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아영은 5시가 되자 스태프실에서 유니폼을 벗고 제 옷으로 갈아입었다.
원피스 차림인 아영을 보고 예원이 말을 걸었다.
“매니저님 지금 가세요?”
“네. 먼저 가 볼게요.”
아영은 사정상 9시 반 출근에 오후 5시에 퇴근했는데, 남들보다 늦은 출근과 이른 퇴근에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시급으로 받는 아르바이트생과 달리 자신은 직원이었지만 그렇다고 미안한 마음이 안 드는 건 아니었다.
아영은 예원과 소희 그리고 진영에게 차례로 인사한 뒤 카페를 나섰다.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오후의 하늘은 마치 황금을 뿌린 것처럼 아름다웠다. 잠시 그 모습을 눈에 담은 아영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때 카페 쪽으로 걸어오는 두 여자가 보였다. 돌계단 쪽에서 오는 걸 보니 해변에서 오는 길인 듯했다.
“야, 정신 좀 차려.”
“아까 그 남자가 쳐다보는데 나 심장 멎는 줄 알았잖아.”
마뜩잖은 친구의 눈빛에도 여자는 제 심장 위에 손을 올려놓고는 마치 꿈길을 걷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오버하기는.”
“오버 아니야. 나뿐만 아니라 거기 있던 여자들 다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니까.”
“너 때문에 아까운 시간을 한 시간이나 낭비했으니까 네가 커피 사.”
“그게 왜 낭비야? 경치 보는 것보다 그 남자 보는 게 훨씬 좋은데.”
여자의 항변에 친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너, 그 남자 누군지나 알고 좋아하는 거야?”
“어딘가 낯이 익긴 하던데. 그 남자 배우 아니야?”
“배우는 무슨. 모델이야. 그것도 세계적인 모델.”
“그래? 우리나라에 그런 모델이 있었단 말이야? 왜 나는 몰랐지?”
몰랐던 사실에 여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옆에 있던 친구가 한심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아이돌만 좋아하는 네가 뭘 알겠니.”
“결심했어. 나 오늘부터 그 남자 팬 될 거야.”
“이름도 모르면서 팬은 무슨.”
“아, 맞다! 그 남자 이름이 뭐야?”
“싫어. 안 알려 줘!”
“야─ 말해 주라─.”
친구가 놀리며 카페로 뛰어가자 여자가 애교를 부리며 뒤따라갔다.
20대인 듯한 두 친구의 투덕거림을 듣고 있자니 아영은 웃음이 났다.
자신도 저랬을까?
그래봤자 5년 전이었지만 아영은 까마득히 느껴졌다.
그때 불현듯 떠오르는 얼굴에 아영은 마치 누군가 심장을 옥죈 듯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안 돼. 떠올리지 마.’
아영은 마치 자신에게 주문이라도 걸듯 다급히 되뇌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점차 희미해지더니 막혔던 숨이 서서히 터져 나왔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아영은 안도감과 함께 깊은 절망을 맛보았다.
그를 잊기 위해 5년이란 시간을 발버둥 치며 살아 왔다.
하지만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격렬하게 반응하는 심장을 보며 그동안 그를 잊은 게 아니라 단지 잊은 척하며 살아 왔다는 걸 깨달았다.
뒤늦게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된 아영은 충격에 비틀거렸다.
그 순간, 언제 나왔는지 휘청하던 그녀의 팔을 현성이 재빨리 붙잡았다.
빙 돌던 하늘이 멈추자 아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걱정하는 현성의 눈과 마주치자 아영은 자신이 쓰러질 뻔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현성의 걱정을 덜기 위해 아영은 괜찮다는 듯 억지로 웃어 보였다. 하지만 현성에게는 통하지 않았는지 그의 표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잠깐 어지러웠던 것뿐이에요.”
“아무 이유 없이요?”
“가끔 그래요. 그러다 좀 있으면 괜찮아져요.”
현성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아영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넘어가기 위해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나중에 또 그러면 그땐 정말 병원 가 봐요. 알았죠?”
“네. 그럴게요.”
그녀의 대꾸에도 현성의 얼굴에서 걱정이 사라지지 않았다.
***
찰칵. 찰칵. 찰칵.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가 쉴 사이 없이 들렸다.
바다를 등지고 선 남자는 셔터 소리에 맞춰 순간순간 포즈를 바꿨다. 짧은 찰나였지만 겹치는 포즈가 하나도 없을 만큼 남자는 노련했다.
“대니얼, 셔츠 좀 벗어 주세요.”
“네. 그러죠.”
사진작가인 현의 요청에 남자는 흔쾌히 셔츠 단추를 풀었다.
셔츠를 벗어 던지자 숨겨져 있던 남자의 구릿빛 상체가 드러났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스태프들이 숨을 죽였다.
남자의 몸은 체지방이 1%도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완벽한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목과 어깨를 잇는 승모근, 양쪽으로 떡 벌어진 탄탄한 가슴, 왕(王) 자가 새겨진 것처럼 선명한 복근, 허리에서 바지 아래로 사라지는 치골까지.
직업상 남자의 벗은 몸을 지겹도록 봐 온 현이었지만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괜찮습니까?”
“네? 아, 네. 시작하죠.”
넋을 놓고 쳐다보던 현은 남자의 질문에 당황함을 감추기 위해 재빨리 카메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고는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그의 몸을 담기 위해 연신 셔터를 눌러 댔다.
찰칵. 찰칵. 찰칵.
당황함과 별개로 손가락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현은 자연스럽게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카메라로 대니얼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순간 낭패감에 휩싸였다. 카메라를 응시한 대니얼의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간 걸 포착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정받고 있는 현은 그동안 수많은 모델과 연예인의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처럼 자신의 직업을 잊게 만드는 사람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제야 현은 왜 여자 사진작가들이 대니얼과 작업하길 꺼리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왜 스캔들이 끊임없이 터지는지도.
그 순간 대니얼이 자신과 작업하기 전 했던 재수 없는 말이 떠올랐다.
“작업하는 동안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대니얼에게 그 말을 듣는 순간 현은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잘나가는 모델이라지만 그보다 잘생기고 멋진 남자들과 작업할 때도 현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공과 사 구별 없이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을 질색하던 그녀였다.
“그건 저도 바라던 바예요.”
현은 콧대 높은 남자의 자신감을 비웃으며 당차게 말했다.
하지만 만 하루도 지나지 않은 지금, 그런 말을 한 자신의 입을 꿰매 버리고 싶었다.
현은 그제야 깨달았다. 인생은 무엇 하나 쉽게 단정하면 안 된다는 것을.
“30분 정도 쉬었다 갈게요.”
현은 대니얼 때문에 흐트러진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다.
현의 말이 떨어지자 대니얼의 매니저인 용준은 서둘러 가운을 건넸다. 대니얼은 가운을 입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그런 대니얼을 보며 현은 어떤 모습이 그의 진짜 모습인지 궁금했다.
일할 때는 누구보다 열정적이며 놀라운 집중력을 보이지만 일이 끝나면 냉정하고 차갑기 그지없는 남자였다.
그렇다고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무례하게 굴지도 않았다. 되레 거리감이 느껴질 만큼 깍듯이 대했다.
그래서 수많은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그를 비판하는 사람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
현은 왜 그가 최고의 자리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대니얼 권’이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인 태하가 밴에 올라타자 운전석에 앉은 용준은 땡볕 아래에서 촬영하느라 더웠을 그를 위해 에어컨 온도를 낮췄다.
“커피 좀 사다 드릴까요?”
“근처에 카페가 있나?”
눈치 빠른 용준의 말에 마침 커피 생각이 간절했던 태하가 되물었다.
“해변 끝에 커피 맛 괜찮은 곳이 있습니다.”
“여기서 멀어?”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습니다.”
용준의 말을 들으며 태하는 수건으로 대충 물기를 털었다. 아무렇게나 닦인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 위로 흩어졌다.
다른 사람 같으면 지저분해 보일 수도 있었지만 태하는 그것조차 멋있어 보였다.
용준은 5년 넘게 태하를 봤지만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럼 있어. 내가 갔다 올게.”
“아닙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차 안이 답답해서 그래.”
직접 가겠다는 태하의 말에 당황한 용준이 재빨리 만류하려 했지만 태하가 이미 차에서 내린 후였다.
차 안에 혼자 남은 용준은 자신이 미안하지 않도록 배려해 준 태하에게 고마워하며, 미리 에어컨 온도를 낮춰 두지 않은 자신을 질책했다.
태하는 검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채 용준이 말한 카페를 찾아 해변을 가로질러 갔다.
분주하게 다음 촬영을 준비 중이던 스태프들의 눈이 홀린 듯 그의 뒷모습을 좇았다. 걸어 다니는 화보가 따로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해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절벽 위에 용준이 말한 카페가 보였다. 독특한 외관 덕분에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태하는 선글라스를 고쳐 쓰고 보도블록을 따라 걸었다. 가로수를 야자수로 심어서 그런지 마치 캘리포니아 해변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카페 근처에 다다랐을 때 누군가 실랑이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가 등을 돌린 채 서 있어서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남자의 표정은 심각해 보였다.
‘사랑싸움이라도 하는 건가?’
흔한 연인들 간의 다툼일 거라는 생각에 그냥 지나치려던 순간.
갑자기 남자가 여자의 팔목을 잡아 어딘가로 끌고 가려는 모습이 보였다. 태하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채 몇 걸음 내딛기도 전에 여자의 팔을 잡고 있던 남자의 팔이 툭 떨어졌다.
태하는 갑작스러운 상황 전환에 주춤한 채 서 있었다. 그 순간 여자가 몸을 돌렸다.
여자의 얼굴을 본 태하는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이아영.
5년 전 그의 마음을 무참히 짓밟고 떠나 그를 지옥의 구렁텅이로 밀어 버린 여자. 그를 반 불구로 만든 것도 모자라 불면증까지 선사한 여자가 환영처럼 걸어오고 있었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치솟아 뇌의 모든 혈관이 터져 버린 것처럼 태하는 그대로 멈춰 선 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걸어오던 여자가 뒤늦게 그를 발견했는지 갑자기 걸음을 우뚝 멈췄다.
달라진 헤어스타일에 선글라스로 얼굴 절반을 가린 상태였지만 아영은 그가 누구인지 알아챈 듯했다.
점점 핏기가 사라지는 얼굴과 당황해 흔들리는 눈동자, 그리고 겁에 질린 새끼 양처럼 잘게 떨리고 있는 손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태하는 저만큼 그녀도 충격받았다는 사실에 조금은 위안이 됐다. 그래서인지 조금 전까지 멈췄던 회로가 다시 제 길을 찾은 것처럼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저벅.
점점 거리를 좁혀 가자 아영이 어깨에 메고 있던 핸드백 끈을 꽉 움켜쥐는 게 보였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등 위 실핏줄이 불거져 보였다.
분명 도망가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는 것이리라. 도망은 그녀의 주특기였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도망갈 곳은 없었다. 뒤에는 그녀의 손목이 마치 제 것인 양 움켜쥐던 남자가 있었고, 앞에는 자신이 버티고 있었으니까.
그녀도 그걸 알고 있는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못 박힌 것처럼 서 있었다.
태하는 쓴웃음을 삼키며 점점 거리를 좁혀 갔다. 정확히 1미터를 남겨 두고 멈춰 선 태하가 천천히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때까지도 제가 아니길 바랐는지 저와 눈이 마주치자 아영은 들고 있던 핸드폰을 놓치고 말았다.
탁!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핸드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그녀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본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아영이 떨어트린 핸드폰을 주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넋을 놓고 서 있자 태하는 긴 다리를 접어 그녀의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다행히 망가지지는 않은 듯했다.
그는 뒤늦게 어르신들도 잘 쓸 것 같지 않은 구형 핸드폰을 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