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82)

04

쏴아아.

차가운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자 태하는 양손을 올려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머리가 띵할 정도로 차가운 물이었지만 좀처럼 몸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제기랄.

차선책으로 선택한 냉수 샤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자 태하는 낮은 욕설을 내뱉으며 제 손을 내려트렸다.

찰박. 찰박.

물이 부딪히는 소리가 욕실 가득 울려 퍼졌다. 점점 속도가 빨라지자 소리는 더욱 커졌고, 핏줄이 돋아난 그의 팔 근육도 터질 듯 팽창했다.

그러자 차가운 공기와 그가 내뱉는 뜨거운 공기가 뒤섞였고, 샤워 부스가 뿌옇게 흐려졌다.

큭!

짧게 억눌린 신음과 함께 뜨거운 열기가 빠져나갔다.

하아. 하아.

한쪽 손으로 벽을 짚은 태하는 가슴을 들썩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여전히 그의 머리 위로 차가운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달칵.

욕실에서 나온 태하는 가운 끈을 묶으며 거실로 향했다.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 쳐다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냈다.

탁. 치이이익.

경쾌한 소리와 함께 맥주 캔이 열리자마자 입으로 가져갔다. 단숨에 하나를 다 비운 태하는 맥주 캔을 일그러트린 뒤 그대로 벽을 향해 집어 던졌다.

탁! 툭.

벽에 부딪힌 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캔 안에 남아 있던 노란색 액체가 바닥으로 흘러나왔다.

“빌어먹을.”

약속한 시각보다 한 시간이 지나서도 그녀가 나타나지 않자 인내심이 바닥난 태하는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이아영, 기어코 안 나타나시겠다?’

또다시 저를 피해 도망친 그녀의 비겁함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생각지 못한 그녀와의 재회 후 태하는 좀처럼 촬영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마치 열일곱 살 사춘기 때로 돌아간 것 같은 자신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신경질적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던 태하는 갑자기 울리는 진동 소리에 제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아니었다.

뒤늦게 그 소리의 정체를 떠올린 그는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재킷 주머니에서 구형 핸드폰을 꺼냈다.

그녀가 건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저…… 이아영 씨 핸드폰 아닌가요?]

“맞는데 누구시죠?”

아영이 아닌 낯선 여자 목소리가 들리자 태하가 쌀쌀맞게 되물었다.

[친구 한수인이라고 하는데 아영이 어디 갔나요?]

이름을 듣는 순간 멈칫했다. 그도 익히 아는 이름이었다.

잠깐 아는 척을 할까 망설이던 태하는 이내 하지 않기로 했다. 수인의 성격상 꼬치꼬치 캐물을 게 뻔했으니까. 귀찮은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잠깐 놓고 갔습니다.”

태하는 시치미를 뗐다.

그때 수인의 핸드폰 너머로 ‘한 작가, 뭐 해? 빨리 와!’라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실 말씀 있으면 하세요. 전해 주겠습니다.”

[요즘은 일이 너무 바빠서 어렵다고, 서준이와 서울로 오는 건 날짜를 다시 맞춰 보자고 전해 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저기, 그런데 전화 받으신 분은 누구…….]

태하가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뒤늦게 궁금했는지 수인이 다급히 물었다. 하지만 태하는 못 들은 척 전화를 끊어 버렸다.

서준이라…….

분명 남자 이름이었다.

더구나 수인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걸 보면 둘 사이가 보통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설마 남편인 걸까? 하지만 그녀의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혹시 애인? 그렇다면 카페 앞에서 실랑이한 남자는 뭐지?

분명 그 남자도 아영에게 호감이 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태하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이아영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그의 속을 긁어 놓았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긴 태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미니바로 향했다.

진열장에서 위스키를 꺼내서는 얼음도 타지 않은 채 단숨에 스트레이트로 들이켰다. 위스키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타는 듯이 뜨거웠다.

독한 위스키를 마시면 흐트러졌던 정신이 번쩍 들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마저도 아무 소용이 없자 태하는 끊었던 담배까지 생각났다.

대체 난 왜 이렇게 필사적일까.

이아영은 과거의 여자일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난 왜 이렇게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어쩔 줄을 모르는 걸까?

태하는 이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하지만 까맣게 되어야 할 머릿속에 오늘 만났던 그녀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발목까지 오는 새하얀 롱 원피스에 어깨까지 내려오는 생머리, 갸름한 얼굴에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 단정한 눈썹과 밝은 갈색빛을 띠는 커다란 눈망울, 작지만 오뚝한 코 그리고 선명한 붉은빛을 띠는 도톰한 입술…….

생각이 거기에 멈추자 태하는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도 그럴 게, 그는 유독 그녀의 입술을 좋아했다. 얼굴과 비교해 조금 큰 듯한 입술은 새빨간 자두를 막 한입 베어 문 것처럼 촉촉해 보였고, 웃을 때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참지 못하고 그녀의 목덜미를 끌어당겨 키스를 퍼부었었다.

그녀의 입술은 그를 중독시켰다. 한번 물면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숨이 막혀 제 가슴을 작은 주먹으로 쿵쿵 내리칠 때야 어쩔 수 없이 놓아주었다.

그때의 달콤한 향이 떠올라 태하는 저도 모르게 혀로 제 입술을 쓸었다.

그 순간 잠잠했던 열기가 한곳으로 몰리기 시작하자 태하가 감은 눈을 번쩍 떴다.

다급히 시선을 아래로 내려트린 태하는 갑작스러운 제 신체 반응에 난처한 신음을 흘렸다.

‘미쳤구나. 권태하.’

태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트렸다. 지난 몇 년간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던 게 그녀와 재회한 이후 너무 쉽게 살아나니 그는 허탈할 지경이었다.

5년 전, 그녀의 배신에 깊은 상처를 받은 태하는 그 뒤로 3년간 일에 미친 사람처럼 쉬지 않고 일만 했다.

병적일 정도로 일에 집착하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에이전시 사장 로라는 장장 6개월을 설득해 그를 직접 데리고 신경정신과를 찾았다.

상담하던 의사는 일을 제외하고 그 어떤 것에도 흥미가 없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성 기능은 괜찮냐고 물었다. 지난 3년간 단 한 번도 느낀 적이 없다는 태하의 답에 의사의 얼굴은 심각해졌다.

의사는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다며 꾸준하게 치료받으면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다고 했지만 성욕은 5년이 지나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태하를 안타깝게 여긴 로라는 어떻게 해서든 고쳐 주고 싶어 온갖 방법을 동원해 태하가 아름다운 여자들과 함께하게 했다. 그러나 그 어떤 여자에게도 반응하지 않는 그를 보며 로라는 크게 낙담했다.

하지만 태하는 상관없었다. 지금 제 인생에서 중요한 건 여자가 아니라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오늘 살아 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저를 이렇게 만든 원인 제공자인 이아영을 상대로.

다시금 그녀를 떠올리자 단전이 뻐근해져 왔다.

태하는 가운 위로 나타난 또렷한 존재를 보며 그녀에게 화를 내야 할지 아니면 고맙다고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오기 전 제 민망한 상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서둘러 소파에서 일어난 태하는 욕실로 향했다.

하지만 그날 밤 그녀는 오지 않았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태하는 들고 있던 그녀의 핸드폰을 소파에 던져 버렸다.

***

새벽녘이 되어서야 설핏 잠이 든 아영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몇 시지?’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찾아 손을 뻗었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자 침대에서 일어나 스탠드를 켰다.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핸드폰이 보이지 않았다.

‘아……. 권태하가 가져갔지.’

협탁과 침대를 살피던 아영은 순간 어제 일이 떠올라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 때문에 밤새 고민해 놓고 그새 깜박 잊고 있었다.

투두둑. 투둑.

그때 유리창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어슴푸레한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예보도 없었는데 웬 비가 오지.’

짙은 회색빛이 도는 먹구름을 보니 덩달아 그녀의 마음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툭. 제 발 위로 작고 앙증맞은 다리가 걸쳐졌다. 다리를 따라 시선을 올려 천사처럼 잠든 서준의 얼굴을 쳐다보던 아영의 마음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 아이를 지켜야 해. 절대 그가 알게 해서는 안 돼.’

아영은 스스로 세뇌를 시키는 것처럼 몇 번이고 다짐한 뒤에야 아침 준비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씻고 난 뒤 서준이 좋아하는 계란찜을 은근한 불에 올려놓고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서준아, 일어날 시간이야.”

“으응.”

아영은 잠든 서준의 귀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소리에 서준이 뒤척였다.

하지만 더 자고 싶은지 눈을 뜨지 못하는 서준의 다리를 주무르며 사랑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아영은 숨겨 둔 비책을 꺼냈다.

“지금 안 일어나면 비 그칠 것 같은데.”

잠결에 ‘비’ 소리를 들은 서준이 감은 눈을 번쩍 떴다.

“잘 잤어?”

“엄마, 진짜 비와?”

아영이 빙그레 웃으며 아침 인사를 건네자 서준이 여전히 잠이 묻은 눈으로 되물었다.

“응.”

아영이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서준이 창가로 달려갔다. 작은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뛰어가는 서준을 보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와! 비다!”

창문에 바짝 붙은 채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보며 서준이 좋아서 폴짝폴짝 뛰었다.

“우리 서준이 좋겠네.”

“응! 완전 좋아!”

그녀와 달리 비 오는 걸 좋아하는 서준은 갑자기 현관으로 뛰어가더니 신발장에 넣어 둔 비옷을 꺼냈다.

“엄마, 이거 입을래!”

“안 돼. 비옷은 밥 다 먹은 다음에 입을 수 있어.”

“히잉.”

아영은 잠옷 차림으로 비옷을 입겠다는 서준을 어르고 달래 세수를 시킨 뒤 아침을 챙겼다. 빨리 나가고 싶은 서준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결국, 서준이 남긴 밥으로 아침을 대신한 아영도 서둘러 출근 준비를 했다.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오자 서준은 이미 장화까지 신은 채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서준이 혼자 준비 다 했다!”

“오, 멋진데! 이서준.”

비록 단추 짝이 제대로 맞지 않아 한쪽은 올라가고 다른 한쪽은 내려왔지만 그런 아들의 모습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 아영은 서준을 꼭 껴안았다.

따뜻한 서준을 품에 안자 밤새 곤두서 있던 신경이 조금은 무디어지는 것 같았다.

서준만 있으면 약 따윈 필요 없었다.

“서준아, 사랑해.”

“나도 엄마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해.”

아영은 제게 온전한 사랑을 주는 서준을 품에 안고서 다짐했다.

‘절대 들켜선 안 돼.’

감은 눈 사이로 흐릿한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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