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태하의 길고 가는 손가락이 그녀의 달아오른 볼을 스치듯 어루만졌다.
“이아영, 네 여기 빨개.”
“흣!”
“그리고 여기도.”
“하아…….”
그의 손가락이 갸름한 얼굴선을 타고 내려와 거친 키스로 인해 붉어진 그녀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그러자 아영의 눈꺼풀이 감전이라도 된 듯 파르르 떨리더니 입술 사이로 더운 숨을 토해 냈다.
그녀의 습한 열기가 손가락에 닿자 태하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겁나?”
“……조금.”
그녀의 눈을 깊숙이 맞춰 오던 태하가 물었고, 아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와 이곳으로 오는 동안 아영은 촌스럽게 행동하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막상 그의 손길이 닿자 스물다섯 살 성인이 아니라, 그가 제 첫 키스를 훔쳤던 갓 스무 살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떨렸다.
그녀의 긴장을 눈치챘는지 태하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무서우면 도망가.”
“안 가.”
아영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일 후회하게 되더라도 오늘만은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뭔가에 미친 듯이 몰입하면 이 헛헛하고 공허한 마음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영은 위로를 핑계로 그를 유혹했다. 권태하와 함께라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테니까.
바로 지금처럼.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그래.”
“좋아. 그렇게 남자한테 안기고 싶으면 안아 줄게. 지금 당장.”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아영을 번쩍 안아 올린 태하는 성큼성큼 침대로 걸어갔다.
갑자기 몸이 하늘로 붕 뜨자 깜짝 놀란 아영이 허우적거렸다.
“뭐야? 내려 줘!”
아영이 그의 가슴을 밀치고, 두 다리를 버둥거려도 멈추지 않았다.
아영을 침대에 눕힌 태하는 그녀를 양팔로 가둔 채 내려다보았다.
들들 끓는 용암처럼 뜨거운 태하의 시선이 저를 굽어보자 아영은 마치 덫에 걸린 동물처럼 겁에 질려 확대된 동공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태하가 그녀의 한쪽 볼을 느리게 훑었다.
“그러니까 진작 도망가랬잖아. 이제 와서 겁먹어 봤자 소용없어.”
“난…… 흡!”
그 말은 마지막 경고와도 같았다. 아영이 반박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는데 말 대신 그의 혀가 침입해 들어왔다.
기습과도 같은 그의 키스에 놀란 아영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의 가슴을 쳤다.
하지만 그 손은 제대로 된 타격도 주지 못한 채 그에게 붙잡혀 머리 위로 끌어 올려졌다.
태하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두 손목을 결박하고는 나머지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옆으로 기울이더니 더 깊게 파고들었다.
목구멍에 닿을 정도로 단숨에 깊고 빠르게 침투해 온 그는 마치 제 것인 양 그녀의 입 안을 온통 휘저었다.
곧 잡아먹을 것처럼 거침없이 밀어붙이다가도 한발 뒤로 물러나 관망하듯 지켜보길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아영은 애가 타 미칠 것 같았다.
마치 끓어 넘치기 직전 냄비 뚜껑을 닫아 버린 것처럼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열기로 인해 온몸이 타는 듯 뜨거웠다.
그녀의 희고 가는 목선을 따라 내려오던 키스가 작고 움푹 팬 쇄골에 잠시 멈추더니 이내 작정한 듯 아래로 향했다.
“자, 잠깐만!”
“이젠 나도 못 멈춰.”
그가 거친 숨을 내뱉으며 티셔츠 안으로 파고들자 깜짝 놀란 아영이 몸부림쳤다. 하지만 태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얼굴을 숙였다.
“아, 안 돼!”
가슴 위로 뜨거운 열기가 닿자 아영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소리쳤다.
“엄마…….”
제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그를 피해 도리질을 하던 아영의 귀에 작은 음성이 파고들었다.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깨달은 순간, 아영의 눈이 번쩍 뜨였다.
***
깜박. 깜박.
안개 낀 것처럼 뿌옇던 시야가 점점 또렷해지더니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 꿈이었구나.’
현실처럼 너무나도 생생했던 그 순간이 꿈이었다는 걸 깨달은 아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아직도 꿈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 여전히 달아올라 있었다.
‘미쳤어, 이아영. 어쩌자고 그런 말도 안 되는 꿈을…….’
“엄마, 아파?”
“어? 아, 아니야. 엄마 하나도 안 아파.”
팔을 흔드는 손길에 고개를 돌리자 저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아들 서준이 눈에 들어왔다.
아영이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하며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런데 왜 소리 질렀어?”
서준이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여전히 걱정 가득한 눈으로.
아영은 당황해 말문이 막혔다.
“어? 그, 그게…….”
RRRRR. RRRRR. RRRRR.
그 순간 구세주처럼 전화벨이 울렸다.
“잠깐만.”
서둘러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아영은 테이블에 올려놓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친구 수인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너 기사 봤어?]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묻는 수인의 말에 아영은 어리둥절했다.
“무슨 기사?”
[권태하, 귀국했대.]
아영은 너무 놀라 하마터면 들고 있던 핸드폰을 떨어트릴 뻔했다.
‘갑자기 귀국이라니…….’
아영의 심장이 거세게 방망이질 쳤다.
“어, 언제?”
놀란 마음을 가까스로 추스른 아영이 침착함을 가장하며 되물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잘게 떨리는 건 어쩌지 못했다.
[어제 귀국한 모양이야.]
그동안 아영은 병적이다 싶을 만큼 그를 피하며 살았다. 그 증상은 서준이 태어나면서 더 심해졌다.
가지고 있던 TV를 버렸고, 핸드폰 포털 사이트 연예 면에 혹시라도 그가 나올까 봐 쓰던 핸드폰도 2G폰으로 바꿨다.
그녀를 지켜보던 수인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냐고 했지만 아영으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혹시, 왜 왔는지 알아?”
[광고 촬영하러 왔대.]
시니컬한 수인의 대답에 아영은 안도했다. 단지 광고 촬영 때문에 온 거라면 일정이 길지는 않을 테니까.
솔직히 그가 오래 머문다 해도 저와 마주칠 일은 없겠지만 마음 한구석에 불안감이 드는 건 저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권태하가 대단하긴 한가 봐. 동양인 모델 중 세계 4대 패션쇼에 선 유일한 남자 모델이라면서 뉴스까지 나오는 거 보니.]
아영과 태하 사이를 유일하게 알고 있는 수인이 비꼬듯 말했다.
수인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아영은 5년 전에도 버거웠던 그가 이제는 영영 닿을 수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 씁쓸해졌다. 그와 다시 만날 일도 없는데.
[세상 참 불공평해. 남의 가슴에 못 박은 놈은 저렇게 잘나가고, 아무 잘못도 없는 너는 죄인처럼 숨어서 살고.]
“난 지금이 좋아.”
[좋긴 뭐가 좋아? 일은 그놈이 저질러 놓고 왜 뒷감당은 오롯이 너 혼자 해야 하냐고. 진짜 마음 같아서는 당장 네 새끼 데려가라고 하고 싶…….]
“한수인, 그만해!”
[미안해. 내 말은 진짜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녀답지 않게 아영이 언성을 높이자 뒤늦게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걸 깨달은 수인이 재빨리 사과했다.
“서준이 어린이집 가야 할 시간이야. 나중에 통화하자.”
[그, 그래.]
서늘해진 아영의 목소리에 수인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아영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화가 가시지 않았다. 수인이 저를 안타까워하는 건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아이 문제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권리는 없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엄마, 수인이 이모야?”
“어? 어.”
권태하가 귀국했다는 말에 순간 옆에 서준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아영은 죄책감이 밀려왔다.
“이모 언제 와?”
“왜?”
아영이 서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되물었다.
“이모 보고 싶어.”
아영은 난처해졌다.
서준은 유독 수인을 잘 따랐다. 책을 읽어 주거나, 조용한 음악을 듣는 정적인 저와 달리 수인은 칼싸움이나 악당 놀이 같은 동적인 놀이를 잘했다.
“그랬구나. 그런데 이모가 요즘 많이 바쁜가 봐.”
“그럼, 우리가 보러 가자!”
둘러댄 그녀의 말에 잠시 실망하던 서준이 이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알았어. 이모한테 말해 볼게.”
“약속해.”
더는 실망감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던 아영의 말에 서준이 새끼손가락을 세웠다.
“와! 신난다!”
아영이 새끼손가락을 걸자 서준이 방방 뛰었다.
해맑게 웃는 모습이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는 듯해, 아영은 서둘러 고개를 가로저었다.
***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없는 제주의 여름은 온통 파란 세상이었다.
하얀 솜사탕 구름이 동동 띄워진 하늘은 푸르디푸르렀고, 검은 화산석에 부딪혀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는 바다는 에메랄드빛이었다.
하지만 아영은 밀려드는 주문에 멋진 풍경을 누릴 여유가 없었다.
“굿모닝!”
밀물처럼 몰려든 손님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현성이 경쾌한 인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막 한숨을 돌린 뒤 포스기에 묻은 커피 얼룩을 닦던 아영이 걸레질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오셨어요.”
아영은 짙은 코발트블루 색 정장 안에 하얀 셔츠를 받쳐 입은 현성과 눈이 마주치자 인사를 건넸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홀에 있는 테이블을 정리 중이던 소희와 바닥에 흘린 커피를 닦던 진영도 현성을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했다.
현성이 훈훈한 미소로 소희와 진영에게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인 뒤 곧장 아영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카페에 있던 몇몇 여자 손님들은 그의 훈훈한 외모에 눈을 빛냈다.
“늦어서 미안해요. 나 없는 동안 많이 바빴어요?”
“괜찮았어요.”
아영은 미안해하는 현성에게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하지만 그녀 뒤로 수북이 쌓인 설거지를 본 현성은 제가 없는 사이 얼마나 바빴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카페 ‘더 우드’는 건축학과를 나온 현성이 직접 설계한 3층 높이의 노출 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이다.
2층과 3층은 게스트하우스로 운영하고 1층은 카페로 사용했는데, 앉는 곳이 다 포토존이라고 할 만큼 자리마다 분위기가 달라 인기가 많았다.
그게 입소문이 나면서 제주도 중심가에서 한참 벗어난 곳인데도 불구하고 카페를 찾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이참에 아르바이트생 한 명 더 뽑을까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바쁠 때만 바쁘지 다른 시간에는 괜찮아요.”
“요즘 아영 씨 밥 먹을 시간도 없잖아요.”
“그건 성수기니까 감수해야죠.”
아영은 아무리 바빠도 식사 때가 되면 아르바이트생들부터 챙겼다. 그러다 자신의 식사를 놓치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볼 때면 현성은 포장해 온 도시락과 함께 억지로 그녀를 직원 휴게실로 밀어 넣었다.
현성은 아영이 제주도로 도망치듯 내려온 뒤 두 번째로 일하게 된 카페의 사장이었다.
아영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던 그는 사정을 모두 알게 된 후 그녀를 배려해 출퇴근 시간을 조율해 주었고, 월급 또한 타 카페보다 높았다.
덕분에 아영은 제주도에 금방 정착할 수 있었다.
마음 약한 현성은 가게가 바빠지며 아영의 일이 늘어나자 마음이 편치 않은 듯했다. 이렇게 좋은 사람이라 아영은 카페 일을 더 열심히 했다.
“후회 안 해요?”
“뭘요?”
“내 꾐에 빠져 여기서 일하게 된 거.”
현성이 진지한 눈빛으로 묻자 아영은 푸스스 웃어 보였다.
“걱정돼요? 제가 그만둘까 봐?”
“엄청요. 아영 씨 없으면 여기 문 닫아야 하니까.”
그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직원들은 가끔 얼굴만 비추는 그보다 아영을 더 따랐다. 더구나 재고부터 정산까지 그녀가 알아서 했기에 그가 신경 쓸 일이 없었다.
“그럴 일 없으니 안심하세요.”
그녀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현성의 얼굴에 안도감이 퍼졌다.
“커피 드릴까요?”
“좋죠. 아이스로 부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