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82)

03

“네가 어떻게…….”

아영은 마치 목이 졸린 것처럼 가까스로 목소리를 만들어 냈다. 충격이 상당한 것 같았다.

“오랜만이야.”

“여기는 어떻게 왔어?”

아영의 그 말이 태하의 귀에는 한국엔 왜 왔냐는 소리로 들렸다.

“나와 달리 전혀 반갑지 않은 모양이네. 서운한데.”

그의 서늘한 비소에 아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희고 가는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자 그가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저 목에 수도 없이 키스 마크를 새겼었지.’

“우리가 반가워할 사이는 아닐 텐데.”

그가 피식 웃자 한쪽 입꼬리가 매력적으로 말려 올라갔다.

“뭐, 네가 그런 거라면 그런 거겠지.”

“난,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

태하가 허둥지둥 떠나려는 그녀 앞을 그가 막아섰다. 아영의 얼굴이 당혹스러움으로 일그러졌다.

“왜, 또 도망가려고?”

“약속 있어.”

아영이 당황을 감추며 말했다.

“5년 만에 널 찾았는데 내가 널 그냥 가게 둘 것 같아?”

태하는 그런 그녀의 노력을 비웃듯 받아쳤다.

그의 표정에 그냥 하는 말이 아님을 깨닫기라도 한 듯 아영은 마치 구석에 몰린 고양이처럼 굴었다. 털을 잔뜩 세운 채 겁에 질린 커다란 눈망울로 도망갈 기회를 엿보는.

태하는 그 모습에 열이 받으면서도 그녀를 찾았다는 기쁨이 더 컸다.

빌어먹게도.

태하는 머저리 같은 자신을 욕하면서도 5년 만에 만난 그녀를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희고 작은 얼굴에 커다란 눈망울과 작지만 오뚝한 코와 붉은 앵두를 삼킨 것 같은 입술은 여전했다.

가슴까지 내려오던 긴 머리는 어깨만큼 짧아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서른 살이 아니라 스물다섯 살처럼 보였다.

그리고 원피스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드러난 팔뚝을 보아하니 그동안 잘 먹지 못한 것인지 그때보다 살이 빠진 것 같았다. 그 사실이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비켜 줘. 가야 해.”

“취소해.”

태하는 그녀의 약속 따윈 상관없다는 듯 내뱉었다.

“뭐?”

그의 거만한 태도에 아영이 성마른 표정을 지었다.

태하도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을. 그녀뿐만 아니라 자신 또한 남아 있는 촬영을 더 해야 한다는 것도.

그런데도 지금 그녀를 놓치면 다시는 영영 찾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에 놓아줄 수가 없었다.

“못 들었어? 약속 취소하라고.”

“네가 뭔데…….”

“뭐긴. 너랑 붙어먹던 남자지.”

“권태하!”

그의 저속한 말에 참다못한 아영이 소리쳤다. 뒤늦게 자신의 목소리가 컸다는 걸 알고 현성이 들었을까 봐 고개를 돌렸다.

그때까지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현성은 도와달라는 신호라고 생각했는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영은 낭패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런. 꼭 위험에 빠진 공주를 구하러 오는 왕자 같네.”

그녀 뒤로 비장하게 걸어오는 현성을 보며 태하가 비웃었다.

“저 사람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난처해진 아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 말을 들은 태하의 표정이 불쾌한 듯 일그러졌다.

“저 남자는 알아? 너랑 나 동거했던 거?”

“말조심해.”

아영이 짓씹듯 내뱉었다. 그녀가 당황할수록 태하의 마음은 더욱 삐뚤어져 갔다.

어느새 다가온 현성이 그녀 옆에 섰다. 말은 아영에게 하면서도 눈빛은 태하 쪽을 향해 있었다.

“아영 씨, 무슨 일이에요?”

“아, 아무 일도 아니에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영은 괜히 둘 사이에 현성이 휘말릴까 봐 서둘러 둘러댔다.

경계하는 듯한 현성의 태도에 태하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현성은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를 눈치라도 챈 듯 태하를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누구예요? 아영 씨랑 아는 사이예요?”

“친, 친구예요.”

“친구요? 제주도 친구가 있었어요?”

아영은 어서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현성이 꼬치꼬치 캐묻자 당황했다.

“그게…….”

“권태합니다.”

아영이 말을 잇지 못하자 태하가 나서서 현성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얼떨결에 그의 손을 마주 잡은 현성은 어딘가 낯이 익은지 태하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생각이 났는지 눈이 커졌다.

“혹시, 모델 대니얼 권이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아, 반갑습니다. 태하 씨가 아영 씨 친구인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렇습니까?”

현성은 세계적인 모델인 대니얼과 그녀가 친구 사이라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태하는 마치 그녀 인생에 저라는 남자가 없었던 것처럼 철저히 비밀로 했다는 사실에 냉기가 가득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영은 그런 그의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꿋꿋하게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제주도는 촬영차 오신 건가요?”

“네.”

“그럼 아영 씨랑 셋이 식사하실 시간은 없으시겠군요?”

현성은 둘이 친구라는 소리에 마음이 놓이기라도 했는지 태하에게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했다.

기겁하고 놀란 아영은 태하가 대답하기도 전에 선수 치듯 말했다.

“바빠서 그럴 시간 없을 거예요.”

태하는 그런 아영의 속이 훤히 보였다.

“내일까지 촬영 스케줄이 빡빡해 당장은 힘들지만 촬영 끝나고 당분간 제주도에 머무를 예정이라 그 뒤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예정에도 없는 스케줄이었지만 태하는 마치 전부터 계획했던 것처럼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아영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편하실 때 미리 연락 주시면 맛집으로 예약해 놓겠습니다.”

“네.”

설마 하며 건넨 제안에 태하가 흔쾌히 수락하자 현성은 뜻밖의 기회를 잡은 것처럼 좋아했다. 그러고는 재킷 안에서 명함을 꺼내 태하에게 건넸다.

현성의 명함을 받아 든 태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사장님, 잠시만요!”

그때 테라스로 나온 소희가 다급히 현성을 찾았다. 아마도 카페에 일이 생긴 듯했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다음에 뵙죠.”

현성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서둘러 카페로 뛰어갔다.

그가 카페 안으로 사라지자 아영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태하를 쏘아보았다.

“대체 무슨 수작이야?”

“수작은 네가 저 남자한테 부리고 있는 것 같은데?”

“뭐?”

“이아영, 능력 좋네. 벌써 저 남자로 갈아탄 거야?”

그가 비웃듯 말했다.

“그런 거 아니야.”

“뭐, 상관없어. 어차피 곧 나가떨어지게 될 테니까.”

태하가 현성과 제 사이를 오해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아영이 단호한 어조로 대꾸했지만,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네가 자꾸 도망가니까 쥐덫을 놓을 수밖에.”

태하가 마음먹은 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뒤늦게 깨닫기라도 했는지 아영은 반포기한 얼굴로 말했다.

“좋아. 할 얘기 있으면 해.”

“지금은 그렇고. 오늘 밤 10시. 썬 비치호텔 703호로 와.”

태하는 이제야 말이 통한다는 듯 본론을 꺼냈다. 그러자 아영이 날카롭게 눈을 치떴다.

“뭐?”

“왜, 싫어?”

“내가 갈 것 같아?”

아영의 얼굴에 경멸이 스쳤다.

“아니. 넌 오게 될 거야.”

“그게 무슨 뜻이야?”

자신만만한 그의 태도에, 되묻는 그녀의 목소리가 불안에 떨렸다.

“네 핸드폰, 나한테 있거든.”

그가 태연한 표정으로 그녀의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헉!

그가 말하기 전까진 자신의 핸드폰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듯 아영의 두 눈이 놀라 커졌다.

“돌려줘.”

“돌려받고 싶으면 시간 맞춰 와.”

아영의 요구에도 태하는 그녀의 핸드폰을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태연하게 덧붙였다.

그의 행동에 화가 난 아영이 짓씹듯 내뱉었다.

“수작 부리지 마.”

“이아영, 뭔가 단단히 착각한 모양인데. 아직도 내가 너한테 환장한 새끼처럼 보여?”

그녀의 말이 그의 신경을 건드리자 태하의 표정이 냉소적으로 돌변했다. 두 사람을 에워싼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지금 최대한 이성적으로 굴려고 노력 중이니까 더는 날 자극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여기서 망신당하고 싶지 않으면.”

아영은 겁을 집어먹은 것인지 아니면 반박할 말을 찾는 것인지 그를 쳐다보는 눈에 힘을 주었다.

RRRRR. RRRRR. RRRRR.

그때 태하의 휴대폰이 정적을 깨트렸다. 태하는 귀찮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

“왜.”

[어디세요? 촬영 5분 전입니다.]

“지금 가.”

다급한 매니저 목소리에 그제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서둘러 전화를 끊은 태하는 곧장 몸을 돌려 바닷가 쪽으로 향했다.

“권태하, 그냥 가면 어떡해! 핸드폰은 돌려주고 가!”

그가 말도 없이 가 버리자 당황한 아영이 소리쳤다. 하지만 태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을 텐데도 돌아보지 않았다.

혼자 남은 아영은 그를 쫓아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굴렀다.

그를 쫓아가면 사람들의 시선을 끌테고, 사람들은 그와 자신이 어떤 사이인지 궁금해할 게 뻔했다. 그렇게 되면 예전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아영은 바로 어제처럼 떠오른 선명한 기억에 몸을 떨었다. 다시는 그때와 같은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영은 자신에게 다짐하듯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와 재회했을 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치 땅속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바닥이 요동치는 것처럼 흔들리자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당장 도망가야 했다. 그와 다시 얽혀서는 안 된다. 머릿속에 위험을 알리는 경고등이 울렸다.

하지만 태하에게 뺏긴 핸드폰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그냥 잃어버린 셈 칠까?’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다만, 핸드폰에 저장된 수많은 서준의 사진을 포기해야 한다 생각하니 너무 속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컴퓨터에 미리미리 저장해 둘걸. 바쁘다는 핑계로 저장해 두지 않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아니면 전화해서 호텔 말고 다른 곳에서 만나자고 설득해 볼까?’

그러나 문제는 그의 연락처를 모른다는 거였다. 그렇다고 그가 묵고 있는 호텔로 찾으러 갈 배짱 또한 없었다.

조금 전 단 몇 분 만에 그에게 휘둘렸던 저를 떠올리며 아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지난 5년간 단단히 쌓아 온 평정심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으니까.

‘하아…….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자 아영은 한숨만 터져 나왔다.

그때 그녀의 눈에 병아리 그림이 그려진 노란색 스쿨버스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헉!

멍하니 그 모습을 눈에 담던 아영은 퍼뜩 떠오른 생각에 아찔해졌다.

서둘러 손목시계를 확인한 아영은 서준을 데리러 갈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 있음을 깨달았다.

서준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져 지나가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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