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블레인은 고용인의 극진한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공작 부인의 영향력 덕인지 다섯사람은 단상 바로 앞 중앙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사람이 꽤 많네요.”
비앙카스타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커다란 경매장은 사람들로 제법 북적거렸다.
“경매품이 대체 뭐길래 이 정도로 사람을 끌어모은 겁니까?”
블레인의 질문에 공작 부인이 깔끔하게 답했다.
“이터너티 퍼플.”
“뭐라고요?”
명료한 발음이었는데도 블레인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터너티 퍼플이라니. 누구라도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 전설 속의 보석 말인가요?”
비앙카스타가 역시나 놀란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러나 그녀의 곁에 앉은 에이드리 언은 처음 듣는 기색이었다.
“그게 뭡니까?”
“제국 초대 황제에게 인어가 바쳤다는 커다란 다이아몬드예요. 태양광을 받으면 보라색 빛을 내는데 엄청나게 영롱하고 아름답대요.”
양손을 가슴에 모은 채 비앙카스타가 미리 준비한 것처럼 설명을 줄줄 늘어놓았다.
“제국의 황후들에게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다고 해요. 그런데 27대 황제가 사랑하던 황후를 일찍 보내고 추모하는 의미에서 함께 묻었다고”
어렸을 때 그런 내용을 책에서 읽고 의미 깊은 물건을 함께 무덤으로 보냈다는 사실에 혀를 찼던 기억이 있었다.
“그런 물건이 어떻게 경매에 나온 거죠?”
질문하며 에이드리언은 읽고 있던 팸플릿을 들어 올렸다.
“여기에는 그냥 신비한 색의 24캐럿 다이아몬드라고 나와 있습니다.
만….”
“그건 그냥 그렇게 써 놓았을 뿐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이터너티퍼플’ 이라는 걸 다 알고 있네.”
공작 부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있었다.
“황후의 무덤이 도굴당했다는 건 이미 도둑 길드에서 유명한 사실이었으니까.”
“도굴이라고요? 그런데 그게 왜 황가의 압수품에…….”
에이드리언은 묻는 도중 답을 깨달은 것처럼 말을 흐렸다.
“황녀가 사주한 거로군요.”
블레인이 입을 열자 공작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확실하네. 황녀가 친한 소녀들을 모아 그 앞에서 공공연히 자랑했다는 소문도 있으니까.”
“보석이 가지고 싶다는 이유로 자신의 조상 무덤을 파헤치다니. 정말 알면 알수록 파렴치하기 짝이 없습니다.”
모두 분개하는 가운데 에이드리언이 다시 의문을 던졌다.
“그게 왜 경매로 나온 걸까요? 황가의 보물이니 다시 환수하면 될 텐데.”
“일단 표면적인 이유는 부정을 타파하고 줄어든 국고를 보강한다는 이유였지만……….”
공작 부인은 입꼬리를 올리며 눈을 빛냈다.
“아마 내가 입수하러 나설 것을 알고 일부러 내보낸 게 아닐까 싶군.”
플로이드 공작 부인의 손에 들어간다면 차기 황후가 될 엘레노어에게 전해질 테고, 겸사로 공작가의 재산으로 국고를 보강할 수 있다.
미나즈의 빈틈없는 성품과 영리함을 볼 때 공작 부인의 예상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더 큰 다이아몬드가 있을 수도 있지만, 역사적 가치와 상징성을 생각하면 이 이상의 보물은 없지. 반드시 손에 넣어 정당한 주인을 찾아 주겠어.”
공작 부인이 의지를 표명하는 것과 동시에 경매가 시작되었다.
유리로 덮인 이터너티 퍼플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내자 사방에서 탄성이 터졌다.
문외한인 블레인이 보기에도 정말 사람을 홀릴 정도로 아름다운 보석이었다.
“경매는 500만 골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입찰하실 분들은 팻말을 들고 호가해 주십시오.”
역시나 시작가부터 만만치 않은 금액이었다.
그러나 경매사의 봉이 소리를 내자마자 사방에서 무서운 기세로 팻말이 올라왔다.
순식간에 천만까지 올라가는 금액에 블레인은 얼이 빠질 듯했다.
“정말 엄청나군요. 낙찰받는 게 만만치 않겠어요.”
그의 말에 공작 부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계속 올리는 건 지루하니까 정리를 한번 해야겠어.”
“네?”
공작 부인이 처음으로 팻말을 올렸다.
“3천만 골드.”
그녀의 또렷한 목소리에 어수선하던 장내의 흐름이 순식간에 멈췄다.
“3번 고객님. 지금 3천만 골드를 부르신 게 맞습니까?”
어지간한 경매에 익숙할 경매사조차 얼이 빠진 목소리였다.
그 표정은 전에 리안이 저택을 사들였을 때 본 것과 비슷하게 보였다.
단번에 가격을 엄청나게 올려 버리자 참가자 대부분이 추격 의지를 잃은 듯했다.
그러나 그거로 낙찰이 이루어지진 않았다.
“3천만 50골드.”
누군가가 경매에 따라붙었다.
블레인은 그가 꽤 유명한 은행가인 후작임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정말 이런 걸 사들일 돈이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공작 부인은 미간을 더욱 찌푸리더니 다시 팻말을 들었다.
“더 부르시겠습니까?”
경매사의 물음에 공작 부인은 숫자를 말하는 대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플로이드 공작가의 가주 크리스티 플로이드입니다.”
플로이드 공작가 라는 말에 장내가 술렁였다.
“나는 저걸 무조건 살 겁니다. 얼마가 됐든 여기 있는 모두를 상대할 여력이 충분합니다.”
오만한 발언이지만, 누구도 나서서 부정하지 못했다.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 장내에 공작 부인의 목소리만이 울렸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장난치면 엿을 먹일 수 있을 만큼 경매에도 익숙합니다. 생각한 가격을 넘어서면 나는 빠질 거고 장난치던 녀석이 지불하지 못해 쩔쩔매는 꼴을 보면서 낙찰하는 건 굉장히 재미있는 일이지요.”
공작 부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방금 팻말을 들어 올렸던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웃었지만, 상대의 안색은 파리해졌다.
“고, 공작 부인.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공개적으로 다른 입찰자들을 위협하는 건 경매의 금기였다.
경매사의 말에 공작 부인은 사과의 말을 던졌다.
을 나섰다.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모두 전설 속의 보석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이걸 주고도 차이고 돌아오면 같이 북방으로 데려가야겠지.”
공작 부인이 그렇게 말할 정도로 멋진 물건이었다.
“지금 리안에게 전하러 가실 겁니까?”
“조금 더 떨어진 곳에서.”
의미를 알기 어려운 대답이 돌아왔다.
찾아가는 보물이야. 어쩌면 황녀가 실각한 건 그런 걸 건드렸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낮게 중얼거린 뒤 공작 부인이 팔을 들어 올리자 매가 휙 날아올랐다.
“잘 전달하고 오너라.”
멋지게 비상한 매는 곧 창공 속으로 사라졌다.
정말 주인을 찾아가는 보물이라면 무사히 도착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블레인은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가
“잘 잤어요?”
리안이 아름다운 보라색 눈동자를 가늘게 만들며 물었다.
그가 말을 하자 맞닿은 몸의 감각이 돌아왔다.
리안의 팔이 머리 아래를 받치고 양팔로 그녀를 감싼 채였다.
몸에 플랫 시트를 돌돌 감고 있었지만, 워낙 얇아 그 너머로 리안의 단단한 가슴이 느껴졌다.
그는 어젯밤 모습 그대로였다.
엘레노어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깨어 있었어요?”
어색하게 묻자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
“한참 전부터.”
“그럼 깨우지 그러셨어요.”
“자는 얼굴이 너무 예뻐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리안의 얼굴이야말로 금방 깨어났는데도 부스스한 기색도 없이 뽀얗기만 해서 바라보기 황송할 지경이었다.
엘레노어는 살짝 시선을 돌리다가 팔에 얹어져 있는 손에서 멈췄다.
그러고 보니 자면서 손길을 느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리안을 빤히 바라보자 그가 찔렸는지 슬며시 실토했다.
“살을 좀 비볐을 뿐입니다.”
아직도 그 이론을 신봉하고 있는 건가?
이미 마음은 생길 대로 다 생겼는데.
리만은 눈을 가늘게 뜬 엘레노어의 뺨에 입술을 가져오며 머쓱하게 덧붙였다.
“야한 건 안 했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야한데.
“조금 만지기만 하면서 일어날 때까지 힘들게 참았습니다.”
그러면서 리안이 다시 또 허리 부근을 더듬기 시작했다.
이미 그에게 길들여져 버린 걸까.
그의 속삭임에 또다시 몸이 뜨거워지는 자신이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받아 주고 싶어도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밤새 무리한 탓이었다.
엘레노어는 다시 또 야릇해지려는 손가락을 잡아 멈추며 고개를 저었다.
“나 이제 힘없어요.”
“당신은…… 가만히 있기만 해도 되니까.”
리안은 멈출 기미 없이 다시 팔을 감았다.
뭔가 말하려던 엘레노어는 창가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느끼고 눈을 돌렸다.
톡톡톡.
뭔가 검은 것이 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움찔하고 놀랐으나 그녀는 곧 그것이 플로이드 공작 부인의 매임을 알아보았다.
“백작님.”
리안을 불렀으나 그는 이미 행위에 열중한 듯했다.
엘레노어는 그의 팔을 흔들며 조금 더 목소리를 높였다.
“창가에 매가 있어요. 공작 부인이 보낸 거 같아요.”
그녀의 재촉에 리안은 무척 아쉬운 기색을 보이며 몸을 떼어 냈다.
그가 떨어져 나가자 얼마나 오래 안겨 있었는지 등 부근이 서늘했다.
시트가 떨어지자 드러난 그의 나신이 눈부셔 황급히 눈을 돌렸다.
리안은 태연하게 침대 곁에 걸린 가운을 걸치고 일어섰다.
창문을 열고 매를 살피는 그에게 엘레노어가 물었다.
“공작 부인께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러면 왜 매를 보내신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사이 리안은 매의 목에서 뭔가를 떼어 냈다.
그리고 창가에 놓인 쪽지에 뭐라고 적더니 접어서 다시 매에게 묶었다.
“잘 부탁한다.”
창문을 열고 매를 날리자 날갯짓에 일어난 바람에 리안의 머리카락이 이 흩날렸다.
배경이 된 푸른 하늘에 어우러져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어머니께 당신의 뜻을 전했습니다.”
리안은 천천히 다시 침대로 들어와 앉으며 말했다.
엘레노어의 눈은 그의 손에 들린 자그마한 꾸러미에 꽂혀 있었다.
“그게 뭐죠?”
“제가 잊은 겁니다.”
잊은 거라고?
묻기도 전에 리안이 여전히 누워 있는 엘레노어의 몸 위로 몸을 굽혔다.
다시 질문을 던질 새도 없이 입술이 겹쳐졌다.
그의 부드러운 입술은 청량하고 다정했다.
질문조차 잊은 채 가라앉으려던 열기가 피어오를 때쯤 리안이 살며시 키스를 멈췄다.
“다시 물을 필요는 없겠죠?”
무슨 의미인지 몰라 엘레노어는 눈을 올렸다.
리안이 뭔가를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그건 엄지손톱보다도 훨씬 커다란다이아몬드였다.
창으로 들어온 햇빛에 반사되자 보랏빛으로 광채를 발산했다.
“그건 설마….”
“어머니께서 당신에게 꼭 어울리는 걸 찾은 모양입니다.”
눈썰미가 좋은 엘레노어는 그것이 이터너티 퍼플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이런 귀한 것을 내가 받다니.
손가락에 반지가 닿자 갑자기 묘한 감정이 솟았다.
원래 이것의 주인이었던 사람이 떠오른 탓일 것이다.
‘그냥 받아도 괜찮은 걸까.’
이제 와서 자신의 자격을 의심한다.
든지 그런 한심한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처음 리안을 만났을 때부터 마음 한구석에 줄곧 남아 있는 껄끄러움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정말 사랑하고 평생 함께할 남자.
나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바치는 남자.
그에게는 내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알 권리가 있는 거 아닐까.
“잠깐만요.”
엘레노어는 반지를 끼우는 리안의 손을 잡아 멈췄다.
지금 해야만 했다.
아니면 평생 얘기하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백작님. 그 전에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요.”
긴장이 치솟아 목소리가 다소 떨렸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엘레노어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리안도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평생 둘만의 비밀로 해 주세요.”
침을 꿀꺽 삼킨 뒤 엘레노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을 거라 믿었던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