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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115화 (115/120)

§ 제115화

엘레노어는 침을 꿀꺽 삼키며 리안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쿵쿵 뛰어서 소리가 가슴을 뚫고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으려니 리안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벽을 가리켰다.

홀린 듯 따라가 보자 그 끝에는 거대한 깃발이 걸려 있었다.

“벽에 장식된 문장…… 알아보시겠습니까?”

문장?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으나 엘레노어는 순순히 문장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깃발의 문장이 바깥에 걸려있던 것들과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최근에 무척 자주 봐서 눈에 익은 것이었다.

“플로이드 공작가의 문장이로군요.”

대답하며 엘레노어는 의문에 휩싸였다.

왜 플로이드 공작가의 문장이 칼라 브리아 공작령에 있는 걸까.

“어머니께서 청혼을 수락하셨을 때 아버지께서 걸어 두신 겁니다. 플로 이드 공작가와 칼라브리아 공작가의 결합을 축하하는 상징이라 하셨지요.”

리안이 마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설명했다.

“그래서 이 말을 하기에 적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짐짓 모르는 듯 물었으나 솔직히 무슨 말이 나올지 알 것 같았다.

“혹시….”

리안은 잠시 말을 끌다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제 어머니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

그러나 리안에게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과 다른 것이었다.

엘레노어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아주 좋은 분이세요. 존경하고 또 닮고 싶다고 생각해요.”

그녀의 대답에 리안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께서도 당신을 무척 좋아하십니다. 항상 당신의 됨됨이와 능력, 그리고 성품에 대해서 크게 칭찬하십니다.”

엘레노어는 진심으로 공작 부인을 좋아하고 인정받고 싶었기에 무척 기뻤다.

“어머니께서는 당신과 더 가까워지 길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어젯밤 직접 새로운 황제 폐하께 청을 올렸고 바로 답을 받으셨다 합니다.”

“무슨 답이요?”

황제 이야기까지 나오자 기쁘던 마음이 다시 긴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리안에게서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왔다.

“제 어머니께서 당신을 플로이드공작가의 양녀로 입양하시겠다 합니다.”

“네?”

순간 엘레노어의 머릿속이 멍해졌다.

양녀라니. 이게 무슨 말일까?

“물론 당신 의사가 가장 중요합니다만, 당신 역시 어머니를 좋아하니 마침 잘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잠깐… 의미를 잘 모르겠어요.

저를 왜 양녀로……?”

너무 엄청난 일이라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혼란스러워하는 그녀를 위해 리안이 설명을 이어 갔다.

“말했다시피 저는 이번에 칼라브리 아 공작가를 이었습니다. 또 황실의 후계자 제의를 받아들이는 대가로 곧 대공 작위를 받게 될 예정입니다.”

제국 최초의 대공이 되는데도 리안은 별로 기쁜 기색 없이 담담한 말투였다.

하긴 황위를 거절하고 받은 자리이니 당연한지도 모른다.

“어머니께서는 플로이드 공작 가문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지만 제 적성은 칼라브리아공작 가문에 훨씬 어울린다고 여기고 계시지요.”

세계 최고의 기사인 리안이 무가인 칼라브리아 공작가에 잘 어울린다는 것은 두말하면 입만 아픈 사실이었다.

엘레노어가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리안이 다시 말했다.

“저는 제국 기사단장을 비롯해 대공이 되어 맡을 여러 가지 책임으로 인해 무척 바쁩니다. 그리고 플로이 드 공작가는 남는 시간을 투자해서 이끌기에는 너무나 거대합니다.”

플로이드 공작가는 단순한 재벌가가 아니라 제국의 경제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며 조절하는 기관이나 다름없었다.

제국이 사실상 세계 경제의 중심이니 그 자리의 무게와 책임은 말할 필요도 없이 막중했다.

“따라서 어머니는 후계 문제에 대해 늘 고민하셨습니다. 원래는 적당한 인재를 양성해 저를 보좌해서 가문을 끌어 나갈 생각이셨다고 합니다만…….”

리안이 말을 조금 끌며 이야기를 본론으로 이끌어갔다.

“지금은 당신이 그 적임자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가문으로 입양해 가르친 후 장차 플로 이드 공작 작위를 물려주겠다고 하십니다.”

플로이드 공작?

내가?

“마, 말도 안 돼요.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엘레노어의 입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분명 귀족가에서 재능 있는 가문의 방계를 양자로 입양해 작위를 물려 주는 경우는 있었다.

하지만 제국의 공작이라는 최상급 대귀족이 아무 상관도 없는 평민을 입양해 작위를 잇게 하는 것은 들어 본 적도 없는 파격이었다.

“호법청 수장인 로우앤 공작이 이미 법리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확인했고, 보르미아 공작님도 행정적 승인을 완료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허락하셨으니 당신만 수락하면 됩니다.”

리안의 반박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들이 말도 안 되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들이란 걸 잠시 잊었다.

황망한 엘레노어를 보며 리안이 다시 물었다.

“싫은 겁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공작 작위와 세계 최고의 부를 동시에 받을 수 있는데 싫다는 건 말도 안 된다.

하지만 뭔가 부정한 선물을 받는 것처럼 마음이 꺼림칙했다.

엘레노어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확인하고 싶었다.

“제가.… 백작님과 맺어질 거기 때문에 그런 판단을 내리신 건가요?”

“저와 상관없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오히려 저로서는 상당히 난처해진 셈입니다만….”

리안의 말대로 그에게는 좋을 것이 없었다.

평범하게 보자면 그가 받을 수 있던 큰 작위와 재산을 이쪽에서 가로채 간 셈이나 다름없었다.

“백작님은 괜찮으세요?”

“뭐가 말입니까?”

“원래 백작님 거잖아요. 제가 재산과 작위를 가지고 도망가면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엘레노어의 말을 듣자마자 리안의 표정이 굳었다.

그런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건가.

어쩌면 공작 부인이 그와 맺어지지 않으면 환수해 가겠다는 장치는 해두지 않았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다 하는 사이 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너무 슬플 겁니다. 좌절해서 정도를 벗어나거나 매일 밤 베개를 눈물로 적실지도 모르겠군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얼굴에 무척 건조한 말투여서 농담인지 진담인지구별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제게 그런 걸 주시는 거예요.”

“내가 슬픈 건 당신이 내 곁을 떠나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지 작위를 도둑맞았다는 억울함 때문은 아닐 겁니다.”

이 남자는 대체 욕심이란 게 없는 거야?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묵묵히 있는 그의 손을 리안이 천천히 감싸 쥐었다.

“작위를 받고 부유한 귀족이 되면 나를 떠날 겁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

생각해 보면 엘레노어 역시 작위같은 거와 상관없었다.

리안이 가난해도 부자여도 그의 곁에 있고 싶은 마음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려니 리안이 팔을 뻗어왔다.

“안 돼. 아무 데도 못 갑니다.”

그는 엘레노어를 가두듯 품에 안았다.

“내게만 안기고, 나만 보세요.”

최면 같은 힘을 지닌 절절한 목소리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렇게만 한다면 나는 당신을 위해 모든 걸 바칠 겁니다.”

그의 말 하나하나가 새기듯이 심장이 박혔다.

그냥 연인 간의 흔한 속삭임이지만, 그가 해 온 일을 생각하면 무게감이 달랐다.

엘레노어는 붙잡듯 그의 팔을 꼭 쥐었다.

밀착한 리안의 심장 역시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리안은 흥분을 가라앉히듯 숨을 깊이 내쉰 후 살짝 몸을 떼어 냈다.

그리고 엘레노어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어머니께서 저와 상관없이 결정하셨다는 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로서는 상당히 급해진 셈이지요.”

뭐가 급해졌다는 걸까.

엘레노어는 눈을 깜빡이며 그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황제 폐하께서는 공작끼리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안을 상정했습니다.

이번 일의 배경이 된 만큼 빠른 처리를 요구했으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 통과될 겁니다.”

미나즈의 추진력과 정치력, 그리고 귀족들의 이해관계를 볼 때 금방 실효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진짜 그 이야기가 나올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엘레노어는 피하지 않고 리안을 마주 보았다.

“엘레노어.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뜨거운 목소리가 힘 있게 심금을 울렸다.

예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슴에 미치는 파문이 줄어드는 건 아니었다.

등줄기에 전율이 일고 눈물이 날 것처럼 눈가가 뜨거워졌다.

“교제 신청을 위해 반란을 일으키더니… 이번에는 첫 데이트에서 청혼인가요?”

엘레노어는 떨리는 입매를 가다듬으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저는 백작님의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다고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숨 섞인 엘레노어의 중얼거림에 리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오랜 시간 당신에 대한 마음을 품으며 여러 가지 상상을 해 왔습니다만…… 설마 첫 만남에서 결박당한 채 몸을 만져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리안의 말에 엘레노어의 양 뺨이 확 붉게 물들었다.

“그렇게 마음껏 더듬어 놓고 책임지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리안은 엘레노어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면서 심술궂게 말했다.

엘레노어가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했다.

“더듬은 거, 백작님이 그날 충분히 복수하신 것 같은데요.”

처음에 도발한 건 사실이지만, 그 몇 배로 갚았을 텐데.

리안도 차마 부정하지 못하고 슬쩍 말을 돌렸다.

“그것과 다른 문제입니다. 당신 때문에 호색한이 돼 버렸으니까.”

겨우 한 번으로 호색한이라.

새침하게 눈을 뜨고 바라보자 리안은 예뻐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리 와요.”

그는 엘레노어를 당겨 중앙에 있는 넓고 긴 의자로 향했다.

그리고 엘레노어의 허리를 안아 자신의 무릎에 앉힌 뒤 절절한 시선을 던졌다.

“대답…… 들을 수 있습니까?”

보라색 눈동자 가득 초조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엘레노어의 얼굴에 수줍은 기색이 어렸으나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좋아요.”

목소리가 벅찬 마음처럼 무척 떨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몇 번이나 마음을 확인한 지금까지도 그에게 이런 대답을 한다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한 번 더 확인하듯 좀 더 또렷한 발음으로 되뇌었다.

“백작님과 결혼할게요.”

자신에게 솔직했다면 이미 백 번도 넘게 인정하고도 남았을 마음이었다.

절대 넘어설 수 없을 거라 여겼던 현실적인 문제.

그 모든 걸 지나서 지금 이렇게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리안의 입술이 그녀의 것처럼 떨렸다.

“사랑합니다.”

어떤 미사여구보다 진심이 함축된 한마디였다.

엘레노어는 리안의 목을 감으려 팔을 들었다.

채 안기도 전에 리안의 다급한 입술이 다가왔다.

갈망하듯 입술을 겹치고 깊이 머금는 그의 움직임에 녹아 버릴 것 같은 쾌감이 몰려들었다.

힘이 빠진 엘레노어의 허리를 단단히 받치며 리안은 깊이 파고들었다.

애타는 손이 등을 더듬다가 곧장 드레스의 여밈끈으로 향했다.

당황한 엘레노어가 몸을 살짝 뒤로 뺐다.

“잠깐….”

그러나 채 말을 잇기도 전에 다시 입술이 다가왔다.

너무 빠르다. 게다가 여긴 너무 트인 공간이기도 했다.

이러는 사이에 경비병이라도 오는 게 아닐까 불안해서 집중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리안의 대담한 손길은 멈추지 않았고, 몸은 결국 그에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요.”

리안이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기 위해 입술을 떼어 낸 사이 엘레노어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급할 필요는…….”

그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소용없어 보였다.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상상도 못 할 겁니다.”

리안은 입술로 엘레노어의 뺨에 꼼꼼히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곁에 두고 안지 못해 미쳐 버릴 것 같았습니다. 매일 당신을 생각하며 잠들었고, 일어나서도 당신만 생각했습니다. 싸우는 동안에도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계속 당신에게 닿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흥분했는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무심하고 금욕적인 얼굴로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는 거야?

엘레노어가 부끄러움에 입술을 깨물자 리안이 어르듯 귓가에 입을 맞추며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내가 그렇게 밝혀서 싫습니까?”

그렇게 대답하기 힘든 질문은 반칙이다.

리안이 보라색 눈을 조르듯 빛냈다.

“밀어내지 마세요.”

리안의 소름끼칠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이제 내 거니까.”

애절한 눈빛과 전혀 다른 손이 무례하게 엘레노어의 몸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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