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또 이런 데서…….’
엘레노어는 난감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여긴 너무 탁 트인 장소였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관리된걸 볼 때 아마 관리인도 수시로 들락날락할 것이다.
게다가 다소 떨어져 있긴 하지만, 회랑에는 칼라브리아 공작 가 조상들의 초상화가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조상들이 두 눈 뜨고 지켜보고 있는 듯한 홀에서 이런 걸 해도 되나.
얼핏 보면 호리호리한 리안과 달리 정말 강력한 기사였다는 게 외양만으로도 확실히 티가 나서 더욱 압박이 느껴졌다.
“불안합니까?”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엘레노어의 뺨에 입을 맞추며 리안이 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도 오지 못하게 했으니까.”
그렇게 말해도 안심이 되진 않았다.
이런 넓은 데서 외설적인 행위를 하고 있다니.
하지만 뺨에 와 닿는 입술이 달콤해서 밀어낼 기분은 들지 않았다.
“불이라도…”
작게 속삭이자 리안이 살짝 고개를 떼어 냈다.
그가 손을 가볍게 휙 휘두르니 놀랍게도 벽을 밝히고 있던 연금술사의 등빛이 흐릿해졌다.
어떻게 한 거지?
신기함은 금방 머릿속에서 달아나 버렸다.
어느새 풀었는지 옷자락이 스르르벌어지고 있었다.
“이러려고.… 여기로 오자고 한 거예요?”
이런 홀 중앙에 뜬금없이 놓인 커다란 의자도 그렇고, 미리 아무도 오지 말라고 당부한 것도 그렇고, 수상하다.
“네.”
리안은 조금도 빼지 않고 깔끔하게 인정했다.
“사실 위에도 준비해 뒀습니다. 바로 옮겨도 괜찮도록….….”
반드시 역사를 이루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어차피 준비됐다면 다른 데로 옮기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나 리안은 움직일 기미가 조금도 없었다.
도리어 허리끈을 풀어내는 손길에 몸을 일으키려다 엘레노어는 움찔했다.
“우선 한 번 하고.”
작게 중얼거리더니 리안은 엘레노어의 뺨을 잡아 자신에게로 고정했다.
“다른 데 말고 나만 봐요.”
곧 겹쳐진 부드러운 입술이 새기는 감각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뜨거운 숨을 흘리자 그는 고개를 살짝 들고 다시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
잠시 방으로 올라갈 정도의 여유도 없는 걸까.
너무나도 다급한 손길에 순간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쳤다.
“아이 가지고 싶다고 했죠……….”
저도 모르게 생각이 말로 흘러나왔다.
그녀의 중얼거림에 리안이 가늘게 뜨고 있던 눈을 들었다.
그리고 야릇한 감각에 밀어내는 엘레노어의 손목을 쥐었다.
“이미 나는 당신 아니면 안 되니까.”
리안의 속이 드레스 자락으로 침입했다.
그러나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대신 그는 아슬아슬한 선에서 움직이며 엘레노어를 애태웠다.
제멋대로인 손끝과 입술에 허덕이는 사이 리안의 옷자락도 하나씩 바닥으로 떨어졌다.
얇디얇은 한 장의 옷 너머로 그의 몸이 느껴졌다.
밀착한 그의 몸은 이미 완전히 흥분한 상태였다.
“처음보다 훨씬 다정하게 할 테니까.”
망설이는 엘레노어를 밀어붙이는 대신 리안은 조르듯 귓가에 속삭였다.
그리고 맞닿은 몸을 천천히 그녀에게로 비볐다.
“응?”
재촉하듯 몸을 꾹 누르는 그를 엘레노어는 새침하게 올려보았다.
싫다고 하면 물러날 것도 아니면서 자꾸 확인받으려고 하다니.
나빴다.
확 깨물어 버리고 싶은데 갑자기 리안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좋아.”
뭐가 좋다는 거지?
의아해하는 엘레노어를 보며 그가 쿡쿡 웃었다.
“당신 눈빛 변했어요.”
“눈빛이요?”
멍하니 되묻자 그는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야하게.”
내가 언제 그런 눈을 했냐고 항의 하고 싶었으나 리안이 몸을 움켜쥐는 바람에 삼켜져 버렸다.
“하… 백작님….”
벌어진 입술 사이로 어쩌지도 못할 달뜬 숨이 흘러나왔다.
몸을 뒤트는 그녀의 귓가에 그는 최면이라도 거는 것처럼 속삭였다.
“당신의 안을 내 모양대로 새기고…… 기억하게 할 겁니다.”
밀어내는 손에 더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다시 떨어지지 못하게.”
늘 무심한 눈동자에 드물게 강한 의지가 서렸다.
숨을 몰아쉬는 붉은 입술 사이로 드러난 혀가 색정적으로 보였다.
지금 이런 말 쏟아 내고 있는 게 그 리안 칼라브리아가 맞나?
과묵하던 소설 속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사랑에 빠졌을 때도 지금과는 달랐는데 말이다.
그런 생각들도 점점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이미 리안은 자리를 잡았고, 그녀역시 더는 기다릴 수가 없었다.
벽에 반사되어 울리는 숨소리들도 이젠 요란하게 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가 되었다. 연인들의 소리가 칼라브리아 공작 성에 퍼졌다.
*
블레인은 마차에서 내려 앞에 내걸린 간판을 올려 보았다.
제국 최고의 경매장 로즈우드 파크.
토지 경매 중인 리안을 따라온 후 제법 오랜만의 방문이었다.
오늘은 그때와 달리 상당한 인파로 북적댔다.
화제에 오른 여러 가지 보물들이 경매에 부쳐졌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든 게 분명했다.
새로운 황제 미나즈는 기존 황가의 부정을 아주 열심히 탈탈 털었고 부당한 방법으로 축재한 황녀의 보물을 몰수했다.
그것들은 경매 후 국고에 환수되어 피해자 보상이나 민생에 쓰일 예정이라 했다.
블레인은 평소보다 무척 두꺼워진 팸플릿을 들고 와 공작 부인에게 건네며 물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음.”
공작 부인은 유심히 팸플릿을 내려다보았다.
아침 일찍 공작부인이 경매장에 간다는 말을 듣고 따라나서긴 했지만, 그녀가 무엇을 찾기 위해 왔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저 수도에 익숙하지 않을 공작부인을 안내하고자 한 건데 그뿐만 아니라 비앙카스타, 에이드리언도 함께 가고 싶다며 동행을 자청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그로서는 영편치 않은 사람도 하나 끼어 있었다.
“사람 참 많군.”
칼라브리아 공작이 언제나처럼 미간을 찌푸리며 툴툴거렸다.
처음 출발했을 때도 그랬지만, 도착하고 나서도 영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물건이라면 팜블리코 애비뉴에서 사면 될 텐데.”
“나는 최고만 선물해요. 아무 데서나 구할 수 있는 거로는 안 된다고요.”
공작 부인이 깐깐한 목소리로 말했다.
칼라브리아 공작은 입가를 비죽대더니 블레인을 보며 물었다.
“그 애는 사치하는 편인가?”
엘레노어를 뜻하는 게 분명했다.
제대로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블레인은 잠시 그녀를 되새겨보았다.
분명 소박한 구석이 있지만, 엘레노어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건 역시 화려한 파티, 호화로운 드레스와 값비싼 샴페인, 보석 따위였다.
특히 칼라브리아 백작 저를 꾸미며 돈을 쓰는 스케일은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공작 부인의 허락이 있었다 해도 자신이라면 그런 흉내도 내지 못할 터였다.
“절약하는 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최대한 객관적으로 답하자 공작 부인이 화통하게 웃었다.
“최고 재벌 가문에는 그런 인재가 필요한 법이지. 돈은 쓸 줄 알아야 벌어들일 수 있는 법이니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타인에게 작위를 넘기겠다니. 너무 성급한 거 아니오?”
“그녀 이상으로 적임은 없어요.”
투덜대는 공작의 말을 일축하며 공작 부인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상업을 멸시하고 그제 고고하려고만 들어요. 하지만 귀족이라 해서 보석을 달지 않아도 찬란하고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건 아니라고요.”
“귀족이라고 전부 다 그런 건 아닐 텐데. 돈에 눈이 먼 자는 얼마든지 있소.”
“그렇죠. 대신 대부분 품위가 있잖아요. 그렇게 기품 있으면서 계산적인 건 엄청나게 진귀한 재능이라고요.”
공작 부인은 즐거운 듯 눈을 빛냈다.
“돈 쓸 줄 아는 만큼 술도 좀 마실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블레인이 끼어들어서 대신 대답했다.
저번 연회에서 분명 엘레노어와 함께 마시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필름이 끊긴 건 자신뿐이었다.
“그거야 자네가 너무 약한 거 같네만.”
“저도 어디 가서 약하다는 말은 안듣습니다!”
분노해서 항변했지만, 공작 부인은 별로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본전도 못 찾을 말 대신 블레인은 슬그머니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보다 뭘 사 주시려고 그러십니까?”
“지금 가장 필요한데 리안이 아마도 준비하지 않은 거.”
그렇게 말해도 딱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애초에 이 로즈우드 파크는 익룡의 부리부터 300년을 살았다는 장수노인의 뼛가루까지 살 수 있는 곳이니 범위가 너무 넓었다.
공작 부인은 공작 쪽으로 눈을 흘기며 중얼거렸다.
“이 남자는 내게 카리타 남작의 그림을 사 준 게 전부였지.”
“넷? 그거 엄청나게 비싼 거 아닙니까?”
카리타 남작은 제국 역사상 최고의 화공이라 불리는 예술가였다.
그러나 공작 부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홀 어디에도 걸 데가 없는 엄청난 크기였다고. 그런 관심 없이 가격만 보고 준비한 걸 받아도 의미가 없잖아.”
확실히 그렇긴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공작 부인의 발길이 멈췄다.
앞에 우뚝 선 경매장에 걸린 팻말을 본 블레인은 속으로 납득했다.
[여신의 눈물 경매장]
세계 최대의 보석 경매장이었다.
공작 부인은 블레인을 흘깃 보며 물었다.
“리안은 보석에 대해 뭔가 아는 게 있던가?”
“……투명한 게 다이아몬드고 붉은 게 루비라는 거 정도는 알 겁니다.”
사실 그조차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러니 직접 나서야겠지.”
“뭐 미리 마음에 두고 오신 상품이라도 있습니까?”
블레인의 질문에 공작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제법 노리는 사람이 많다고 하더군.”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주변에 이상할 정도로 좋은 옷을 입은 고위귀족들이 잔뜩 경매장으로 들어서는 듯했다.
“난 내가 노리는 건 빼앗기지 않아. 정확히 손에 넣고 그 변두리 대공이 다시는 입도 열지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
세계 최고 재벌가의 수장이 눈을 빛내자 어쩐지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자, 들어가지.”
블레인은 허둥지둥 공작 부인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