐이야.”

정말 그게 다일까?

서로 친하지 않았던 고등학교 동창생을 5년 만에 만났는데 장례비 없다는 소리에 오백만 원이 넘는 돈을 선뜻 대신 내주겠다는 친구가 과연 몇이나 될까?

제 생각엔 한 명도 없을 것 같았다. 다른 사심이 있다면 모를까.

그녀의 얼굴에서 의심이 걷히지 않자 태하가 덧붙였다.

“혹시 내가 그 핑계로 너한테 허튼수작 부릴까 봐 걱정하는 거면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귀찮을 정도로 내 주위에 여자들이 차고 넘치거든. 고로 너한테까지 손댈 이유가 없다는 소리야.”

아영은 그의 말에 안심해야 했지만 왜인지 모르게 기분이 더 나빠졌다. 마치 저는 그가 원하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것 같아서.

“정 찝찝하면 5년 전 너한테 멋대로 키스한 대가라고 생각하든지.”

아영은 어이없어 헛웃음을 터트렸다.

“네 키스가 그렇게 값비싼지 몰랐네.”

“내 키스가 비싼 게 아니라 네 입술이 비싼 거야.”

그녀의 비아냥거림에도 태하는 태연하게 받아쳤다. 그러고 나서 지갑에서 블랙 카드를 꺼내 건넸다. 말로만 듣던 무제한 카드였다.

“결제는 이걸로 하면 돼.”

“이런 거 아무한테나 줘도 되는 거야? 내가 더 긁으면 어쩌려고.”

“상관없어.”

무슨 뜻일까?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일까? 아니면 저는 더 긁을 위인이 못 된다는 뜻일까?

아영은 한도 없는 카드를 거리낌 없이 내미는 그를 보자 속이 뒤틀렸다.

그래. 권태하한테 돈 오백은 우스울 거다. 그러니 못 받을 이유가 없다.

더구나 지난날 제 첫 키스를 훔친 대가라면 더더욱.

아영은 저 자신을 향해 억지 명분을 내세우며 그가 건넨 카드를 받았다.

“갚을게.”

“그럴 필요 없어.”

“아니. 갚을 거야. 그러니까 계좌 번호 문자로 보내 줘.”

그녀의 고집에 태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조의금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

“그렇게 큰 금액을 받을 정도로 너와 나, 친하지 않잖아.”

그녀의 말에 태하가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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