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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112화 (112/120)

112화

“가긴 어딜 가! 이 의리 없는 녀석!”

엘레노어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블레인의 서글픈 목소리가 울렸다.

두 사람만의 순간에 빠지려던 리안이 그를 보고 살며시 수려한 눈썹을 올렸다.

“취했나?”

“그래! 애인도 없는데 좀 취하면 안 되냐?”

리안은 그제야 테이블에 잔뜩 올려진 빈 술잔들을 발견한 듯했다.

“당신도 취했습니까?”

“아뇨, 저는 그다지.”

질문을 받은 엘레노어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블레인을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멀쩡했다.

“체. 연애에 관심 없는 척하더니 나보다 훨씬 먼저 여자를 만들고 말이야. 그것도 저렇게 좋은 여자를!

비앙카스타를 둘러메고 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연쇄 살인범인 줄 알았는데.”

“연쇄 살인범은 너무하잖아요.”

“아주 좋게 봐도 살인 초범이었다.

고.”

블레인의 앞에 빈 술잔이 계속 늘어 갔다.

그의 주정이 길어지자 리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충고했다.

“적당히 마셔. 그러다 또 실수하지 말고.”

“나는 딱히 술 마시고 실수 같은 거 한 적 없어!”

“술 마시고는 아니지만, 파티에서 실수한 적 있잖아.”

리안이 기억을 더듬듯 눈을 살짝 위로 올려 뜨며 말했다.

“아마 카랑스 부인의 파티였던가.

네가 처음 본 홍학에 놀라서……….”

“우아악! 시끄러워! 됐으니까 빨리 데이트나 하러 가 버려!”

그것으로 블레인의 주정이 즉시 종료되었다.

그러나 다른 목소리가 두 사람의 출발을 방해했다.

“어디 가서 뭐 할지는 정했나?”

스카이가 테이블에 삐딱하게 기대 선 채 물었다.

그를 본 리안의 표정이 즉시 냉담하게 변했다.

“딱딱한 표정 좀 풀지. 같이 일하는 사이인데.”

“빨리 끝내고 싶은 동맹 관계일 뿐입니다.”

“가고 싶으면 그냥 대답하면 되잖아.”

스카이의 유들유들한 목소리에 리안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는 순순히 스카이에게 대답하는 대신 엘레노어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우선 당신이 하고 싶은 거라면 뭐든 다 좋습니다.”

“최악의 데이트 상대네.”

엘레노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스카이가 다시 끼어들었다.

“그런 건 상대한테 전부 떠넘기는 거잖아. 아무래도 제국 기사들은 레이디를 에스코트할 줄 모르는 모양이군.”

그의 도발에 리안은 발끈한 기색이었으나 받아치지 못했다.

아무래도 검밖에 모르고 살아온지라 그런 방면으로는 문외한인 듯했다.

노려보고 있는 리안을 둔 채 스카이는 느긋이 와인을 비우더니 빈 잔을 들어 손짓했다.

그러나 다가온 것은 새 잔을 든 하인이 아니라 제니트였다.

스카이는 제니트로부터 뭔가 꾸러미를 건네받더니 리안에게 휙 던졌다.

“자.”

갑작스레 날아온 데다 제법 묵직해 보였지만, 리안은 별 어려움 없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이건 뭡니까?”

“선물.”

스카이는 열어 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투박한 포장을 푸는 사이 그가 샴페인을 홀짝이며 말했다.

“지금 팰리시티 전역에서는 다양한 축제가 한창이지. 이 저택의 연회도 볼 만하지만, 둘은 제대로 놀 수가 없잖아? 그중 제법 재미있는 무도회가 열린다고 하더군.”

안에서는 드레스와 옷, 그리고 망토가 나왔다.

그중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두개의 가면이었다.

하나는 푸른 공작 깃털과 꽃으로 장식된 화려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새하얀 순백에 보석이 박힌 우아한 형태였다.

그것을 든 채 스카이를 바라보자 그가 씩 웃었다.

“가면을 쓰고 즐기는 가장무도회야. 서민적인 분위기지만 그래서 더 신선하고 재미있지. 무엇보다 그거라면 당신들도 눈치 보지 않고 즐길수 있지 않겠어?”

스카이의 말대로 듣자마자 구미가 당겼다.

“아마 백작이라면 모두의 추적을 따돌린 채 감쪽같이 그곳으로 당신을 데려갈 수 있을 테고.”

스카이답게 무척 센스 있고 날카로운 계획이었다.

리안은 눈을 한 번 깜빡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걸… 왜 내게 가르쳐 주는 겁니까?”

“내 바보짓을 처리해 준 답례라고 하지.”

바보짓은 종속의 서약을 얘기하는 걸까?

정확히는 몰라도 스카이가 호의로 준비한 것은 확실해 보였다.

“재미있겠네요. 고맙게 받을게요.”

심경이 복잡할 리안을 대신해서 엘레노어가 먼저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래, 그래. 재미있게 놀다 오라고.”

스카이는 배웅하듯 하인이 다시 채워 놓은 샴페인 잔을 치켜들었다.

“가요. 백작님.”

엘레노어가 꼿꼿이 서 있는 리안의 팔을 잡아끌었다.

리안은 이끌려가는 대신 엘레노어의 손을 잡은 채 스카이에게로 한발 다가섰다.

“내가 당신 입장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므로 당신의 의도를 도저히 이해 못 하겠습니다만…….”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잔을 하나 집어 스카이의 잔에 부딪혔다.

“어쨌든 고맙습니다. 엘레노어가 아주 기뻐할 것 같군요.”

그렇게 말하고 리안은 잔을 깨끗이 비웠다.

솔직한 감사를 들은 스카이는 리안이 수상한 눈으로 볼 때보다 더욱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하. 정말..… 당신은…..….”

스카이는 말을 흐리더니 소리를 낮춰서 중얼거렸다.

“열 받을 정도로 사람을 약하게 만들 줄 아는군.”

엘레노어는 똑똑히 들었지만, 리은 제대로 못 들은 표정이었다.

스카이는 낮게 한숨을 내쉰 뒤 리안을 떠밀며 손을 저었다.

“됐으니 다녀오기나 해.”

그렇게 말한 뒤 스카이는 몸을 기울이고 있는 블레인 쪽을 돌아보았다.

분위기를 보니 아무래도 두 사람은 오늘 진탕 마시고 취해 버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사실 나도 전혀 준비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만.….”

마차를 향해 걸으며 리안이 슬며시 말을 꺼냈다.

“뭘 준비하셨는데요?”

“음, 그걸 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의 계획이 좋아 보이는군요.”

뭔지 몰라도 어차피 가장무도회에 가고 싶었으므로 엘레노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 뭐든 다 좋아요.”

신이 난 상태로 엘레노어는 리안과 함께 준비된 마차에 도착했다.

일라이가 마부석에 앉고 리안이 먼저 올라섰다.

“조심해서 올라오십시오.”

그의 손을 잡자 마치 몸이 떠오르는 것처럼 마차에 앉혀졌다.

곧 문이 닫히고 바깥의 떠들썩한 소리가 멀어졌다.

리안은 그녀를 안쪽에 앉힌 뒤 마주 앉는 대신 바로 곁에 앉았다.

엘레노어가 올려다보자 리안의 아름다운 보라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휜 채 그녀를 내려 보았다.

“이제 우리의 첫 데이트군요.”

그 목소리에 방금까지의 편안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심장이 쿵쿵 뛰고 귓가부터 뜨거움이 번져 얼굴 전체를 메웠다.

왜 이렇게 괜히 어색하고 쑥스러운 걸까.

그런 기분을 감추려 엘레노어는 살짝 헛기침하며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오늘 흠. 아주 재미있게 보내요.

많이 웃고, 어, 그러면 좋겠네요.”

스스로도 민망할 정도로 말이 꼬여서 나갔다.

그런 그녀를 웃으며 바라보던 리안이 막 생각난 것처럼 손을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요?”

리안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엘레노어는 깜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전에 개그를 준비하겠다고 했었지.

기대가 되기보다는 어째 불안해졌다.

그리고 리안이 뿌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엘레노어. 로이타 페이지 부인이 모이면 뭐가 되는지 아십니까?”

엘레노어는 속으로 탄식했다.

역시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이런 답 없는 개그를 준비해 오다니.

그야말로 참담하기 짝이 없었다.

“그거… 혹시 로이타 북 부인…?”

엘레노어의 대답에 리안은 눈에 보이도록 흠칫했다.

“맞습…… 니다.”

순간 침묵이 흘렀다.

[아, 그건 내가 들어도 진짜 아니네.]

훔쳐 듣고 있었는지 베아트릭스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300년을 갇혀 있던 마녀에게조차 무시당해 버렸다.

아마도 난생처음 시도했을 개그에 실패한 리안은 충격을 받아 베아트릭스를 타박하는 것도 잊은 듯했다.

평소에는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잘생긴 눈매가 강아지처럼 변했다.

그 모습을 보자 엘레노어의 입가가 차츰 꿈틀거리며 올라갔다.

“아, 아하하. 아하하하하하하!”

엘레노어가 웃음을 터뜨리자 시무룩하던 리안의 얼굴이 밝아졌다.

“재미있었습니까?”

“백작님. 잘생겨서 다행인 줄 아세요.”

“네?”

엘레노어는 쿡쿡 웃으며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되묻는 리안에게 살짝 기댔다.

“아무 말이나 해도 얼굴이 재미있으니까 괜찮아요.”

처음 만났을 때도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었지.

예전 생각이 나서 피들피들 웃고 있으려니 리안이 엘레노어의 손을 꼭 쥐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습니까?”

“모르겠어요.”

진짜 모르겠는데 괜히 자꾸 웃음이 난다.

맞잡은 손이 뜨겁고 무척 기분이 좋았다.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

리안도 비슷한 기분인 듯 엘레노어를 자꾸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평소의 그 무뚝뚝한 얼음 왕자 표정은 흔적도 없었다.

“혼자 웃는 거 예뻐 죽겠네요.”

리안이 귓가에 속삭인 뒤 엘레노어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참을 수 없는 달콤함이 마차 안에 가득 퍼져 나갔다.

한 번 그녀의 피부를 맛보자 리안의 눈이 살짝 풀어졌다.

보라색 눈동자에 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을 발견한 엘레노어는 짐짓 새침하게 몸을 돌렸다.

작은 새처럼 기대 있던 엘레노어가 떨어져 나가자 리안은 무척 몸이 달은 기색이었다.

그걸 알았지만, 엘레노어는 일부러 모른 척했다.

그녀는 하나하나 아끼며 천천히 모든 걸 즐길 생각이었다.

밤은 길고 둘의 데이트는 이제부터 시작이었으니까.

리안의 손을 꼭 쥔 채 엘레노어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사락.

섬세한 손끝이 얇은 책장을 팔락이며 넘겼다.

클로드는 몇 번을 반복해서 읽어 닳아 버린 법전을 넘기며 깃펜을 움직였다.

머리가 복잡할 때마다 그는 늘 집 무실에 틀어박혀 이렇게 법리 연구에 몰두하곤 했다.

오늘은 아침부터 자리에서 거의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잡념은 사라졌지만, 목도 뻐근하고 손목도 저렸다.

목을 축이기 위해 곁에 놓인 물잔을 들며 고개를 기울였을 때였다.

누군가 그의 손에서 깃펜을 빼앗아들었다.

“너는 좀 놀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고 했지?”

언제 왔는지 바로 앞에 미나즈가 서 있었다.

그녀를 보자 건조하게 멈춰 있던 심장이 한 번 욱신 크게 박동했다.

“젊은 남자가 밖에 축제가 한창인데 종일 방에만 틀어박혀 있고 말이야.”

클로드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에서 다시 깃펜을 잡아채려 했지만, 미나 즈가 휙 뒤로 손을 뺐다.

“이런 식으로 펜을 빼앗는 게 얼마 만이더라.”

“글쎄요.”

미나즈가 공작이 되기 전이니까 아마 적어도 10년은 지났을 것이다.

그 말은 그녀를 좋아하면서 제대로 만나지 못한 것도 그만큼 지났다는 뜻이었다.

클로드는 입술을 깨물면서 다시 펜을 향해 손을 뻗었다.

미나즈가 다시 피하기 위해 손을 뒤로 돌렸다.

“어?”

그녀의 입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의자에서 일어선 클로드가 너무나도 쉽게 그녀에게서 펜을 빼앗아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어린애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아는 겁니까?”

클로드는 빼앗은 펜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뒤 책상을 돌아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왠지 미나즈가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바로 뒤에 벽이 있었으므로 많이 물러서지 못했다.

“축제에 나가지 않은 건 데이트 상대가 없어서 그런 겁니다.”

벽에 기대선 미나즈를 내려다보며 클로드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가고 싶은 여자가 자꾸 나를 무시하고 상대해 주지 않으니까요.”

클로드는 벽에 팔을 짚으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늘 여유로운 미나즈의 눈에 긴장이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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