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그냥 받고 싶은 거 말해.”
그녀가 가진 거라곤 주머니에 있는 꼬깃꼬깃하게 접힌 2만 원이 전부였다. 그런 제 사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아영은 일부러 귀찮다는 투로 말했다.
“내가 뭘 말할 줄 알고?”
“턱없이 비싼 건 안 돼.”
사실 아영은 그가 뭘 말하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오늘 이후로 그와 만날 일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크게 부담 갖지 않기로 했다.
태하는 그런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영은 제게 박혀 있는 태하의 시선이 거북했지만 덤덤한 척 응시했다. 그러나 책상 아래 마주 잡은 두 손은 초조함에 잘게 떨리고 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
그때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묵직한 걸 보니 학생은 아닌 것 같았다.
“누가 오고 있나 봐.”
“잠깐만.”
아영은 선생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숨죽이며 말했다. 태하도 발소리를 들었는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조용히 뒷문으로 향했다.
“젠장.”
“누군데 그래?”
복도를 살피던 태하가 나지막한 욕설을 내뱉었다. 아영은 대체 누구길래 태하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했다.
“일단, 숨자.”
“뭐? 흡!”
발소리를 죽이며 빠른 속도로 걸어오던 태하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아영의 두 눈이 빠르게 깜박였다.
“미안.”
태하는 빠르게 사과의 말을 내뱉고는 그녀를 교실 뒤쪽으로 데려갔다. 사물함과 창가 사이에 비어 있는 공간으로 그녀를 밀어 넣은 뒤 자신도 몸을 숨겼다. 그런 다음 등 뒤로 커튼을 쳐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했다.
“대체 무슨 일이야?”
궁금함을 참지 못한 아영이 제 입을 틀어막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아 내리며 물었다. 그 순간 기척을 느낀 태하가 그녀의 입술에 제 검지를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쉿!”
드르륵.
때마침 누군가 교실 뒷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아영은 숨을 삼켰다.
저벅. 저벅.
곧이어 무거운 발소리가 교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잠시 멈췄다. 그리고 이내 그들이 있는 창가 쪽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겠는가.
저벅. 저벅. 저벅.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아영의 두 눈이 놀라 커졌다. 태하도 긴장했는지 그녀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소리 내지 마.’
태하는 그녀가 무슨 소리라도 낼까 봐 입 모양으로 말했다. 아영은 알아들었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벅. 저벅. 저벅.
묵직한 발소리가 그들 앞에 멈추자 아영은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그 순간 정적을 깨고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아영이 감은 눈을 번쩍 떴다.
“네. 회장님.”
처음 듣는 남자 목소리였다.
“교실에는 안 계신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짧은 통화를 마친 남자는 이내 몸을 돌려 교실 밖으로 나갔다.
아영과 태하는 남자의 발소리가 복도를 빠져나갈 때까지 숨죽이고 있었다.
“그 사람 갔나 봐.”
밖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아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런 대꾸가 없는 걸 이상하게 여긴 아영이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태하와 눈이 마주쳤다.
아영의 심장이 방망이질 쳤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그의 귀에도 들릴 것만 같았다.
그제야 아영은 밀폐된 공간에 태하와 있다는 사실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그것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맞닿은 채로. 그때부터 온몸에 열이 나기 시작했다.
아영이 이 상황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태하가 입을 열었다.
“받고 싶은 거 생각났어.”
“뭐?”
갑작스러운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아영이 반문했다.
“너한테 받고 싶은 거 생각났다고.”
“아, 그래? 일, 일단 여기서 나가…….”
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 위험을 감지한 아영이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 태하가 그녀의 턱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내가 받고 싶은 건, 네 키스야.”
그 말과 동시에 태하가 상체를 기울였다.
당황한 아영이 뒤로 물러나려는 순간 그의 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잡았다. 그러고는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그녀의 입술을 덮쳐 버렸다.
호흡과 함께 삼켜진 그녀의 입술을 태하가 지그시 누르자 맞닿은 두 사람의 입술에 더운 열기가 번졌다.
아영은 제 입술에 닿은 생소한 감촉에 놀라 마치 사고가 마비된 듯 꼼짝할 수가 없었다.
반쯤 눈을 내리깐 채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태하가 부드럽게 입술을 비벼 왔다. 그러자 말캉한 그녀의 입술이 짓눌리며 벌어졌다.
태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작은 틈을 가르고 들어갔다. 넋이 나간 것처럼 멍해 있던 아영은 그의 혀가 침입해 들어오자 깜짝 놀라 그의 혀를 질끈 깨물었다.
“읏!”
짧은 신음과 함께 태하가 떨어져 나갔다. 황급히 그를 피해 커튼 밖으로 나온 아영은 태하가 제멋대로 헤집어 놓은 입술을 손등으로 가렸다.
아영은 아직도 제 입술에 남아 있는 습한 열기를 무시하며 자신의 첫 키스를 앗아 간 태하를 노려보았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궁금했거든. 네 입술이 어떤 맛일지.”
그녀에게 뒤로 밀쳐진 태하가 제 입술에 맺힌 피를 엄지로 훑으며 말했다.
“지금 네 호기심 때문에 내 입술을 훔쳤다는 거야?”
“너무 억울해하진 마. 나도 네가 처음이니까.”
“뭐?”
RRRRR. RRRRR. RRRRR.
태연하다 못해 뻔뻔한 그의 말에 기가 막힌 아영이 막 따지려던 순간, 그의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그 소리에 두 사람을 감싸고 있던 미묘한 공기가 마치 마법이 풀린 것처럼 순식간에 어색하게 바뀌었다.
액정 화면을 확인한 태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 걸 보니 반갑지 않은 전화인 모양이다.
태하는 자신의 얼굴을 그녀에게 보여 주기 싫은지 등을 돌리고 전화를 받았다.
“네. 아버지.”
[지금 어디냐.]
“가는 중입니다.”
[잠깐이면 된다는 놈이 아비를 30분이나 기다리게 해? 당장 튀어 와!]
성격이 보통이 아닌지 버럭 지르는 소리에 놀란 아영이 움찔했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태하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삭이려는 듯 긴 숨을 내쉬었다. 그의 넓은 어깨가 천천히 올라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천천히 호흡을 정리한 태하가 몸을 돌렸다. 그는 상처를 감추듯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먼저 가 봐야겠다.”
아영은 그에게 화를 내야 할지 아니면 위로를 해 줘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아영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태하는 그녀의 화가 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씁쓸한 얼굴로 덧붙였다.
“멋대로 키스한 거 미안해. 잊어 줘.”
태하는 그 말만 내뱉고는 그녀의 대답도 듣지 않고 가 버렸다.
혼자 남은 아영은 제멋대로 제 입술을 훔치고 또 제멋대로 가 버린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그녀의 첫 키스를 도둑맞았다.
***
아영은 무슨 정신으로 집으로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멍한 건 여전했다. 누군가 제 영혼을 가져가 버린 것처럼.
팽개치듯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은 아영은 그대로 거실 한쪽에 주저앉듯 앉았다.
권태하가 갑자기 왜 내게 키스한 걸까? 설마 날 좋아하기라도 한 걸까?
도둑맞은 건 입술인데 심장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널뛰는 심장이 진정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와 했던 키스가 떠오를까 봐 눈도 감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아영은 굳어 버린 동상처럼 가만히 웅크리고 있었다.
“지금 졸업식에 안 왔다고 시위하는 거야?”
방에 불도 켜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는 그녀가 이상해 보였는지 일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 순옥이 신발을 벗다 말고 말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때까지 방이 어두워진 것도 모른 채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던 아영은 갑자기 거실이 환해지자 눈이 부셔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뒤늦게 순옥이 온 걸 눈치챈 아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왜 불도 안 켜고 청승맞게 앉아 있어?”
“깜박 졸았나 봐.”
아영이 대충 둘러댄 말에 순옥은 별 의심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생각하기도 귀찮은 것처럼 보였다.
“밥은?”
“먹었어.”
순옥이 들고 온 가방을 바닥에 툭 내려놓으며 피곤한 기색으로 물었다. 오늘도 작업할 물량이 많았는지 옷에 붙어 있던 실밥과 먼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집에 들어오기 전에 옷 좀 털고 들어오면 안 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듣지 않을 순옥이라는 걸 알기에 입을 다물었다.
“김치 좀 내와.”
순옥이 가방 안에서 소주병을 꺼냈다.
아영은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눌러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기계적인 동작으로 냉장고에서 꺼낸 김치와 젓가락 그리고 다 깨지고 마지막 남은 소주잔을 챙겨 작은 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동안 술 문제로 순옥과 수도 없이 싸웠다. 부탁도 해 보고, 울면서 매달리기도 해 보고, 무릎 꿇고 빌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순옥은 3일을 버티지 못했다.
그런 순옥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병원에 입원시켜 보려고도 했지만 순옥은 완강했다.
순옥은 씻지도 않고 소주병부터 깠다. 잔에 넘치도록 가득 소주를 따른 순옥이 그대로 들이켰다. 주름진 미간이 더 깊게 팼다.
단숨에 소주잔을 비운 순옥은 안주는 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다시 빈 잔에 소주를 가득 따랐다.
아영도 알고 있었다. 김치는 손도 대지 않을 거라는 걸.
그러면서 먹지도 않을 김치를 내오라고 한 건 제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아영은 그 꼴이 보기 싫어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쾅!
힘을 이기지 못한 오래된 문짝이 흔들렸다.
“저 버르장머리 없는 년! 어디 엄마가 있는데 방문을 쾅 닫아, 닫기를!”
거실에 혼자 남은 순옥의 입에서 대번에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년아, 그렇게 내 꼴이 보기 싫으면 당장 나가! 나도 잘난 척하는 네년 얼굴 꼴도 보기 싫으니까!”
아영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순옥은 더욱 악을 써 댔다.
이어폰을 찾은 아영은 연결 단자를 핸드폰에 꽂았다.
플레이 리스트에서 태하가 좋아한다는 곡을 선택해 볼륨을 최대치로 높였다. 고막을 찌르는 노랫소리에 순옥의 욕설이 묻혔다.
‘이제야 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