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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109화 (109/120)

109화

팰리시티의 거리에 음악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새롭게 즉위한 제국의 22대 황제 미나즈 에이브로트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축제로 알렸다.

황녀의 탄신제가 귀족을 위한 호사와 화려함 위주였다면 오늘의 분위기는 훨씬 서민적이었다.

팰리시티의 골목골목에 연금술사의 등이 찬란히 빛나고 향긋한 빵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편하게 받아 가십시오! 얼마든지 있습니다!”

웃는 낯의 관리들이 지나는 이들에게 아낌없이 빵과 쿠키를 나눠 주었다.

구획마다 포도주와 맥주가 가득 든 통도 쌓여 누구를 막론하고 자유롭게 목을 축일 수 있었다.

넓은 광장에서는 악단이 악기를 연주하고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나온 처녀와 총각들이 빠른 템포의 춤을 추었다.

이 모든 호사는 플로이드 공작가의 막대한 재력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작 부인이 새로운 황제를 위해 시원스럽게 금고를 연 것이다.

“새로운 황제 폐하 만세!”

“에이브로트 황가, 그리고 5대 공작의 진정한 화합 만세!”

틈이 날 때마다 사람들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전의 황가를 그리워하는 이들의 모습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드러난 이중적인 황녀의 실체.

그리고 자국민을 짓밟으며 진격하던 황실군의 잔상은 그를 암군으로 만들기 충분했다.

이전 황가에 대한 실망은 고스란히 새로운 황제를 향한 환영으로 변모했다.

그 중심이나 다름없는 칼라브리아백작 저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최고 조였다.

사방에서 몰려든 축하 인파가 저택을 둘러쌌다.

“첫 번째 문까지 개방되어 있습니다. 자유롭게 즐기십시오!”

리안은 정원을 시민들에게 전체 개방했다.

무력충돌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걸 고려하면 대단히 과감한 결정인 셈이었다.

저택 주변에서 눈을 번뜩이고 있는 비하인드 나이츠의 모습은 모두로 하여금 행동을 절제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아무 소요 없이 아름다운 저택 안에서 모두 차별 없는 축제의 밤을 즐겼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딘가에 그림자가 존재하는 법.

백작 저 별관에도 커튼이 드리워진 창이 있었다.

칼라브리아 공작이 요양 중인 방이었다.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공작은 창가에 앉은 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렇게 있은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으나 읽은 책장의 수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커튼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강도가 달라졌을 무렵.

누군가 그가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

아마 식사 때가 된 모양이었다.

메이드일 거라 생각하고 무심하게 앉아 있던 공작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계속 그렇게 외면하고 있을 건가요?”

공작은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어두침침한 방 안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자그마한 체구에도 기품이 뿜어 나오는 얼굴.

플로이드 공작 부인이었다.

“방에 틀어박혀서 고집을 부리며 자신이 틀렸다는 걸 부정하면 마음은 편하겠네요.”

공작 부인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원래의 그라면 공작 부인의 비꼬는 말에 발끈해서 받아쳤을 것이다.

그러나 아픔은 사람을 변하게 하는법.

공작은 그저 무뚝뚝한 말투로 답했다.

“별로 당신들의 성공에 초를 치려는 건 아니오.”

“그러면 이제 좀 반성하고 있어요?”

“반성?”

“당신이 내 아들에게 한 짓 말이에요.”

리안에게 종속의 서약을 하게 만든 것에 대한 원망이 여전히 크게 남아 있는 듯했다.

사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공작 역시 늘 떳떳하게 여겼던 건 아니었다.

“돌이킬 수 없었기 때문에……….”

공작은 눈을 옆으로 돌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틀린 길이라는 생각이 들어도 억누르고 걸을 수밖에 없었소.”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약해지는 길이라 생각했기에 밀고 나갔다.

의심하기 시작하면 지금껏 살아온 인생을 부정하게 되니까.

자신이 아들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다고 믿고 싶었다.

잠시 침묵한 채 서 있던 공작 부인은 서서히 다가와 공작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떤 말도 당신이 한 행동들을 정당화할 수는 없어요.”

그렇겠지.

공작은 그녀가 나타나 비난할 때를 예상하고 준비해 두었던 대답을 꺼냈다.

“리안에게 공작 위를 물려주고 떠나겠소.”

그의 비장한 말에 공작 부인이 잘정돈된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그토록 지키려 집착했던 작위였으므로 납득해 주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뜻밖에도 날카로운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러면 그 후는 어쩔 셈이죠?”

“그 후?”

그런 질문을 받을 거라 생각하지 못해 공작은 조금 당황했다.

“글쎄. 적당한 지방으로 내려가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야겠지.”

딱히 잘못된 대답 같지 않은데 공작 부인의 표정은 더욱 안 좋아졌다.

뭐가 문제인 걸까?

속으로 진땀을 흘리고 있는데 공작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여전히 나와는 아무것도 의논하지 않을 셈이로군요.”

“대체 무슨 의논을 한단 말이오?”

무뚝뚝하게 말한 뒤 곧 그는 실수했다고 느꼈다.

“무슨 낯이 있어서 당신에게 의논을 하겠어.”

공작은 슬며시 말을 정정해 덧붙였다.

“나는 내가 결정한 길에서 실패자가 되었고, 그걸 당신에게도 뒤집어 씌울 생각은 없소. 나를 신경 쓰지 말고 승리를 만끽하면 돼.”

신경 써서 한 말인데 공작 부인의 표정은 더 나빠질 곳이 없을 정도로 싸늘해졌다.

그녀는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분위기가 리안에게 종속의 서 약을 강요했다는 말을 했을 때보다도 더 무시무시했다.

“내게 할 말이 있으면 하시오. 그렇게 노려보지만 말고.”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눈을 참다못한 공작이 먼저 말을 꺼냈다.

공작 부인이 뿌드득 소리가 나올 정도로 꼭 깨물고 있던 잇새로 목소리를 흘렸다.

“나는 북방에 가서 쭉 후회했어요.”

공작은 짐짓 담담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들었으나 속 한구석이 무척 쓰렸다.

그녀가 결혼을 후회할 거란 사실은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역시 직접 들으니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당신은 결혼하자마자 다정한 말한마디 없이 자기 야망만 줄줄이 늘어놓는 최악의 남편이었어요. 어떻게든 후사를 보려고 덤벼드는 모습을 열정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바보였죠.”

신랄한 말에 할 말이 없어 공작은 시선을 슬며시 떨구었다.

공작 부인이 무릎에 올려놓은 두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화가 나서 불끈 쥔 상태였으나 손가락에는 여전히 그가 선물한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아직도 끼고 있었구나.

문득 깨닫고 씁쓸히 보고 있는데 공작 부인의 말이 이어졌다.

“당신을 떠날 때, 최소한 내가 왜 떠나는지, 당신이 한 행동의 무엇이 싫었는지, 나를 위해 마음을 고쳐먹을 생각이 없는지 물어보기는 해야 했다고. 왜 아무 말도, 어떤 시도조차 하지 않고 그냥 지레 포기한 채 떠났을까 하고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공작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 말은….”

공작은 자신이 생각에 확신이 없어서 말을 흐렸다.

그리고 잠시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우물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질문했다.

“나와 결혼한 걸 후회한 게 아니라 잘해 보지 못한 걸 후회했다는 거요?”

“우쭐하지 마세요.”

쏘아붙이는 말에 공작은 다시 찔끔해서 입을 다물었다.

또다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당신은…… 이후에 어쩔 생각이지?”

공작은 무뚝뚝하게 물었다.

“수도에 머무를 건가?”

“북방으로 돌아갈 거예요.”

가차 없는 대답이었으나 묘한 여지가 느껴졌다.

뭐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녀가 뭔가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제대로 생각하는 게 맞는 건가.’

공작은 반신반의하는 눈으로 공작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새삼 그녀가 예전과 별로 변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놀랐다.

공작 부인은 여전히 우아하고 고고 했으며 유능했다.

그녀를 보고 있으려니 또다시 오랜 의문이 머리를 들었다.

‘이런 여자가 대체 왜 나와 결혼한 거지.’

처음 그는 그녀가 자신을 상대해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비록 공작가의 후계자였으나 당연히 칼라브리아의 것이었던 기사단장이 되지 못해 가문의 실패작이라 불리고 있었다.

반면 그녀는 플로이드의 희망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무척 유능하고 뛰어났다.

아름다웠고 모든 귀족이 그녀와 친해지기를 원했으며 황제와의 혼약소문까지 오고 갈 정도였다.

그래서 그녀가 청혼을 받아 주었을 때는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뻤다.

‘나를 받아 준 건 그녀 역시 야망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 외에 자신을 만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비록 정략결혼이어도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그래서 빠르게 후사를 보고 황제와 밀약을 맺어 가문을 번성시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그를 보는 공작 부인의 시선은 나날이 싸늘해지기만 했다.

그녀가 실망한 시선만을 남긴 채 북방으로 떠나 버렸을 때는 벌레라도 된 것처럼 자괴감을 느꼈다.

‘내가 가문을 부흥시켰을 때에도 돌아보지 않았다.’

리안이 자라면서 칼라브리아 공작가는 이전의 명성과 영광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녀에게서는 어떤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랬는데……….

‘왜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

그는 실패했고 모든 것을 잃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전보다 더 벌레처럼 바라보며 무시해야 할 공작 부인이 그의 앞에 앉아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고 그녀의 속내는 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꼭 해야만 하는 말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 것 같았다.

“나와…….”

말을 꺼내는 게 스스로 너무 염치 없이 느껴져서 얼굴이 뜨거웠다.

“다시…… 잘해 볼 생각이 있는 거요?”

“없어요.”

민망할 정도로 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잘못 짚은 셈이지만, 후회는 없었다. 지금은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역시 어쩔 수 없나.

그렇게 생각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지금으로써는 말이에요.”

무척 나직해서 순간 잘못들은 게 아닌가 생각되는 공작 부인의 말이었다.

지금으로써는 그렇다니.

그럼 앞으로는 달라질 수도 있다는 말인가.

차마 그렇게는 물을 수 없었다.

공작은 아까보다 더 우물거리는 어조로 물었다.

“리안에 작위를 물려주고 나면…..

갈 곳 말인데.”

“갈 곳이 뭐요?”

“나도…… 북방에 가도 괜찮은가?”

말 중간 중간에 헛기침이 섞여서 나왔다.

“뭐, 넓으니까 마음대로 해요.”

공작 부인 역시 헛기침을 하면서 엄격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내 영지에서는 놀고먹을 수 없어요.”

“장작이라도 패라는 거요?”

“검이랑 활을 배우지 않았어요? 사냥을 배워요.”

두 사람은 딴청을 부리듯 서로 다른 쪽 벽에 걸린 그림 쪽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별로 자신은 없는데.”

“노력해 봐요. 가르쳐는 줄 테니.”

공작 부인은 수도에 있던 시절부터 숲을 누비고 매를 키우는 걸 무척 좋아했다.

사실 공작 역시 제법 높은 경지의 무술을 익혔으니 승마술이나 궁술에는 조예가 깊었다.

“노력해 보겠소.”

그 말을 듣자 공작 부인은 어색한 듯 손을 만지작거리더니 자리에서 휙 일어섰다.

“어딜 가는 거요?”

공작은 어쩐지 아쉬워서 저도 모르게 공작 부인을 불렀다.

“축제에 참석해야지요.”

“그런 자리는 무척 싫어하지 않았나?”

“그렇긴 하지만, 리안의 곁에 있는 동안이라도 부모 노릇을 하고 싶군요.”

그는 ‘어머니’가 아닌 ‘부모’라는 단어의 행간을 놓치지 않았다.

“음. 혹시 저녁에 당신을 에스코트할 이가 아직 없다면….”

이번에도 그녀 쪽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공작 부인 역시 이쪽을 보지 않는 눈치였다.

“네 시까지 데리러 오세요.”

짧게 대답한 뒤 공작 부인은 방을 떠났다.

무뚝뚝하게 앉아 있던 공작은 문이 닫히자마자 벌떡 일어나 욕실로 달려갔다.

생애 두 번째.

절대 망쳐서는 안 되는 데이트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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