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반대하며 길길이 날뛸 때는 언제고 자기 좋을 대로 태세를 전환하다니! 어떻게 내 아들보다 더 어울린다는 말을 할 수가 있소!”
로베르 대공은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열을 올렸다.
“내 아들은 그 여인 때문에 지하감옥에서 4일이나 사경을 헤맸다고!”
사경이라니.
그런 사실은 금시초문이었다.
엘레노어가 스카이 쪽을 바라보자 그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제니트가 보고했나 보군.”
“그럼 그게 정말이란 말이에요?”
“서로 과거는 묻지 않기로 하지.”
딱 잡아떼는 스카이에게 더 캐내고 싶었으나 연회장의 소란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게 뭐 어떻다는 건지. 내 아들은 그 여인을 위해 혀도 잘랐네.”
“내 아들은 황녀에게 목숨을 잃을 뻔했어!”
“리안은 반역까지 일으켰다고!”
“그건 내 아들도 마찬가지야!”
왜 저런 거로 대결하는 거야.
당사자는 아직 데이트로 교제를 결정할지 말지 밀당 중인데.
사교계의 요부에서 공작가가 목숨걸고 쟁취할 일등 신붓감으로 격상한 엘레노어는 아연해졌다.
“이제 그만하시오.”
싸움이 계속되자 공작 부인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거라면 아이들이 알아서 결정할 일이오. 우리끼리 싸워서 결정될 문제가 아니고.”
근엄한 공작 부인의 말에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잠시뿐.
슬쩍 공작 부인의 뒤로 물러난 위치에서 서로에 대한 시비가 계속 이어졌다.
“듣자 하니 부인이 신혼 때 도망가 거의 20년을 별거했다던데? 아들 걱정할 시간 있으면 당신이나 잘하는 게 어떻소?”
로베르 대공의 도발에 칼라브리아공작의 이마가 꿈틀했다.
“그러는 당신은 관리 잘해서 30명 있던 마누라가 저들끼리 싸우다 사라져서 하나도 안 남았소?”
“나는 잡을 마음이 없었소! 가는 사람 막지 않는 게 우리 집안의 내력이오!”
“그럼 이번에도 막지 마시오!”
서로 험악한 눈빛을 주고받은 뒤 씩씩거렸다.
“성격이 그 모양이니 하나 있는 부인이 도망을 가지.”
“나는 그래도 절조라도 지켰네만.
그래서 나는 부인 하나에 아들이 하나인데 당신은 어째 30명 중에 달랑 하나인 거요? 하체에 문제 있는거 아니오?”
“그만들 하라고 했죠!”
싸움이 유치한 인신공격으로 번지자 다시 공작 부인이 호통을 쳤다.
둘 다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으나 새파란 서슬에 감히 반항하지는 못했다.
“뭐 더 싸울 필요도 없겠지. 이미 결정된 거나 다름없으니까.”
“하. 인생은 기니 당장의 결과가 최종 결론은 아니오.”
“우린 최대한 빠르게 둘을 결혼시킬 거니 꿈 깨시오.”
“결혼해도 어차피 나중에는 스카이에게 돌아올 거니 상관없소.”
“우습지도 않군. 결혼시킬 거라니까!”
“결혼이 뭐 어떻다는 거요! 그 아이는 이미 한 번 다녀왔으니 두 번 다녀와도 돼!”
로베르 대공의 오기 어린 말에 엘레노어는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다 큰 어른들이 유치하기는.
한숨을 폭 내쉬며 스카이를 올려보자 그가 왠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인 거 같군.”
“다 같이 한잔하면서 승리를 즐기자고, 칼라브리아 백작이 나올 때까진 시간이 있을 테니까.”
같이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고생을 했지만, 최근 서로 바빠 마주치지 못했던 면면이었다.
그들과 함께 와인을 기울이며 미나 즈의 즉위를 축하하고, 또 허심탄회하게 놀고 싶다는 건 엘레노어도 바라던 바였다.
“다 같이 있으면 사람들도 당신을 귀찮게 하진 못할 거야.”
스카이는 엘레노어의 속내를 읽은 것처럼 말하며 씩 웃었다.
‘정말 거절하지 못하게 하는 데는 도가 튼 남자로군.’
엘레노어는 속으로 불평했지만, 곧 그와 함께 모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캔터베리 자작님! 비앙카스타!”
엘레노어가 큰 목소리로 부르자 얘기를 나누고 있던 그들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엘레노어를 본 비앙카스타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한달음에 달려와 품에 안겼다.
“엘레노어! 보고 싶었어요!”
“나도요. 정말 얼굴이 좋아 보이네요.”
백지처럼 창백하고 몸이 소멸할 것처럼 여위었던 비앙카스타는 사라지고 혈색 좋은 얼굴에 보기 좋게 살이 올라 있어 있었다.
“다 같이 여기서 무슨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헤르혼 님이 이 연회가 끝나면 약혼녀와 결혼하신데요. 그 친구를 일라이 님께 소개하시겠다는 이야기 중이었어요.”
“와, 정말요?”
신나게 이야기에 참여하던 엘레노어는 곁에 선 채 표정을 구기고 있는 블레인을 발견했다.
어쩐지 그의 주변에만 어두운 기운이 감돌았다.
“자작님은 표정이 왜 그래요?”
“하, 나 빼고 다 연애하잖아요.”
“자작님도 하시면 되잖아요.”
“그게 되면 진작 했죠! 그게 무슨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란 소립니까? 크흑!”
블레인의 절규를 보고 비앙카스타가 엘레노어의 팔을 감으며 말했다.
“아까부터 저 상태예요. 엘레노어가 좀 도와주세요.
“제가요?”
“네. 엘레노어는 제국 최고의 연애전문가잖아요.”
잠시 잊고 있었던 본업이 떠올랐다.
하지만 상담과 저서를 내고 강연을 할 뿐 주선은 별로 특기도 아니었다.
애초에 리안의 연애를 성사시키는데 철저히 실패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재미는 있을 것 같아서 엘레노어가 블레인에게 물었다.
“어떤 타입의 여자가 좋은데요?”
블레인이 대답하지 않고 우물거리자 옆에서 비앙카스타가 대신 끼어들었다.
“엘레노어처럼 세련되고 우아하고 예쁘고 유능하고 똑똑한 여자가 좋으시데요.”
“꿈이 너무 크시네요.”
가차 없는 엘레노어의 말에 블레인 이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농담이에요. 여기에 그런 여자분들이 많으니 한번 말을 걸어 보면 되겠네요.”
쿡쿡 웃으며 덧붙이자 블레인이 주변을 휙 둘러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에 당신 같은 여자가 어디 있습니까?”
“많죠. 더 나은 사람도 많고, 제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건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면 다 같이 입을 모아서 ‘당연히 아니죠!‘라고 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이 모두 ‘음그런가?‘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뭐예요, 그 반응은?”
“하지만 엘레노어가 제일 예쁘고 능력도 좋고 인격도 제일 훌륭한걸요!”
비앙카스타가 양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눈을 빛내며 진심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완전히 아이돌을 만난 소녀팬 같은 모습을 보아 엘레노어를 향한 팬심이 더욱 깊어진 모양새였다.
민망해하고 있으려니 블레인이 한숨을 옆에서 푹 내쉬었다.
“뭐 실제로 그런 여자가 있다 해도 나랑 만나겠냐고요.”
침울해하는 그에게 에이드리언이 위로하듯 말했다.
“가끔 보면 엄청 예쁘고 신분 높은 여자가 진짜 별로인 남자랑 만나기도 하잖습니까. 자작님도 그런 남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잠시 설레는 표정을 지었던 블레인은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저기, 그 말은 내가 진짜 별로라는….”
“아, 저기 저 아가씨 정말 세련됐네요! 거기다 아주 좋은 집안의 영애예요.”
그가 눈치채기 전에 엘레노어가 황급히 말을 돌렸다.
엘레노어가 가리킨 영애를 본 블레인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 가서 3초 안에 차일 것 같군요. 전혀 희망이 생기지 않습니다.
만.”
한동안 연인들 사이에 솔로로 혼자 끼어 있어서 패기가 마구 꺾인 모양이었다.
연인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비앙카스타가 나섰다.
“그럼 우선 인기남의 조언을 들어보면 어떨까요.”
모두의 시선이 샴페인을 마시고 있는 스카이에게 쏠렸다.
“페이드라 공작님.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비법이 있나요.”
“음. 시선을 마주치기일까.”
스카이가 자신의 매끄러운 뺨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좋네요. 그 다음은요?”
“글쎄.”
그는 잠시 생각해 보는 듯하더니 눈썹을 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더 해 본 적이 없네. 눈이 마주치면 상대방이 보통 호감을 표현하더군.”
“그게 뭡니까. 메두사라도 됩니까?”
스카이는 퉁명스럽게 말하는 블레인에게 다가가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바다색 눈동자와 마주치자 부릅뜨고 있던 블레인의 눈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르르 풀리는 게 보였다.
“…… 인정할 테니 그만 보십시오..
얼굴 빨개지면 목을 매달 겁니다.”
“남자들에게도 같은 반응을 이끌어낸 적 많으니 부끄러워할 것 없네.”
지나친 하이레벨의 조언에 블레인은 더욱더 힘이 빠진 얼굴이 되었다.
묵묵히 있던 일라이가 블레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 뒤 엘레노어를 향해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남자를 유혹합니까?”
“저는 유혹 안 해요.”
엘레노어는 눈을 깜빡거리며 생각한 뒤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냥 앉아만 있어도 말을 걸어 오더라고요.”
우월한 두 사람의 대답에 블레인이 분노를 금치 못했다.
“제길! 베아트릭스! 듣고 있죠? 잘생겨지는 주술은 없습니까.”
[없어. 다시 태어나.]
가차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블레인이 뭔가 받아치려는데 갑자기 연회장에 탄성이 일어났다.
“꺄아아아아아!”
뭔가 해서 바라보니 2층 발코니 너머에 한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커튼 너머에 선 키가 큰 남자가 슬며시 이쪽을 보더니 이내 곧 돌아 서서 사라져 버렸다.
“칼라브리아 백작이로군.”
스카이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말을 듣지 않아도 누구나 그게 리안이란 걸 알 수 있을 법한 우월한 비율이었다.
그가 방 안으로 사라져 버렸는데도 영애들은 가슴 앞에 손을 맞잡은 채 혹시 다시 나타나지 않나 기대하는 눈빛으로 하염없이 발코니를 바라보았다.
“뭡니까. 이젠 눈빛도 아니라 실루엣만으로 사로잡네.”
그 모습을 본 블레인이 테이블을 내려치며 좌절했다.
“눈빛 정도는 좀 써! 아니, 최소한 나와서 앉아라도 있으라고! 크흑.”
자괴감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그를 위해 엘레노어는 가득 쌓여 있는 통앞에서 술병을 통째로 몇 개 들고 왔다.
“받으세요.”
“뭡니까?”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 영약이에요.”
고개를 든 블레인이 엘레노어의 손에 들린 독한 술을 보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득 주십시오.”
모처럼이었으므로 엘레노어도 블레인에게서 술을 받았다.
다 같이 술잔을 돌린 뒤 살짝 오른 취기에 흔들리고 있을 때였다.
“꺄아아아!”
다시 아까 들렸던 환성이 터졌다.
리안이 다시 발코니에 나왔나 싶어 올려 보니 아무도 없었다.
다시 고개를 내려 앞을 본 엘레노어는 흠칫했다.
“엘레노어.”
리안이 어느새 다가와 곁에 서 있었다.
“데리러 왔습니다.”
그는 테이블에 올라 있는 엘레노어의 손을 들어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보라색 눈을 찡긋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갈까요. 데이트.”
술 때문일까.
귓가에 울리는 속삭임이 더욱 뜨겁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