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너 회사에는 연락했어?”
“응.”
“어머니 쪽은?”
아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누구에게 어떻게 연락해야 할지 몰랐다.
혹시나 해 순옥의 핸드폰을 열어 보았지만 이름으로 저장된 게 하나도 없었다.
통화 목록에 번호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연락처로 무작정 전화를 걸거나 문자를 남길 수도 없어 아영은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경찰에 신고한 사람이 어머니 직장 동료라고 했지?”
아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에 전해 듣기로는, 순옥이 연락 없이 이틀 동안 무단결근하자 동료였던 아주머니가 집으로 찾아갔다고 했다.
초인종을 눌러도 인기척이 없길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이상하게 벨소리는 들리는데 받지를 않았다고. 수상히 여긴 아주머니가 경찰서에 신고하면서 엄마의 죽음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럼 알아서 연락이 갔겠네.”
“아마 올 사람, 거의 없을 거야.”
“그거야 모르지. 아 참, 석현이하고 지수한테는 내가 연락했어.”
석현과 지수는 고등학교 때 수인을 통해 알게 된 친구들이다.
가끔 수인과 함께 어울리긴 했지만 그녀가 따로 연락해서 만난 적은 없기에 이런 연락을 해도 되나 싶었다.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부담은커녕 오히려 연락 안 하면 더 섭섭해할 애들이야.”
수인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아영의 손등을 토닥였다.
저녁 7시쯤 되자 장례식장 입구가 떠들썩하더니 열댓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아영은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 있던 수인도 따라 일어났다.
“저 아가씨가 임 씨 딸인가 보고만.”
“그러게. 임 씨랑 눈매가 똑 닮았네.”
무리 중 머리가 하얗게 센 아저씨의 말에 다른 아저씨가 맞장구쳤다. 아영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아는 척을 하자 난감했다.
“혹시 어디서 오셨…….”
“우린 아가씨 엄마랑 봉제 공장 같이 다닌 사람들이여.”
“아, 안녕하세요.”
뒤늦은 인사에 아영이 미안한 표정을 짓자 아주머니는 괜찮다는 듯 등을 토닥였다.
“생전에 자기 딸 공부도 잘하고 이쁘다고 그렇게 자랑 많이 하더니……. 이제 보니 자랑할 만했네.”
엄마가?
제가 아는 엄마와 아줌마가 말하는 엄마가 같은 사람일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항상 저만 보면 사사건건 트집을 잡던 엄마였으니까.
아영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절을 마친 아줌마 아저씨들은 테이블에 나눠서 앉았다.
아줌마들은 한 명뿐인 상조 직원을 기다리지 못하고 나서서 상을 차렸고, 아저씨들은 뭐가 그리 급한지 앉자마자 소주병부터 깠다.
그 뒤로 그녀의 회사 직원들과 어떻게 연락이 닿은 건지 순옥의 친구들까지 오면서 절간처럼 조용했던 장례식장이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10시가 넘어가자 장례식장에는 화투 치는 아저씨들만 남았다.
“이 시간에 올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 좀 쉬어.”
“난 괜찮으니까 너나 쉬어.”
“암튼, 고집은.”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그때 수인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아, 애들 왔나 보다. 잠깐 나갔다 올게.”
“응.”
액정 화면을 확인한 수인이 그녀에게 말했다. 아영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자리에서 일어난 수인이 신발을 신으며 전화를 받았다.
“도착했어? 아, 그래? 내가 지금 그쪽으로 갈게.”
혼자 남은 아영은 아까부터 저리던 다리를 티 나지 않게 주물렀다. 쭉 펴면 괜찮을 테지만 그럴 수는 없어 누르는 손에 힘을 주었다.
막 반대편 다리도 주무르려는 찰나 발소리가 들렸다.
왔나 보다.
“아영아, 애들 왔어!”
“와 줘서 고마워.”
아영이 친구들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맙기는. 당연히 와야지.”
“괜찮아?”
아영의 인사에 석현은 퇴근하고 바로 오는 길인지 가방을 한쪽으로 내려놓았다. 눈시울이 붉어진 지수는 측은한 얼굴로 그녀의 안색을 신경 썼다. 아영이 흐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짤막한 인사가 오간 뒤 교회에 다니는 지수는 기도하고 석현은 절을 올렸다.
“이쪽으로 와. 세팅해 놨으니까.”
아영과 맞절까지 끝나자 수인이 미리 차려 놓은 테이블로 그들을 안내했다. 네 사람은 오랜만에 둘러앉았다.
“어머니 집 정리할 때 불러. 혼자 고생하지 말고.”
“그래. 나도 도울게.”
석현이 반찬으로 나온 호박전을 한입 베어 물며 말했다. 그러자 목이 말랐는지 맥주 한 잔을 단숨에 비운 지수가 옆에서 맞장구쳤다.
아영은 석현과 지수의 말이 든든하고 고마웠지만, 남에게 신세 지는 게 싫어 ‘그럴게’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영이가 전화할 리는 없고, 정리할 때 되면 내가 전화할게.”
수인의 말에 지수가 서운하다는 듯 아영을 쳐다보았다.
“아영이 넌 우리랑 7년째인데 아직도 우리가 어렵니?”
“어렵다기보다는…….”
“뭘 따져. 아영이 성격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영이 난처한 얼굴로 말끝을 흐리자 수인이 나섰다.
“아니, 따지는 게 아니라 서운해서 그러지.”
“서운할 게 뭐가 있어. 친구랍시고 생각 없이 이것저것 부탁하는 것보다 낫지. 안 그래?”
“그야 그렇지만…….”
“자자. 누구든 연락하기로 하고 일단 한잔하자.”
지수와 수인의 언성이 올라가자 석현이 중재에 나섰다. 다행히 술이 들어가자 두 사람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너희 내가 낮에 누구 만났는지 알면 까무러칠걸?”
“왜 네가 울고불고 매달리던 첫사랑이라도 만났어?”
석현의 말에 지수가 오징어채를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야,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석현이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 정색했다.
“그러니까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누굴 만났는데?”
“권태하 만났어.”
“뭐? 고등학교 때 우리의 프린스였던 그 권태하?”
“그래. 그 권태하.”
지수의 목소리가 3옥타브나 올라갔다. 놀란 건 지수만이 아니었다. 권태하의 이름을 듣는 순간 아영의 심장이 진동하듯 떨렸다.
가끔 그녀의 기억 속에 파고들어 와 마음을 어지럽히던 그였다.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데? 그동안 너랑 연락하고 지냈던 거야? 그런데 왜 나한텐 말 안 했어?”
“야, 무슨 랩 하냐? 하나씩 물어.”
“그러니까 빨리 말해. 현기증 난단 말이야.”
“그래. 지수 기다리다 숨넘어가겠다.”
지수의 호들갑에 석현이 못 말린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수인도 내심 궁금했는지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아영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석현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우리 회사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연히 만났어.”
“권태하가 너희 회사에? 왜?”
두 여자의 재촉을 이기지 못한 석현이 입을 열자 지수가 의외라는 듯 반문했다.
“이번에 우리 회사 신차 나온 거 광고 모델 태하랑 계약했대. 그래서 그거 광고 촬영하러 한국에 잠깐 들어온 모양이야.”
“대박! 해외에서도 잘나간다더니 권태하 진짜 장난 없다.”
지수가 부러움 가득 찬 눈으로 말했다.
“저번에 연예 정보 프로그램 보니까 세계 남성 모델 TOP10에 동양인 최초로 들어갔다고 난리던데.”
“맞아! 맞아! 그거 나도 봤어. 고등학교 때 나랑 친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다 뿌듯하더라니까.”
수인의 말에 지수가 손뼉까지 치며 맞장구쳤다.
“권태하가 그 정도야?”
“넌 술만 마실 줄 알지. 아는 게 뭐 있니?”
석현이 그 정도까지인 줄은 몰랐다는 얼굴로 되묻자 지수가 면박을 주었다.
“그러는 넌? 남자한테 맨날 차이는 주제에.”
“정석현! 너 말 다 했어?”
지수가 눈을 세모꼴로 치떴다.
“아니. 다 못 했는데?”
“이게 진짜!”
“둘 다 그만해. 남의 장례식장에 와서 무슨 추태야.”
“……미안해.”
석현과 지수가 얼굴까지 붉히며 언성을 높이자 보다 못한 수인이 나섰다. 그제야 자신들이 어디 있는지 깨달은 두 사람은 아영에게 사과했다.
아영은 괜찮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권태하 생각뿐이었던 터라 두 사람이 왜 저에게 사과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 뒤 석현과 지수는 서로를 노려보며 술만 마셨다.
막 세 번째 소주병을 따기 시작했을 때였다.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 소리에 입구 쪽을 향해 앉아 있던 지수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장례식장에 들어선 사람을 보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권태하?”
“헉.”
그 소리에 놀란 석현과 수인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곧이어 수인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혹시 지수가 잘못 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던 아영은 당황하고 말았다.
“어, 왔어?”
“다들 있었네.”
자리에서 일어난 석현이 다분히 놀란 얼굴을 감추며 태하에게 다가갔다.
벗은 구두를 가지런히 정리한 태하가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왔다.
아영은 제 등 뒤로 그의 나직한 저음이 들리자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정말 그였다. 그가 맞았다. 5년이 지났지만 그의 목소리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권태하 완전 반갑다! 혹시 나 누군지 기억해?”
“수지, 였나?”
“내가 연예인 수지랑 닮아서 착각하는 것 같은데 지수야, 김지수. 2학년 때 우리 같은 반이었잖아.”
지수가 어서 기억을 떠올려 보라는 듯 두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이렇다 할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민망했는지 재빨리 말을 돌렸다.
“한국에 왔다는 건 들었는데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아는 애들 거의 없는데?”
“왜? 내가 오면 안 되는 건가?”
태하는 아직도 등을 보인 채 꼼짝 않고 있는 아영을 흘끗 쳐다보며 되물었다. 그건 지수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아영에게 묻는 거였다.
하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지수는 당황했는지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아니, 난 그런 뜻이 아니라, 아영이가 주위에 알리는 거 싫다고 해서 친구 중에 우리만 왔거든. 그런데 넌 어떻게 알고 왔나 해서…….”
“내가 말했어.”
그때 석현이 툭 나섰다.
“뭐? 네가?”
지수가 뜨악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아까는 그런 말 없었잖아?’라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석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너랑 통화 중일 때 태하도 옆에 있었거든.”
석현은 일부러 말하려고 한 게 아니라는 뉘앙스로 말했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지수가 태하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그랬구나. 암튼, 와 줘서 고마워.”
“야, 왜 네가 고마워하냐? 당사자는 가만히 있는데.”
고맙다는 지수의 말에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수인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니, 난 친구로서 고맙다는 뜻이지.”
수인의 지적에 지수가 민망한 얼굴로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