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82)

09

그때 태하가 먼저 수인에게 인사를 건네 왔다.

“오랜만이다.”

“그래. TV에서 너 한국에 들어왔다는 얘긴 들었어.”

수인은 제가 누군지 태하가 기억이나 하는 것인지 내심 궁금했지만 지수처럼 굳이 물어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수에게 그랬듯 이름도 제대로 기억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보다 쪽팔리는 일도 없을 테니까.

“관심 가져 줘서 고맙다.”

그 말을 끝으로 태하의 시선이 아영에게 향하자 몇 마디 더 나누고 싶었던 수인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입을 다물었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라도 아는 척 좀 하자.”

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태하의 시선이 날아와 박혔다.

짧은 순간 아영의 모든 걸 스캔하듯 빠르게 훑어 내리던 그의 시선이 이내 다시 올라와 그녀를 붙들었다.

“오랜만이다. 이아영.”

“네가 올 줄은, 몰랐어.”

“반갑지 않다는 소리로 들리네.”

그녀가 빤히 쳐다보자 태하가 차게 웃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

멋대로 키스하고 말없이 떠나 버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반갑게 맞아 줄 거라 생각한 걸까?

그렇다면 그가 한참 잘못 생각한 거다. 그녀는 그가 생각한 만큼 쿨하지 못했다.

완전히 잊고 지낸 줄 알았는데, 그와 얼굴을 마주하니 일방적 키스 후 사라졌던 그를 원망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 엄마 장례식에 찾아올 만큼 너와 친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거든.”

선을 긋는 듯한 그녀의 말에 태하의 얼굴에 미세하게 균열이 갔다. 하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의 무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 난 우리가 조금은 각별한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실망이네.”

둘 사이에 뭔가 있었다는 걸 암시하는 듯한 그의 말투에 아영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설마, 친하지 않았다고 말해서 지금 복수하는 거야?

“뭐야? 각별한 사이라니. 둘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태하의 말에 호기심이 발동한 지수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없었어. 그런 거.”

“권태하, 정말이야?”

아영은 지수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전에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지수가 자신이 아닌 태하에게 확인하듯 되묻자 아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아영이 아니라면 아닌 거겠지.”

그녀의 눈빛에서 초조함을 읽은 것인지 태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마치 제 착각이었다는 듯이.

“에이. 난 또. 우리 모르게 둘이 사귄 줄 알았잖아.”

지수는 실망한 듯한 말투였지만 내심 한시름 놓은 표정이었다.

“김지수,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고 태하 놔줘. 절하고 오게.”

“아, 맞다.”

수인이 태하 곁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지수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지수가 아쉬운 듯 옆으로 비켜섰다.

아영은 그가 그냥 돌아가 주길 바랐지만 저보다 먼저 빈소 쪽으로 걸어가고 있어 붙잡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조용히 그를 뒤따라간 아영은 두 손을 마주 잡고 섰다.

빈소 앞에 선 태하는 슈트를 정리한 뒤 절을 하기 전 순옥의 영정 사진을 쳐다보았다. 그러곤 이내 그녀에게 시선이 닿았다.

아영은 그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닮았다고 생각했으리라.

죽은 순옥과 아영의 얼굴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엄마와 자식 관계이니 당연한 얘기겠지만 밖에 나갈 때마다 그런 얘길 듣는 게 아영은 너무나 싫었다. 엄마와 닮았다고 하면 저도 엄마 같은 인생을 살 것 같아서.

그래서 고등학교 때부터는 갖은 핑계를 대며 엄마와 함께 외출하기를 피했다.

그걸 눈치챘는지 어느 날 순옥이 제가 창피하냐고 물었다. 아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날 술에 잔뜩 취한 순옥은 ‘그 아비에 그 딸이라더니, 이젠 너까지 날 창피해하는구나’라며 밤새 주정을 부렸다.

그날 아영은 끝내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 그 사실조차 순옥에겐 상처가 될 걸 알았기에.

다시 순옥의 영정 사진으로 고개를 돌린 태하가 흐트러짐 없이 반듯한 자세로 향에 불을 붙인 다음 향로에 꽂았다. 그리고 천천히 절을 올렸다.

아영은 그 일련의 모습들이 현실 같지 않았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이질감이 느껴졌다.

다시 자리로 돌아온 태하가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아영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내리깐 시선 사이로 그가 절을 하기 위한 자세를 갖추자 아영 역시 몸가짐을 바로 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맞절했다.

절이 끝나고 마주 선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하면서도 팽팽한 공기가 흘렀다. 아영은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다는 압박감에 먼저 입을 열었다.

“바쁠 텐데 와 줘서 고마워.”

“친구로서 당연히 와야지.”

아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를 친구라고 생각했다면 5년 전 그렇게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조심히 가.”

“절 끝나자마자 내쫓다니. 너무 야박하네.”

“육개장이라도 먹을래? 먹겠다면 차려 주고.”

아영은 그가 먹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물었다.

“왜 그렇게 날 못 보내서 안달이야?”

정말 몰라서 묻는 걸까? 아니면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걸까?

아영은 의도가 궁금했지만 그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내일 촬영 있는 거 아니었어?”

“맞아. 하지만 오후에 있어서 급할 건 없어.”

바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그의 뉘앙스에 아영은 더는 돌려 말하지 않기로 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너와 살갑게 마주 앉아서 얘기 나눌 기분 아니야.”

“혹시 졸업식 때 너한테 키스했던 일 때문에 그래?”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지레 찔린 아영의 시선이 빠르게 밖에 있는 친구들에게 향했다. 다행히 세 사람은 무슨 얘길 하는지 이쪽은 신경도 쓰지 않고 저들끼리 떠들고 있었다.

안도한 아영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 향했지만 뾰족하게 날이 서 있었다.

“말조심해.”

“그 이유가 맞느냐고 물었어.”

그녀의 경고에도 태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차 물었다. 그녀가 사실을 말할 때까지 돌아가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쳐다보았다.

“그렇다고 하면 그만 돌아가 줄래?”

아영은 돌려 말했지만 태하는 바로 눈치챈 듯했다. 뜻밖이라는 얼굴로 쳐다보는 걸 보면.

“그 일이 지금까지 네게 상처가 될 줄은 몰랐어.”

지금은 그때보다 마음의 상처가 희미해지긴 했다. 하지만 그와 다시 마주치니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 그가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이제 와서 이런 말 염치 없는 거 아는데. 그때 일 용서해 줄 수 없을까?”

그가 정중하게 사과했다. 제게 사과할 줄은 몰랐던 아영은 당황스러웠다.

“너와 사귀다 헤어진 것도 아닌데 용서하고 말 것도 없어. 단지 널 보면 내 마음이 불편해서 그래.”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

“아마도.”

단호한 그녀의 대꾸에 그의 얼굴에 씁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미안하다. 눈치 없이 찾아와서.”

“…….”

아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의 입매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불청객은 그만 가 볼게.”

그녀의 불청객 취급에 기분이 나빴는지 아니면 원래 인사만 하고 갈 생각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말을 끝으로 태하는 몸을 돌렸다.

‘정신 차려. 이아영.’

저를 보고 반가워했다고 해서, 바쁜 일정에도 엄마의 장례식장에 찾아와 줬다고 해서 지난날 그가 제게 했던 행동을 잊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어린 시절의 치기 어린 행동이었다 하더라도.

아영은 자꾸만 그에게 향하려는 시선을 가까스로 돌렸다.

“권태하, 가게?”

출구 쪽으로 걸어가는 태하를 보고 석현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지수와 수인도 뒤따라 나왔다. 마지못해 돌아선 태하가 입을 열었다.

“내일 촬영이 있어서 그만 가 봐야 할 것 같아.”

“뭐야. 같이 술 한잔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심 태하와 술 한잔할 생각에 마음이 잔뜩 부풀어 있던 지수의 얼굴이 실망으로 번졌다.

“나중에 연락할게.”

“정말? 그런데 너 내 연락처 모르잖아.”

“석현이 통해서 연락할게.”

“그러지 말고 내 번호 알려 줄 테니까 나한테 해. 석현이 바빠서 전화 잘 안 받거든.”

지수는 어떻게든 태하의 연락처를 알아내기 위해 석현을 팔았다.

“내가 언제?”

지수의 뻔뻔한 거짓말에 석현이 어이없다는 듯 따져 물었다.

“너 내가 전화할 때마다 잘 안 받잖아.”

“그건 네가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니까 귀찮아서 안 받은 거지.”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일부러 안 받은 거라고?”

지수가 눈을 희번덕 뜨며 물었다.

“그러니까 적당히 해야지. 넌 가끔 사람 질리게 하는 구석이 있어.”

“야! 정석현! 너 이리 와!”

흥분한 지수가 달려들자 석현이 피했다. 하지만 이미 눈이 돌아간 지수는 태하가 보고 있다는 것도, 지금 있는 곳이 장례식장인 것도 잊은 채 석현에게 달려들었다.

“또 시작이다.”

두 사람의 실랑이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수인이 태하를 돌아보았다.

“뒷수습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그만 가 봐.”

“그래. 부탁한다.”

마지막 인사를 건네던 태하의 시선이 슬쩍 아영에게 향했다. 하지만 끝까지 제 쪽은 쳐다보지 않는 그녀의 냉정함에 태하의 눈빛에 그늘이 졌다.

***

장례식 둘째 날. 처음 보는 중년 남자가 장례식장 입구에 불쑥 나타났다.

내부를 휘둘러보던 중년 남자는 재단 위에 올려진 순옥의 영정 사진을 보더니 눈빛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한 남자가 혼자 빈소를 지키고 있는 아영을 쳐다보았다.

아영과 눈이 마주치자 입구에 서 있던 남자가 신발을 벗고 들어왔다.

검은색 양복 차림에 희끗희끗한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긴 남자가 아영의 앞에 섰다.

“네가 아영이냐?”

“누구세요?”

저를 아는 듯한 남자의 말투에 아영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

분명 오늘 처음 본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본 것 같은 이 익숙함은 뭐지? 무엇보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많이 컸구나.”

남자는 누구냐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 대신 아련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저희 엄마랑 아는 사이세요?”

“그래.”

“직장 동료는 아니신 것 같은데.”

남자는 더 말하지 않았다. 남자의 정체가 궁금했던 아영이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운을 떼자 그제야 결심이 선 듯 천천히 입을 뗐다.

“내가 네…… 아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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