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눈이 온다.
졸업식 전 진눈깨비처럼 흩날리던 눈이 졸업식이 끝나 갈 무렵이 되자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먹구름까지 몰려오자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사진 찍느라 왁자지껄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학교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아영은 아무도 없는 텅 빈 교실에 앉아 창밖의 소란을 부러운 듯 쳐다보았다.
오늘 그녀의 엄마는 졸업식이 끝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엄마는 전날 일이 바빠 못 온다고 했다. 그런데도 아영은 그녀가 와 주길 바랐다.
초등학교 입학식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학교에 와 준 적이 없었기에 한 번쯤은 엄마의 축하를 받고 싶었다. 다른 애들처럼 예쁜 꽃다발을 들고 사진 찍고 싶었다.
너무 큰 욕심이었던 걸까?
아영은 엄마를 이해하려 애썼다. 하지만 언제나 딸보다는 일이 우선이었던 엄마였다.
그런 엄마에게 관심받고 싶어 열심히 공부했지만 돌아오는 건 칭찬이 아니라 설거지를 해 놓지 않았다는 타박뿐이었다.
그동안 쌓였던 서러움이 밀려오자 아영은 저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이아영, 이깟 일로 울지 마.’
아영은 눈물이 떨어지기 전 황급히 젖은 눈가를 훔치며 스스로 다그쳤다.
어렸을 때부터 술에 취해 우는 엄마의 모습이 보기 싫어서 넘어져 다치거나 아파도 울지 않았다. 그런데 고작 이런 일로 눈물을 보이는 자신이 아영은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다시는 기대하지 말자. 그러면 울 일도 없을 테니까.’
아영은 미련을 떨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태하!”
교실을 빠져나가려는 그때 창밖에서 들리는 익숙한 이름에 아영은 홀린 듯 창가로 다가갔다.
‘저깄다.’
그녀의 시선 끝에 있는 사람은 졸업식장을 팬미팅 현장으로 만들어 버린 권태하였다.
여학생들은 그와 마지막 졸업 사진을 찍기 위해 머리에 눈이 쌓이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줄을 서고 있었다. 한두 명이 아니라 스무 명 남짓은 되어 보였다.
평소의 권태하 성격이라면 이런 호들갑을 질색했을 테지만 부모님과 같이 있는 자리라서 그런지 묵묵히 사진을 찍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꾹 참고 있는지 입 모양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여학생들은 권태하와 투 샷을 찍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연신 꺅꺅거리며 그의 기분 따윈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아영은 그런 그들을 짜증과 부러움이 섞인 묘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권태하는 193센티 키에 숱 많은 눈썹과 쌍꺼풀 없는 짙은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한국인답지 않은 높고 반듯한 콧날 그리고 선이 살아 있는 도톰한 입술과 날렵한 턱선까지.
그의 이런 외향 때문인지 태하는 고1 때 모델 에이전시에 캐스팅되었다.
첫 데뷔를 S/S 서울 패션 위크로 시작한 그는 활동 초기에 찍었던 유명 청바지 브랜드 화보가 시선을 끌면서 그해 가장 기대되는 신인 모델로 뽑히는 등 지금까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학교에 나타날 때마다 여학생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
그럴 때면 태하는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척하거나 자는 척을 하며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대놓고 무시하는 듯한 그의 행동에 일부 여학생들은 재수 없다며 마음을 돌리기도 했지만 대부분 여학생은 그 모습마저 멋있다며 난리였다.
그때 사진을 찍다 말고 무심히 고개를 돌리던 태하의 시선이 그녀가 있는 교실로 향했다.
‘헉!’
몰래 그를 훔쳐보고 있던 아영은 저도 모르게 황급히 몸을 숙였다.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렸다.
‘날 봤을까? 아니야. 창문에 김이 서려 있어서 아마 못 봤을 거야.’
그렇게 위안하면서도 혹시 그가 자신을 봤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아영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의 시선 하나에도 안절부절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저따위를 신경 쓸 권태하도 아닌데.
그런데도 쉽사리 일어나지 못하고 쭈그려 앉아 애꿎은 실내화를 못살게 굴었다.
그냥 집에 갈걸. 그랬다면 이렇게 쪽팔릴 일도 없었을 텐데.
괜히 아무도 없는 교실에 찾아와 몰래 권태하를 훔쳐보기나 하고.
“하아.”
그녀 입에서 한숨 섞인 탄식이 흘러나왔다.
10분만 있다 가자. 그때쯤이면 권태하도 집에 가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드르륵.
갑자기 교실 뒷문이 열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아영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다 문을 연 사람이 태하라는 사실을 확인한 아영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움직임에 뒤에 있던 책상이 바닥을 긁으며 뒤로 밀려났다. 그 바람에 의자까지 넘어질 뻔해 아영은 서둘러 의자 등받이를 붙잡았다.
다행히 의자는 넘어지지 않았지만 허둥지둥한 제 모습을 그에게 들켰다는 사실이 아영은 창피해 숨고 싶었다.
그와 제대로 된 작별 인사 없이 헤어지는 게 아쉽긴 했지만 이런 상황을 원한 건 아니었다.
어수선한 소리가 사라지자 교실에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째깍. 째깍.
오늘따라 벽에 걸린 시계 초침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아영은 무슨 말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들었지만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영은 태하가 먼저 말을 꺼내 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는 먼저 입을 열 생각이 없는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기만 했다.
태하의 시선을 느낀 그녀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제 얼굴이 붉어졌다는 걸 깨달은 아영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에 반응하는 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꾹 참았다.
그동안 아영은 제 감정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노력해 왔다. 하지만 방금 제 모습은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어리숙한 여자 같았다.
그건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모습이었고, 그에게 절대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기도 했다.
“여기서 뭐 해?”
그녀를 관찰하던 태하가 툭 던지듯 물었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다기보다는 생각나는 대로 뱉은 느낌이 강했다.
내내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던 아영이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다. 태하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시선을 낚아챘다.
1초. 2초. 3초.
빨려 들어갈 듯한 그의 강한 시선을 견디지 못해 먼저 피한 건 그녀였다.
“그, 그냥 있었어.”
사실은 오지 않을 엄마를 기다렸노라고, 기다리다 네가 보이기에 몰래 훔쳐보는 중이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영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꾸며 말했다.
“혹시 누구 기다려?”
하지만 태하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곧바로 되묻는 걸 보면.
“아니!”
조금 전과 달리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곧바로 대답이 튀어나오자 그녀를 쳐다보는 태하의 시선이 깊어졌다.
“그러는 넌, 여긴 어쩐 일이야?”
아영은 그가 제 생각을 눈치챌까 봐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그러자 태하는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 뒤를 훑더니 이내 답했다.
“아, 교실에 뭐 놓고 간 게 있어서.”
“뭘?”
“있어.”
그녀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태하는 알 거 없다는 듯 교실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왔다.
저벅. 저벅.
쿵. 쿵.
점점 가까워지는 그의 발소리에 그녀의 심장도 덩달아 빨라졌다.
드륵.
곧이어 의자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필 태하의 앞자리였던 아영은 제 시선을 어지럽히는 그를 피해 돌아섰다. 하지만 그녀의 모든 신경은 뒤에 앉은 태하에게 쏠려 있었다.
1년 내내 그랬다. 그의 시선이 닿을 제 뒷모습이 신경 쓰여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매일 감았고,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도록 열심히 빗질했다.
귀찮아도 뒤에 앉은 그에게 땀 냄새가 나지 않도록 교복 두 벌을 번갈아 가며 매일 빨았으며, 항상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앉았다. 그 탓인지 가끔 허리가 뻐근하기도 했다.
“찾았다.”
그때 뒤에 있던 태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벌써 찾은 모양이다.
그가 놓고 간 게 뭔지 궁금했지만 아영은 돌아보지 않았다.
“이아영.”
아영은 갑자기 제 이름이 불리자 흠칫 놀랐다.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며 천천히 돌아보자 태하가 가만히 눈을 마주쳐 왔다.
“왜?”
“손 좀 내밀어 봐.”
“손?”
뜬금없이 손을 내밀어 보라는 말에 아영이 뜨악한 얼굴로 쳐다만 보고 있으니 태하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태하의 커다란 손이 자신의 가는 팔목을 움켜쥐자 깜짝 놀란 아영이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그 순간 그가 그녀의 손바닥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그건 놀랍게도 검정 가죽끈에 독특한 무늬의 원석이 들어간 매듭 팔찌였다.
“뭐야?”
“뭐긴. 팔찌잖아.”
아영이 팔찌와 그를 번갈아 쳐다보며 묻자 그녀에게서 손을 거둬들인 태하는 알면서 왜 묻느냐는 투로 답했다.
“그러니까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거냐고.”
“졸업 선물이라고 생각해.”
“뭐?”
아영이 의문 가득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태하가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으며 말했다.
아영은 듣고도 제 귀를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게, 태하와 자신은 이런 걸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학교 다니면서 모델 일을 병행하다 보니 그로서는 놓치는 게 많아 학급 회장이었던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자주 있었지만, 지금껏 한 번도 사적인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졸업 선물을 건네니 아영으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혹시 열성 팬한테 받은 선물을 갖기 싫어서 나한테 주는 게 아닐까?
“다른 사람한테 받은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태하가 덧붙였다.
‘아니라고?’
아영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찝찝하면 다시 주든가.”
태하는 미적지근한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팔찌를 다시 가져가려고 했다. 그러자 아영은 그가 가져가지 못하도록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녀의 모습에 태하의 한쪽 눈썹이 밀려 올라갔다.
“갖기 싫은 거 아니었어?”
“공짜니까.”
아영의 새침한 대꾸에 태하가 피식 웃더니 이내 덧붙었다.
“난 공짜라고 말한 적 없는데?”
“설마, 돈이라도 받겠다는 거야?”
당연히 그냥 주는 줄 알았던 아영은 공짜가 아니라는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돈은 됐고. 다른 거 줘.”
“다른 거 뭐?”
“뭐든. 네가 주고 싶은 거.”
태하는 뭐가 됐든 상관없다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아영은 줄 게 없었다. 졸업식이었지만 그녀의 손에는 그 흔한 꽃다발 하나도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