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113화 (113/120)

113화

벽과 클로드 사이에 갇힌 미나즈는 생각했던 거보다 더 작고 가녀렸다.

그만큼 크던 키 차이를 전부 따라 잡고 오히려 벌리고 있지만, 그녀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어린 꼬마로 남아 있는 게 억울했다.

어떻게 하면 적어도 남자로 봐주는 걸까.

그런 생각에 골몰한 클로드는 자신이 미나즈에게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저 눈앞의 육감적인 붉은 입술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그의 눈이 저도 모르게 살짝 내려 감기려는 순간이었다.

“풋!”

미나즈의 입술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클로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 웃는 겁니까?”

“아니, 하하. 뭔데, 이거. 키스라도 하려는 거야?”

웃음 섞인 말에 팽팽해져 있던 긴장이 한순간에 풀려 버렸다.

또 이건가.

분위기가 깨지는 것과 동시에 맥이 빠져서 클로드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뒤로 뺐다.

그가 돌아서자 미나즈가 금방 따라와 등을 두드렸다.

“뭐야, 화난 거야? 미안, 미안. 삐치지 마.”

또 어린애 취급이다.

화난 적 없는데 그 말에 도리어 부아가 치밀었다.

“됐습니다. 일이나 할 테니 내버려 두십시오.”

“에이, 그러지 말고, 애초에 이거 다 네 잘못이잖아?”

내 잘못이라고?

클로드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미나즈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축제를 여자와 함께 즐기고 싶었으면 미리미리 상대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어야지.”

마치 남의 일 같은 말투였다.

내가 누구랑 즐기고 싶었는지 모르지 않을 텐데.

그냥 무시하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넘어가고 싶은 걸까.

말을 꺼내기까지 정말 죽도록 고민했는데 그런 반응이라면 너무하다.

클로드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물었다.

“시치미를 떼려는 겁니까?”

“어? 아닌데.”

미나즈는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는 오히려 질문을 던졌다.

“내가 널 무시했다는 건 또 무슨 말이야? 그때 그렇게 가고 나서 한번도 찾아오지 않은 건 너잖아.”

“그 후로도 몇 번 만났습니다만.”

너무 놀라 거의 혼이 나간 상태긴 했지만, 황제 즉위식에도 갔었고, 그 후의 국무 회의나 법률 정비를 위한 회담 등, 대부분의 공무에 얼굴을 비췄다.

대체 어떻게 지나갔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도 그녀가 건조하고 사무적인 태도로만 대했다는 건 확실했다.

“공적인 자리였잖아. 사적으로 할 얘기가 좀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그녀의 말대로 한 번도 찾아가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왜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어?”

미나즈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이 부분을 질책당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므로 클로드는 살짝 당황했다.

“그거야.”

고백하자마자 상대가 갑자기 황제가 되면 못 찾아가는 게 당연하다.

그걸 말로 매끄럽게 표현하기가 어려워 머뭇거리자 미나즈가 그를 지나쳐 걸었다.

그러고는 방 중앙에 있는 안락의자에 휙 걸터앉으며 말했다.

“어제 법관들이 공작 간의 혼인을 금지하는 법안을 호법청에 제출했어.”

클로드는 호법청의 수장이었으므로 당연히 알고 있었다.

법관들의 명의로 올라왔으나 그 법안이 사실 미나즈의 뜻이라는 것도 말이다.

그것이 그녀의 대답처럼 느껴져서 어제는 못 하는 술도 한잔 마신 참이었다.

“뭐 나중에 또 리안 같은 녀석이 튀어나와서 공작끼리 결혼을 허락해 달라며 반란을 시도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때 가서 걱정할 문제고 말이지.”

미나즈가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의미를 모르겠다.

어쩐지 싫은 흐름으로 갈 것 같아 클로드는 시선을 내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명확히 해주십시오.”

거절할 거라면 확실히 해 주는 게 좋다는 생각과 확실한 거절을 듣고 나서 대체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막막함이 동시에 몰려왔다.

“너 말이야.”

잔뜩 굳은 그의 표정을 보며 미나 즈가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사람한테 고백해 놓고 대답도 듣기 전에 그렇게 거절당한 사람처럼 굴지 마.”

“의미를….… 모르겠습니다만.”

미나즈가 도톰한 입술을 비죽거리며 다시 말했다.

“나는 리안이 준비되는 대로 황제 자리에서 내려올 거야. 대충 10년에서 20년 정도의 시한부 황제가 아닐까.”

황위를 거부한 리안이나 손에 넣은 황위를 쉽게 양위하겠다는 미나즈나무척 비범하게 느껴졌다.

아마 그래서 내가 저 두 사람을 이렇게나 열렬히 좋아하는 거겠지.

미나즈가 고개를 기울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네가 뭔가 해 보려면 그사이에 해야겠지?”

“네?”

“내가 다시 공작이 되면 법률상 우린 결혼할 수 없게 되니까.”

잠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멍해졌던 클로드의 표정이 아주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 말은….”

“너무 좋아하지는 말고, 아직 잘 모르겠다는 기분은 여전하니까.”

미나즈가 커지는 클로드의 기대를 누르려 했지만, 올라가는 입꼬리는 멈추지 않았다.

클로드가 얼굴에 웃음을 지은 채 다가서자 그녀가 눈을 깜빡거리며 쳐다보았다.

“너 그렇게 웃는 거 오랜만이네.

그러니까 예전처럼 귀여운데.”

칭찬은 좋지만, 귀여운 건 곤란하다.

클로드는 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워냈다.

그러자 이번엔 미나즈가 웃었다.

“왜 그만 웃어? 보기 좋은데.”

“지금은 당신에게서 옛날 모습을 지워 내야 하니까요.”

“어떻게 할 건데?”

“글쎄요.”

클로드는 말꼬리를 끌며 미나즈에게로 한 발 더 다가섰다.

그리고 그녀의 턱 끝을 올리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눈으로 보는 게 제일 확실하지 않을까요.”

겉모습은 태연하게 유지했지만, 속은 완전히 떨려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음, 요조숙녀인 척할 생각은 없으니까….”

미나즈가 흔쾌한 목소리로 수락했다.

“그럼 우선 벗어 봐. 흥분되나 안되나 보게.”

정말 돌려 말할 줄 모르는 여자로군.

하지만 불평할 수 없었다. 이쪽이야말로 바라던 바였으니까.

“괜찮으면 당신도 보여 주는 겁니다.”

“응, 뭐, 좋아.”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는 숨 막힐듯 요염했다.

“하지만 각오해. 예전보다 훨씬 어마어마해졌으니까.”

“이쪽도 마찬가지입니다.”

클로드는 창가에 커튼을 친 뒤 목에 맨 크라바트로 손을 가져갔다.

무엇보다 신성시하던 집무실에서 옷을 벗게 될 줄이야.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더 끔찍할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그의 성품처럼 주름 하나 없이 다려진 옷들이 한 자락 한 자락 바닥으로 떨어졌다.

처음에는 여유롭던 미나즈의 얼굴에 조금씩 홍조가 어렸다.

나쁘지 않은 반응처럼 보였다.

마지막 하나는 남긴 채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떻습니까?”

“맨날 집에서 앉아만 있는 줄 알았는데 제법이네.”

놀랍게도 그녀는 쑥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클로드는 과감히 팔을 뻗어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미나즈가 움찔했다.

밀착한 몸으로 그의 흥분한 신체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나머지도 풀어도 됩니까?”

귓가에 은근히 속삭였다.

미나즈는 대답 대신 클로드의 목에 팔을 감았다.

들뜬 숨이 흘러나오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쳐졌다.

꿈에만 그리던 그녀를 품에 안자 조금도 견딜 수 없었다.

미나즈를 안은 채 안락의자로 다가가 눕혔다.

집무실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뜨겁게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엘레노어는 사락거리는 스커트 자락을 들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마차에서 스카이가 준비해 준 옷으로 막 갈아입은 참이었다.

그것은 마을 처녀들의 축제 의상이었다.

‘이런 옷을 입는 건 처음이네.’

평소 입는 귀족적인 드레스보다 재질이 거칠고 바느질도 투박했지만, 소박하다는 표현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레이스와 프릴이 가득 달린 흰 블라우스에 딸기 크림처럼 화사한 연핑크색 드레스.

남작 부인이라는 지위답게 간결한 라인에 세련된 모노톤을 주로 입는 엘레노어로서는 생소한 발랄하고 깜찍한 옷이었다.

그러나 어색하긴 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이 되니 마치 연극에 나가는 배우처럼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딱 맞는 거야.’

사이즈를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일부러 맞춘 듯이 딱 맞았다.

스카이의 눈썰미에 혀를 내두르며 엘레노어는 늘어뜨린 머리를 평민여성들을 흉내 내 능숙한 솜씨로 땅아 올렸다.

그리고 창문에 모습을 비춰 본 뒤 마차 문을 열었다.

“오래 기다리셨…..….”

엘레노어는 말을 끝까지 맺지 못했다.

축제 의상으로 갈아입은 리안의 모습에 말문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어떻게 저런 옷이 저렇게 잘 어울릴 수가 있지?’

스카이가 리안에게 건넨 옷은 선명한 붉은 상의에 흔히 입는 가죽 바지, 그리고 장식 벨트와 망토라는 무척 난해한 조합이었다.

이런 걸 입으면 누구나 가장 축제에 나온 광대 같은 모습이 되지 않을까.

그러나 그녀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붉은 상의는 리안의 흰 피부와 색이 옅은 금발, 그리고 선명한 입술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었고 가죽바지는 긴 다리와 탄탄한 엉덩이를 돋보이게 했다.

요란한 장식 벨트와 의미를 알 수 없는 싸구려 휘장조차 그가 걸치니 고급스러운 소품으로 보였다.

이래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엘레노어는 늘 제국 기사단 제복이나 정복만 입는 리안의 화려한 모습에 넋을 잃었다.

그것은 리안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사랑스럽군요.”

엘레노어를 홀린 듯 바라보던 리안이 간신히 내어놓은 말이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그녀가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운 뒤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반해 내 모습은……… 페이드라 공작이 내게 복수하려는 것 같습니다.”

“전혀 아니에요. 백작님에 비하면 전 말하는 웨딩 케이크 같아요.”

엘레노어의 찰진 비유에 리안이 웃음을 지었다.

마차 앞에 서 있던 일라이가 둘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사람 다 지나치게 눈에 띕니다. 후광을 좀 가려야 하니까 가면을 쓰십시오.”

그의 권유대로 두 사람은 가장무도회의 가면을 집어 들었다.

엘레노어는 하얀 가면 위에 반짝거리는 보석들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 달린 거 설마 진짜 다이아몬드는 아니겠죠.”

지나치게 품질이 좋아 보이는 게 불안했지만, 어쨌든 가면을 얼굴에 착용했다.

‘그다지 효과가 없는걸.’

애초에 비율이 너무 좋고 머리 색부터 눈에 띄는 데다가 가면 아래로 드러난 피부와 턱선, 그리고 섬세한 입술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미남인지 느껴졌다.

분명히 마을 처녀들의 시선을 모을 것이다.

하지만 엘레노어는 곧 고개를 저어 걱정을 지워 냈다.

‘고귀한 스텔라리아가 장미 달린 가면을 쓰고 마을 축제에 섞여 들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 할 테니까.’

그냥 더럽게 잘생긴 마을 청년 정도로만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엘레노어는 리안에게 먼저 선뜻 말을 꺼냈다.

“이제 갈까요?”

리안은 엘레노어에게 손을 내밀며 고개를 기울인 뒤 속삭였다.

“이게 끝나면……… 그다음에는 내가 준비한 곳으로 가는 겁니다.”

보라색 눈동자에 어쩐지 야릇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엘레노어는 뺨을 붉히며 그의 손을 잡은 채 광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