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이곳에 오기 전의 삶.
그리고 이곳에 온 뒤의 삶.
그것들을 이어 주는 책에 대한 것을 비롯해 많은 이야기가 엘레노어의 입을 통해 처음으로 이 대륙에 울렸다.
긴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리안은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말을 마친 엘레노어는 긴장한 채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
사실 누가 들어도 망상증이라고 볼수밖에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자신이 우주 밖에서 왔고, 외계인이 나를 이 몸에 심어 놨다고 하는거나 마찬가지니까.
미쳤다고 당황하거나 혹은 그냥 농담으로 치부해 버릴지도 모른다.
한참 후 리안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엘레노어의 예상과 달랐다.
“생각해 봤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리안은 흰 뺨을 손가락으로 슥 문지른 뒤 말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당신이 말하는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 같습니다.”
전에도 그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 말이었다.
그 말이 진심임은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보다 더 궁금한 것이 있었다.
“제 말이 진실이라 믿으세요?”
“당신이 무얼 말하는 내게는 그게 진실입니다.”
리안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보라색 눈동자에 떠오른 눈빛을 볼 때 거짓말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엘레노어는 더욱 중요한 것을 묻기로 했다.
“마음이…. 변하지 않으셨나요?”
내가 사실 당신이 아는 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하지 않았을까.
초조한 눈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리안의 멈춰 있던 입가가 움직였다.
정확히는 붉은 입꼬리가 슬그머니 위로 향했다.
“뭘 불안해하는 겁니까.”
리안은 엘레노어의 이마 가운데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더니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그냥 계속 똑같습니다. 그러니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정말 한 점의 변함도 없을까?
“계속 똑같다고요?”
“그렇습니다.”
다시 확인하듯 묻자 리안이 고개를 시원스레 끄덕이더니 귓가로 입술을 가져왔다.
“항상 그렇듯이 당신을 안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만.”
음흉한 말인데 순간 마음이 놓이는 자신이 당황스러웠다.
엘레노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쏘아보자 리안이 쿡쿡 웃었다.
“할 수 없잖아요. 호색한이니까.”
“제 얘기 진지하게 들은 거 맞나요?”
리안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엘레노어는 계속 입술이 나와 있었다.
그러자 리안이 뺨을 가볍게 긁적이며 생각에 잠겼다.
“엘레노어, 나는…….”
본래 과묵한 리안은 단어를 고르기 어려운 듯 머뭇거리다 말했다.
“주변으로부터 여성들의 호감을 사기 쉬운 외모를 가졌다는 말을 듣는 편입니다.”
스스로 칭찬하는 말이 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리안의 외모는 겨우 그 정도로 표현하기에는 지나치게 겸손하다.
엘레노어가 수긍하자 그가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높은 지위를 지닌 가문에서 태어났죠. 나는 게으른 편은 아닙니다만, 내가 가진 것 중 평가가 높은 것들은 대부분 노력해서 성취한 것이 아니고 그냥 원래부터 주어진 겁니다.”
타고난 재능과 외모, 지위.
사실 그는 신으로부터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은 채 태어났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그의 말이 향하는 곳이 무척 궁금해 엘레노어는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걸 포함해서 전부 나입니다. 그게 어디로 사라져 버릴지 모른다든가,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았다든가, 그런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것은 모두 온전히 리안의 것이니까.
“만일 내가 타고난 게 없으면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며 고민하면 뭐라고 말할 겁니까?”
“걱정을 사서 한다고 하겠죠.”
엘레노어는 쓴웃음을 지은 뒤 덧붙였다.
“하지만 저와 백작님은 달라요.”
“다르지 않습니다.”
잘라 말한 뒤 리안이 품에 안은 엘레노어를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덮듯이 그녀의 몸 위로 올라왔다.
“당신이 대답해 봐요.”
리안은 양팔로 엘레노어의 머리 옆을 짚은 채 말했다.
“귀족들이 괴롭히던 밤, 꿋꿋이 맞선 뒤 혼자 나와 눈물지으며 내 시선을 빼앗아 간 건 당신이죠?”
리안이 언젠가 말해 준 바 있는, 3년 전 처음 만난 밤에 대한 말이었다.
엘레노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서재로 찾아와 나를 묶고, 여기저기 더듬으며 당신에게 미쳐 버리게 만든 것도 당신이고.”
대답 대신 ‘힉’하는 소리가 나왔다.
리안이 그때를 복수하듯 노골적으로 허리를 더듬었기 때문이다.
몸을 빼려는 엘레노어를 단단히 잡은 채 그는 귓가를 붉은 혀로 핥았다.
저릿한 감각에 자지러지는 사이에도 그의 말은 끊이지 않았다.
“이렇게 귓가에 입을 맞추면 귀엽게 몸을 떠는 것도.”
말을 마치자마자 입술은 목덜미로 내려갔다.
그리고 무례한 장소에 이른 손과 함께 엘레노어의 보드라운 피부에 흔적을 새겼다.
“이렇게 손에 쥐고 머금으면 입술을 벌리고 달콤한 숨을 내뱉는 것도.”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말하는 대로 해 버리는 자신에 놀랐다.
“어젯밤 내 허리를 감은 다리의 주인도.”
리안이 기억을 되살리려는 듯 단단한 팔로 그녀의 허벅지를 잡아 세웠다.
그렇게 하나하나 되짚어가며 리안은 엘레노어의 전신, 모든 민감한 곳에 손길을 이끌었다.
어느새 나를 이렇게 길들여 버린 걸까.
당연하듯 반응하는 자신에 놀라 버렸다.
그렇게 한참 엘레노어의 몸이 노곤해지도록 만든 뒤 리안의 얼굴이 다시 위로 향했다.
“당신의 이야기 속 나는 내가 아니 듯 당신도 당신이 아는 사람과 달라요.”
그는 잘 들으라는 듯 발음 하나하나 힘주어 말했다.
“내 손에 이렇게 귀여운 반응을 보이는 상대가 바로 당신입니다.”
엘레노어는 홀린 듯 그의 말을 들었다.
이곳에 와서 삶을 개척하고 그를 만나 사랑에 빠진 엘레노어.
그게 바로 나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감정을 품은 채 당신을 사랑하는 내가 나입니다.”
엘레노어는 그 말을 통해 스스로를 확신했다.
줄곧 인정하지 못했던 사실을 마주하자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서 청량한 감각이 퍼져 나갔다.
계속 남아 있던 작은 거리낌이 사라진 것이다.
“백작님은 항상 핵심을 찌르시네요.”
엘레노어는 리안을 지그시 올려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별로 생각 같은 거 안 하는 거 같은데 말이죠.”
“내 평가는 여전히 낮군요.”
리안은 그녀의 말에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나 그의 입가는 여전히 웃는 채였다.
“이제 이야기는 끝났어요. 마음이 후련하네요. 들어 줘서 고마워요.”
솔직하게 말하자 리안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이제 받아 줄 수 있겠습니까?”
리안이 손에 쥐고 있던 반지를 다시 들어 올렸다.
엘레노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가슴을 짚고 있던 손가락을 내밀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커다란 반지가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끼워졌다.
놀라울 정도로 꼭 맞았다.
손에 낀 반지를 보는 엘레노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말로 결혼하는 거구나.”
리안으로 인해서 엘레노어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전의 삶이 싫은 것도 아니고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뭔가 놓친 게 있다는 허전함을 가슴 한쪽에 품고 살아온 건 확실했다.
‘백작님 덕에 그것들이 전부 채워졌어.’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 주는 가족.
그리고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와 언제라도 기댈 수 있는,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
큼이나 영롱하게 빛났다.
너무 아름다워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참으려 애쓰고 있는데 리안의 입술이 다가왔다.
그는 붉은 혀를 내밀어 살짝 그것을 핥은 뒤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다시는 손에서 빼면 안 됩니다.”
이렇게 큰 반지를 끼고 일상생활이 가능할까.
엘레노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도둑들이 노리면 어쩌죠.”
“내가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지킬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한 기사가 그렇게 말한다면 믿을 수밖에.
엘레노어는 쿡쿡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안의 섬세한 턱선이 만족스러운 모양새를 띄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그것 빼고 아무것도 입지 않기로 하죠.”
그 말을 하며 리안은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키듯 몸을 살짝 앞으로 눌렀다.
엘레노어는 그가 여전히 다리 사이에 자리 잡고 있음을 자각했다.
“당신을 원해서 견딜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