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리안은 금빛 문을 열고 흰 대리석으로 장식된 커다란 욕실로 들어섰다.
중앙의 거대한 욕조에는 그의 눈동자처럼 은은한 보랏빛이 도는 따뜻한 물이 가득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거기로 다가간 리안은 입고 있던 가운 끈을 당겼다.
그대로 가운을 벗고 탄탄한 몸을 드러내기 직전.
그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다시 지하로 돌아가고 싶습니까?”
아무도 없는 욕실에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잠시 기다려도 아무 반응도 없자리안의 흰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가 아무 말 없이 가운을 여민채 돌아서서 입구에 걸쳐 둔 검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대체 어떻게 아는 거야?]
베아트릭스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어디선가 울려 퍼졌다.
[여태까지 내가 보고 있는 걸 감지한 인간은 하나도 없었는데.]
“훔쳐보는 행위에 대해 이미 잘 알아듣게 경고했다고 생각합니다만.”
리안이 한 치의 여지도 없는 말투로 딱 자르자 베아트릭스가 더욱 크게 불평했다.
[제길. 심심하다니까 어쩔 수 없잖아. 보는 게 싫으면 할 일을 좀 만들어 달라고.]
“당신을 내보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말했지만, 베아트릭스는 아예 갇혀 있는 건 아니었다.
리안이 저택 밖으로 나가면 즉시 사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긴 했으나 대신 어느 정도 저택을 돌아다닐 자유는 주었다.
저택의 규모가 워낙 어마어마해서 햇볕도 쬐고 산책도 할 수 있으니 예전 지하 감옥 생활에 비교하면 상당히 나아진 셈이었다.
그러나 베아트릭스는 방 밖으로 전혀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누가 나가고 싶댔어? 난 돌아다니는 건 지긋지긋하다고.]
이미 긴 삶을 살아온 탓일까.
그녀는 딱히 바깥 생활에 대한 호기심도 없고 사람과 사귀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럼 뭘 원하는 겁니까?”
리안은 과거 학살자였던 베아트릭스를 좋게 생각할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핍박할 생각도 없었다.
엘레노어가 묘하게 그녀와 사이가 좋았기 때문이다.
[말해 주면 들어줄 건가?]
“힘을 되찾고 싶다는 종류의 것만 아니면 고려해 보겠습니다.”
베아트릭스의 은근한 물음에 리안은 딱딱하게 답했다.
[뭐 별로 어려운 건 아니야. 그냥 심심풀이가 좀 필요한 건데.]
리안은 베아트릭스가 가지고 싶어할 것 같은 여러 가지 물건들을 떠올려 보았다.
보석, 수정 구슬, 각종 마법구나 마법서일까.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전혀 다른 물건이었다.
[네 애인이 쓴 책을 좀 구해다.
줘.]
예상치 못한 말에 리안은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다시 확인했다.
“엘레노어의…… 저서가 필요한 겁니까?”
[맞아!]
베아트릭스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빠르게 내뱉었다.
[네 어머니 방을 훔쳐보면서 읽어 왔지만, 요즘은 방에 잘 안 붙어 있는단 말이지. 한창 읽다가 중간에 끊기는 기분이 어떤 줄 알아? 아주 거지같다고!]
책을 달라는 게 부끄러운 듯 그녀의 말투는 다소 변명조였다.
“그걸 구해다 주면 얌전히 있을 겁니까?”
[그래.]
별로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흔쾌히 수락하려던 리안은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서 말을 멈췄다.
“당신은 과거 많은 사람을 괴롭혔습니다. 그런 당신에게 도락을 선사하는 게 과연 옳은지 고민하게 되는군요.”
[뭐야? 그런 옛날 일은 이제는 상관없잖아!]
들어줄 듯하던 리안이 그렇게 말하자 베아트릭스는 다급한 목소리를 냈다.
예상대로 별로 반성의 기미는 없는 듯했다.
리안은 일부러 엄격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당신에게는 많은 사람을 도울 힘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제국에 봉사한다면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만… 과연 당신이 그렇게 할지 모르겠군요.”
[나를 부려먹으려는 거냐? 이 약아빠진 녀석!]
“다른 사람을 돕지 않는 사람을 도울 이유는 없습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딱 잘라 말하자 베아트릭스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분한 듯했지만, 리안이 조금도 누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자 마지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쩨쩨하게 굴지 마! 바라는 걸 들어주면 이쪽도 해 줄 수 있는 건해 줄 테니까.]
베아트릭스의 대답에 리안은 미소를 지었다.
겨우 그 정도 대가로 전설 속 마녀가 조력자가 되다니.
제국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엘레노어의 집필 활동을 막으면 안 될 듯했다.
[그렇게 요망한 얼굴로 웃지 마!
노파의 마음까지 뒤흔들리잖아.]
베아트릭스가 못마땅한 듯 툴툴거렸다.
내친김에 리안은 한 가지 더 못을 박았다.
“바라는 책을 가져다줄 테니 나와 엘레노어가 있는 방은 절대 엿보지 않는다고 약속하십시오.”
[그 재미있는 걸 보지 말라고?]
“중요한 분위기를 깨는 것은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리안은 ‘중요한 분위기에 힘을 주어서 다시 강조했다.
[쳇. 싫다면?]
“그럼 다른 방법을 써야겠지요.”
말투는 담담했으나 리안의 시선은 다시 세워 둔 검으로 스윽 향했다.
[농담 안 통하는 녀석이네. 알았으니까 책이나 잔뜩 구해다 줘!]
그 말과 함께 베아트릭스의 기척이 사라졌다.
리안은 천천히 가운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곧 빛으로 빚은 듯한 완벽한 나신이 드러났다.
목욕물 속으로 들어간 리안은 느긋이 욕조에 몸을 기댔다.
오늘의 단장은 완벽해야만 했다.
이날을 위해 해 온 준비들을 새기며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
“남작 부이이이이이이이인!”
리안이 욕조 속에서 핑크빛 생각에 빠져 있을 때쯤 엘레노어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계속 숨어서 살 생각은 없었으므로 복귀를 위해 큰맘 먹고 연회장으로 나온 탓이었다.
모든 사람이 그녀와 악수하고 한마디라도 섞고 싶어서 안달을 냈다.
“앞으로도 계속 낭독회를 하실 건가요?”
“부디 저희 저택에 와 주세요! 예전의 두 배, 아니 얼마라도 내겠어요!”
사방에서 쏟아지는 똑같은 질문에 어지간히 사람 상대에 익숙한 엘레노어도 지쳐 버렸다.
도저히 사라질 것 같지 않은 인파 틈에서 그녀를 구원한 것은 울림이 풍부한 목소리였다.
“댄스가 시작되었습니다만, 한 곡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스카이가 정중한 태도로 댄스를 신청했다.
오랜만에 페이드라 공국의 복식을 한 그는 이야기책에서 막 빠져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넓은 어깨를 시원스레 드러낸 느슨한 복장에 주변 여인들의 황홀한 시선이 쏟아졌다.
보통 남자라면 어마어마한 여인들의 장벽을 뚫고 다가올 엄두도 내지 못하겠지만, 그의 주변에는 자동으로 길이 생기는 수준이었다.
“기꺼이.”
사람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엘레노어는 흔쾌히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엘레노어를 에스코트해 적당히 구석진 발코니로 이끌어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춤을 춰도 되나?”
“안 될 거 있나요?”
춤 같은 건 딱히 별것도 아니고 엘레노어는 이미 나와서 몇 곡의 댄스를 춘 참이었다.
“칼라브리아 백작이 질투할 텐데.”
“괜찮을 거예요.”
리안 이야기가 나오자 반사적으로 엘레노어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이따 일곱 시경에 함께 나가기로 했으니까.”
사실 그녀가 이 요란한 연회장에 일부러 나온 것도 방 안에서 마냥 기다리고 있으려니 근질근질해서였다.
혼자 있으면 어쩐지 쑥스럽고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어서 생각을 전환하기 위해 사람들 틈에 섞인 것이다.
스카이가 잘생긴 눈썹을 살짝 올리며 물었다.
“둘이 교제하기로 했나?”
“….…데이트 한번 해 보고 결정하겠다고 했어요.”
물론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겠지만.
엘레노어의 말에 스카이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한 뒤 손을 내밀었다.
“우선 한 곡 출까.”
“여기서요?”
“안 될 것 있나?”
댄스 플로어가 아닌 발코니였으나 음악도 잘 들려오고 넓기도 넓었다.
그의 말대로 안 될 것이 없었다.
그녀가 픽 웃은 뒤 스카이의 손을 잡고 춤을 시작하려는 순간이었다.
“이런.”
스카이가 춤을 추는 대신 한곳을 응시하며 혀를 찼다.
“왜 그러세요?”
물으며 그가 보는 것을 바라본 엘레노어는 가볍게 딸꾹질을 했다.
저택 입구 부근에 로베르 페이드라 대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작님이 초대하신 거예요?”
“아니.”
스카이는 고개를 저었다.
“축하 사절로 황궁에 계셔야 할 분이 왜 여기 있는 거지?”
낮은 중얼거림이 어쩐지 불안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춤을 추는 대신 커튼을 통해 연회장을 관찰했다.
그렇게 지켜보는 가운데 페이드라 대공이 저택 중앙으로 진입했다.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플로어 중앙에 마련된 테이블이었다.
그 앞에는 연회의 호스티스인 플로 이드 공작 부인이 서 있었다.
그녀에게 다가간 페이드라 대공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내 아들이 여기에 있다던데 지금 어디 있는 거요?”
인사도 없는 질문에도 공작 부인은 당황한 기색 없이 침착하게 답했다.
“글쎄요. 이 부근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연회를 즐기시다 보면 곧 만나게 되겠지요.”
“그럼 그 여자는 어디 있소?”
‘그 여자’가 자신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엘레노어는 다시 한번 딸꾹질했다.
“엘레노어 역시 연회장에 있을 겁니다. 아까는 저 부근에 있었는 데……….”
공작 부인의 대답을 들은 척 만척하며 로베르 대공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왜 그 여자를 데리고 있는 거요?
며느리로 맞기라도 할 거요?”
그의 질문에 연회장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단박에 파도처럼 쏠렸다.
리안과 엘레노어의 관계는 여전히 초유의 관심사인 것이다.
엘레노어의 심장이 쿵쿵 뛰는 가운데 공작 부인의 우아한 입술이 열렸다.
“그럴 생각이오.”
깔끔한 대답에 연회장에 탄성이 일었다.
엘레노어는 다시 딸꾹질했으며 스카이는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고 로베르 대공은 만면에 오만 상을 지었다.
“아니, 그렇게 사병까지 풀어 가며 핍박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며느리로 맞이한단 말이오?”
“나는 딱히 핍박한 기억이 없습니다만.”
“당신 남편이 한 일을 모른 척할 생각이오?”
계속 불평을 늘어놓으려던 로베르대공의 목소리가 멈췄다.
“내 아내에게 뭐 문제라도 있소?”
칼라브리아 공작이 언제나처럼 미간을 찌푸린 채 로베르 대공을 쏘아보고 있었다.
‘대체 언제 나온 거지?’
엘레노어는 사람에 둘러싸여 있느라 두 사람의 모습을 보지 못했기에 대단히 경악했다.
또다시 뭔가 방해를 하러 나온 게 아닐까.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로베르 대공이 다시 외쳤다.
“그 여자는 내가 먼저 스카이의 짝으로 점찍었소. 그러니 우리 페이드라 공국으로 데려갈 것이오..”
칼라브리아 공작이 당장 그러라고 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코끝을 치켜들며 무심하게 받아쳤다.
“그건 당신 바람이겠지.”
“뭐라고?”
“누구도 내 아들이 원하는 여인을 빼앗아 갈 수는 없소.”
나직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무뚝뚝하게 못을 박은 뒤 칼라브리아 공작은 등을 돌려 버렸다.
무시하는 듯한 태도에 로베르 대공이 더욱 언성을 높였다.
“웃기지 마시오! 그 여인은 내 아들에게 더 잘 어울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여인은 이미 우리 가문에 속한 거나 마찬가지요!”
두 공작의 눈빛에서 불꽃이 튀었다.
곧 과부를 며느리로 삼겠다며 싸우는 두 공작의 목소리가 연회장에 쩌렁쩌렁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