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와아아!”
음악이 끝나자 함성이 터졌다.
그제야 엘레노어는 주변 상황을 깨닫고 흠칫했다.
‘윽, 다 쳐다보고 있네.’
광장 중앙의 가면무도회.
오랜만에 축제에 참석한 엘레노어는 물 만난 고기처럼 들떴다.
악단의 연주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자 리안이 춤을 신청했고 두 사람은 북적이는 인파 틈으로 섞여 들었다.
그렇게 몸이 가는 대로 신나게 춤을 추다 보니 두 사람 주변으로 원이 만들어지고 구경꾼들이 생긴 것이다.
가면 때문에 주변 시야가 너무 좁아서 눈치채지 못했나.
아니, 그보다는 바로 앞에 시선을 붙잡아 두고 있던 사람 때문일 것이다.
“한 곡 더 추시겠습니까?”
미소 짓는 입가가 너무도 수려했다.
그것만으로도 구경꾼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더 시선을 끌어 좋을 게 없으므로 엘레노어는 고개를 젓고 리안과 함께 구석으로 물러났다.
연못 근처의 다리로 간 엘레노어는 난간에 기대서 리안을 바라보았다.
“백작님이 춤을 추실 줄은 몰랐는데요.”
사교계 내로라하는 파티를 다 다녔기에 그의 솜씨가 얼마나 수준급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리안은 기사단 정기 보고에서 재채기만 해도 다음 날 사교계의 화제가 될 정도로 일거수일투족이 알려진 초 셀레브리티.
춤을 잘 추거나 즐긴다면 소문나지 않았을 리 없었다.
“댄스를 좋아하셨어요?”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리안의 대답은 묘하게 껄끄럽게 들렸다.
엘레노어가 눈썹을 들며 쳐다보자리안이 곧 솔직히 인정했다.
“즐기지는 않지만, 당신이 좋아한다고 하기에 조금 연습해 보았습니다.”
조금 연습한 게 그거라고?
뭐 그 인간 같지 않은 운동 신경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당신이 좋아하는 걸 함께 하고 싶어서.”
“그래서 배운 건가요?”
“음, 혼자 해 본 겁니다.”
혼자?
방에서 혼자 연습했을 그를 생각하니 좀 귀엽게 느껴졌다.
엘레노어는 쿡쿡 웃은 뒤 고개를 저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제가 좋아하는 건 둘이 함께 재밌을 수 있는 일이에요. 백작님은…….”
리안이 손가락을 들어 엘레노어의 말을 막았다.
“호칭을 바꾸는 게 좋겠습니다.”
구석으로 도망쳤지만, 여전히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름으로 부르시겠습니까?”
엘레노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의 제안에 따라 보았다.
“리안.”
이름을 부르자 리안이 씩 웃었다.
기뻐하는 것 같은데 어쩐지 쑥스러워졌다.
남자랑 단둘이 노는 게 너무 오랜 만이라 이렇게 설레는 걸까?
아니다. 이건 다 상대가 리안이기 때문이다.
어색해하던 엘레노어는 슬며시 말을 돌렸다.
“아, 오리가 있네요.”
맑은 연못에 연금술사의 등을 단귀여운 오리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불빛이 물에 반사되어 무척 사랑스러운 분위기였다.
입을 헤 벌리고 구경하고 있으려니 누군가 엘레노어의 옷자락을 당겼다.
“아가씨, 아가씨.”
내려 보니 남루한 옷을 입은 작고 어린 소녀가 있었다.
“오리에게 먹이를 주시겠어요?”
작은 몸에 비해 너무나 큰 바구니를 내미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래도 다행히 잘 팔렸는지 바구니에는 동전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렇게 할까요.”
엘레노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리안이 앞으로 나섰다.
그가 다가서자 소녀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가면을 쓰고도 자기 나이 반밖에 안 되는 소녀의 마음을 뒤흔들다니..
참으로 죄 많은 남자다.
“오리 머, 먹이는 동전 한 닢이에요.”
소녀는 첫사랑을 깨달은 듯한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리안이 곧 금화를 꺼내 내밀었다.
“어, 이렇게 많은 돈은 없는데….….”
“있는 만큼으로 괜찮습니다.”
라고 대답하더니 리안은 바구니에 가득 쌓여 있는 동전을 대뜸 손에 쥐었다.
그 모습을 보고 엘레노어는 당황했다.
금화가 물론 몇 십 배는 가치 있다지만, 잔돈을 전부 빼앗을 필요는 없을 텐데?
뜻밖에 계산이 철저한 걸까?
이런 가난한 어린 소녀를 상대로까지?
“받으십시오.”
리안은 한 움큼을 엘레노어에게 건넨 뒤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난간으로 다가가더니 상상치도 못한 행동을 했다.
촤아악—
리안이 집어 든 동전을 연못으로 확 뿌렸다.
엘레노어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놀란 오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뭐…… 하시는 거예요?”
어안이 벙벙한 목소리로 묻자 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잘 먹지 않는군요. 배가 부른 걸까요.”
엘레노어는 잠시 그의 행동을 이해해 보려 노력했다.
그리고 곧 그가 이런 이유를 깨달았다.
“동전 한 닢을 먹는 게 아니고
“아….”
그녀가 말을 맺기 전에 리안 역시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했다.
잠시 멍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하얀 귓가에서부터 뺨으로 홍조가 번져 나갔다.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나도 모르게.”
“아하하하!”
엘레노어는 웃음을 터뜨렸다.
“가뜩이나 낮은 평가가 더 내려간 것 같군요.”
리안이 낮은 소리로 푸념했다.
지금보다 평가가 더 올라가면 너무 사기일 텐데.
잘생긴 남자가 귀엽기까지 하니 큰 일이다.
“첫 데이트라 긴장하고 있었던 겁니다.”
리안이 낮게 변명했다.
그의 말대로 리안은 처음부터 뻣뻣해 보이긴 했다.
엘레노어는 킥킥 웃다가 곧 몸을 돌렸다.
그리고 리안이 쥐여 준 동전을 획연못으로 던졌다.
“엘레노어?”
리안이 왜 그러냐는 듯 엘레노어를 쳐다보았다.
의문에 대답하기 전 주변에서 환호성이 일어났다.
“와아아아아!”
주변에 있던 가난한 소년과 소녀들이 연못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방금 두 사람이 요란스레 뿌린 동전을 찾는 것이다.
“배고픈 건 오리만은 아니겠지요.”
엘레노어의 말에 리안은 이해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돈도 돈이지만, 첨벙거리며 물장난을 치는 아이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행복한 광경이었다.
“금화 더 있으세요?”
리안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엘레노어는 주변에서 오리 먹이나 꽃을 팔던 아이들에게 금화를 하나씩 나눠 주고 동전들을 받아 연못으로 뿌렸다.
곧 아이들뿐만 아니라 젊은이들까지 뛰어들었다.
“우리도 들어가요.”
두 사람도 바지와 스커트 자락을 걷고 연못에서 물놀이를 했다.
반짝이는 빛 속에서 물을 튀기며 파묻힌 동전들을 줍고 기뻐하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는 건 무척 즐거웠다.
둘은 웃고 떠들고 길거리에서 음식을 사 먹으며 축제를 만끽했다.
그러다 보니 밤이 깊어 축제 첫날의 열기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정말 즐거웠어요.”
“저도 그렇습니다.”
동조하는 리안의 표정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또 처음보다 훨씬 편안해 보이기도 했다.
“이제 긴장은 다 풀렸어요?”
리안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백작님이 준비한 데이트를 하러 갈까요?”
별생각 없이 말을 꺼낸 엘레노어는 실수했다고 느꼈다.
리안의 눈에 야릇한 빛이 비쳤다.
“따라오십시오.”
열기를 띤 리안의 목소리에는 거부 할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었다.
엘레노어는 홀린 듯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리안이 이끄는 대로 마차에 올라탔다.
*
리안은 일라이를 보내고 직접 마차를 몰았다.
가까울 줄 알았는데 마차는 팰리시티를 벗어나 한참을 달렸다.
밤이 아주 야심해졌을 무렵.
꾸벅꾸벅 졸고 있던 엘레노어는 몸을 흔드는 손길에 잠에서 깨어났다.
“도착했습니다.”
여전히 가면을 쓴 채인 리안이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멍하니 마차에서 내린 엘레노어는 주변을 둘러보고 눈을 크게 떴다.
“여기는….”
거대한 해자 너머 웅장한 성이 펼쳐져 있었다.
정확히는 성이 아니라 요새 같은 분위기.
우아한 라 플로이드나 실용적인 라인 오브 에이브로트와는 달리 투박한 대신 무척 튼튼한 철옹성 같은 이미지였다.
둘러보고 있는 엘레노어에게 리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칼라브리아 필드입니다.”
칼라브리아 공작령인가.
그렇다면 그가 이곳에 데려온 이유는…..
“아버님께서 어젯밤 저를 불러 물러날 뜻을 밝히셨습니다.”
엘레노어는 리안에게로 천천히 돌아섰다.
“그러실 필요가 없다고 만류해 보았습니다만, 칼라브리아의 이름은 제국 기사단장에게 이어져야 한다며 뜻을 굽히지 않으시더군요.”
“그럼 백작님께서 공작… 이 되신 거로군요.”
이미 기정된 사실이었으므로 이상할 건 없었지만, 엘레노어의 목소리에는 여운이 남았다.
백작 작위만으로도 평민과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
리안이 속한 곳은 저택 안의 파티고, 이제 자신에게 어울리는 곳은 아까의 서민 광장이었다.
의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도 껄끄러운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와서 리안의 진심을 의심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항상 자신의 능력으로 당당하게 살아온 스스로에 자신이 있는 만큼 기울어진 처지에 서야 한다는 입장 자체가 무척 불편한 것이다.
“안으로 들어갑시다.”
그래도 자신의 감상 때문에 리안이 준비한 성의를 무시하고 싶진 않았다.
엘레노어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 들어갔다.
높은 성벽 너머는 거대한 연병장이었다.
이름난 무가답게 잘 가꿔진 꽃밭대신 기사들이 훈련할 수 있는 목판이나 과녁, 각종 체력 단련 시설들이 있었다.
두 사람은 곧 기다란 회랑에 접어들었다.
“칼라브리아 나이츠 홀입니다.”
리안이 짧게 설명했다.
긴 돌벽에는 역대 칼라브리아 가문을 빛낸 기사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그 앞에는 오래된 갑옷들과 그들이 사용했을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제국보다도 긴 시간 존재했던 칼라 브리아 가문의 역사 그 자체였다.
엘레노어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아주 멋진 곳이네요.”
그녀의 말을 들은 리안이 입꼬리를 올렸다.
솔직히 리안이 준비한 데이트는 뭔가 로맨틱한 것일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가문의 홀에 데려오다니.
멋지긴 하지만 어쩐지 그답지 않았다.
생각했던 거보다 가문을 자랑스레 여기고 있었던 걸까.
두 사람은 어느덧 회랑 끝에 다다 랐다.
“와….”
엘레노어의 입에서 다시 한번 감탄 사가 흘러나왔다.
탁 트인 웅장한 홀은 연금술사의 등으로 장식되어 환상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스테인드글라스 천장이 오묘한 빛을 투과시켰고 벽에 일부러 장식한 듯한 붉은 장미가 걸려 있었다.
리안은 엘레노어를 중앙에 있는 단상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엘레노어.”
“네, 백작님.”
리안은 천천히 손을 뻗어 엘레노어의 얼굴을 가린 가면을 벗겼다.
그리고 자신이 쓴 가면의 끈도 풀기 시작했다.
사르륵.
리본이 풀리며 이 안의 무엇보다도 환상적인 리안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보라색 눈동자가 무척 긴장한 빛을 띠고 있었다.
아주 중요한 말이 나올 듯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당신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 이곳까지 왔습니다.”
리안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감미롭게 홀 안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