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추천이라니. 지금 이게 무슨 기숙사 장 뽑는 게 아니잖아요!”
미나즈의 경악한 목소리가 집무실에 울렸다.
“우리는 지금 제국의 황제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요.”
놀란 미나즈에게 리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현재 당신의 황위 계승 서열은 저보다 훨씬 높습니다만.”
“그, 그거야…… 맞는 말이긴 하지만…!”
리안이 아직 대공 작위를 잇지 않았으니 백작.
원칙적으로는 공작인 미나즈가 더 높은 순위인 건 맞았다.
“세계 최고의 권력자 자리를 폭탄 돌리기처럼 미루지 마세요.”
“그런 게 아닙니다. 당신이 적합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플로이드 공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리안에게 동조했다.
“당신은 황제와 공작가의 유착이라는 부당한 상황에 대해서 유일하게 목소리를 낸 공작이었지요. 황제의 횡포에도 맞섰고, 제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힘썼으며 오랜 궁중 생활로 정치적 감각도 뛰어나죠.”
스스로도 유능하다고 자부했지만, 공작 부인의 입으로 그런 말을 들으니 솔직하게 기뻤다.
공작 부인은 표정이 풀린 미나즈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당신의 그 올곧음. 그리고 긍지는 제국을 이끌기에 부족함이 없지요.
어려운 길이지만, 모두를 위해 받아 들여 주세요. 에이브로트 공작.”
두 쌍의 보랏빛 눈동자가 기대에 찬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할 시간이…….”
“당신이 말했듯 우리에게는 시간 여유가 별로 없습니다.”
창밖의 해가 높아져 이제 슬슬 오후로 접어든 시간.
황제가 에오가이노스를 떠나는 일몰 안에는 폐위를 공표해야만 했다.
미나즈는 홀로 발코니로 나와 생각에 잠겼다.
‘거절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가능성은 있어도 설마 그러겠어?
라고 여겼다.
지금까지 그 설마 하던 일들을 전부 해 왔던 남자라는 걸 간과한 것이다.
‘황제의 자리를 사양하고 기사로 남겠다라….’
너무 대단한 결단이라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리안의 입장에서는 그게 더 나을 지도 모른다.
‘제국의 대공이자 역사상 최강의 기사인가.’
그냥 단순한 대공이 아니다.
미나즈가 공작 간의 결합을 금지하는 법안을 추진 중이니 다시는 두개 공작가의 결합으로 대공이 태어 날 수가 없다.
페이드라 공국은 제국에서 파생되었다고 하나 독립된 공국.
로베르 페이드라 대공과 스카이는 공국의 주인일 뿐 제국의 대공은 아니다.
그는 제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유일한 대공이 될 것이다.
‘황제가 되면 전투에도 나갈 수 없겠지.’
황제가 되면 자연히 행동에 제약이 따르고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든다.
하다못해 가벼운 사냥을 나가려 해도 법도를 따지고 시기를 골라야만 하는 것이다.
참석해야 할 국가적 행사나 외교적 의무 또한 수도 없었다.
리안의 성격상 그런 걸 원치 않을 것이다.
세계 최강의 기사가 전쟁터도 토벌에도 나서지 못한다는 건 재능 낭비이자 국가적인 손실이다.
미나즈는 복잡한 시선으로 발코니 너머 방 안을 보았다.
생각에 잠긴 리안의 유려한 옆모습에는 어떠한 망설임도 없어 보였다.
그의 결정이 맞기 때문에 저렇게 확신에 차 있는 것일까.
‘엘레노어는 뭐라고 하려나.’
왠지 묻지 않아도 그녀가 황후가 되고 싶어 할 리는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리안은 얼핏 생각이 많지 않아 보여도 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그는 엘레노어가 바라는 일이라면 뭐든 했을 것이다.
그가 이런 선택을 했다면 아마 맞겠지.
사실 그녀는 황궁의 별궁에 묶어 두기에는 아까운 여자였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끄는 제국의 모습이 기대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이 아니라 조금 더 시간이 지난다면…….’
둘 다 이제 스무 살.
검에 대해서 일가견을 이룬 리안은 앞으로 한동안 육체의 전성기다.
기사로서 수많은 전설을 써 내려갈 수 있다.
현재 그는 백작이므로 부인의 신분이 평민이어도 제약이 없었다.
그 위치에서라면 엘레노어도 제약없이 자유롭게 활동하며 자신의 재능을 제국에 흩뿌릴 것이다.
‘내가 둘이 더 준비될 때까지 시간을 벌어 줄 수 있겠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미나즈의 무겁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녀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공작에 즉위해 거친 제국 정치판에서 입지를 쌓았다.
솔직히 혼란한 정국을 이어서 맡아 정비하는 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길이 보이자 그녀는 결정을 망설이지 않았다.
미나즈는 발코니 문을 열고 방으로 돌아왔다.
“좋아요. 받아들이겠어요.”
리안의 보랏빛 눈동자에 화색이 돌고 공작 부인은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그들이 뭐라 말하기 전에 미나즈가 빠르게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무엇입니까?”
리안의 물음에 미나즈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올렸다.
“차대는 내가 지목하게 해 줄 것.”
대리석 같은 리안의 이마가 난감한 듯 살짝 찌푸려졌다.
“그건 저…… 입니까?”
“그래요.”
미나즈는 시원스럽게 대답하고 말을 이었다.
“엘레노어라면 향후 활동으로 분명히 작위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그 때가 되면 황후로 맞이하는데 문제가 없겠죠.”
이번에 세운 공로로도 작위를 받는데 부족함은 없었지만, 주동자끼리 서로 포상을 주고받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당신의 후계자가 태어나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태어나는 제국 역사에 손꼽히는 인재인 리안보다 나을 가능성은 낮겠지.
애초에 그녀는 리안이 준비만 되면 망설임 없이 물러날 생각이었다.
제국을 더 잘 이끌 인재가 황제가 되어야 하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말하는 대신 미나즈는 리안을 재촉했다.
“조율할 시간이 없어요. 받아들일 거예요, 말 거예요?”
이쪽에서 한발 양보한 이상 끝까지 발을 뺄 수는 없을 것이다.
예상대로 리안은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황위 계승자로 삼겠다는데 그렇게 대놓고 싫어하는 기색은 보이지 말아 줘요.”
미나즈는 슬쩍 핀잔을 준 뒤 손가락을 하나 더 펼쳤다.
“그리고 내가 황제 되면 반말해도 되나요?”
“그게 조건입니까?”
“응. 나는 편하게 대하지 않으면 근질근질해서요.”
농담조였지만, 반쯤 진심이 섞여 있었다.
“자꾸 존댓말을 하면 연하라도 남자로 보인단 말이지.”
“반말로 좋습니다.”
딱 부러지는 리안의 대답에 미나즈는 혀를 찼다.
이런 철벽남 같으니.
“내 조건은 이거로 끝. 황제가 되는 걸 수락하겠어요.”
미나즈의 시원스러운 결정에 공작부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가서 승계 발표를 준비시키지.”
마음의 준비는 다소 필요했으므로 그녀의 배려를 기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둘이 남자 리안이 정중하게 미나즈에게 감사를 표했다.
“제 억지를 받아 줘서 감사합니다.”
“억지라고 생각하지 않아. 어차피 내게 나쁜 일도 아니고.”
공작 작위를 지키기 위해 결혼하지 않을 정도로 사명감이 강한 그녀였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는 건 새로운 도전인 동시에 영광이었다.
생각지 못했기에 당황했으나 슬슬 즐거운 떨림과 기대가 가슴 속에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황제로서 첫 명령을 내려도 될까?”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리안의 대답을 들은 미나즈의 마음이 쿵쿵 뛰었다.
왜 황제가 그토록 리안에게 집착했는지 조금쯤 알 것 같았다.
이 대단한 남자의 수호를 받는 데는 언제까지고 포기하기 싫은 뿌듯함이 있었다.
“제국의 빠른 안정을 위해서는 민심을 수습하고, 혼란을 정리할 계기가 필요하잖아?”
“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선 축제를 열자.”
미나즈의 말에 리안은 살짝 눈썹을 들었다.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위령제와 함께 새 시대를 여는 즐거움을 제국민들에게 선사하는 거야. 그간 시달린 팰리시티에도 즐거운 일이 있어야 할 테니까.”
이유를 들으니 리안도 납득한 기색을 보였다.
“제국의 기사단장으로서 축제의 성공에 기여해 주겠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책임지고 완수하겠습니다.”
리안의 대답에 미나즈가 입꼬리를씩 올렸다.
“그러면 데이트를 하자.”
보라색 눈동자에 당혹이 어린 걸 보고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게 놀라지 말고, 나랑 하자는 게 아니니까.”
물론 내가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말이지.
미나즈는 속마음을 꾸욱 누르며 다시 말했다.
“엘레노어와 데이트를 해. 이번 황제는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그게 기사단장으로서의 소임입니까?”
“제국을 혼란에 밀어 넣었으니 슬슬 모두가 기대하는 답을 들려 줄때도 됐잖아. 들어 보니까 둘이 제대로 데이트 한 번 해 본 적도 없는 것 같던데?”
둘의 관계는 제국 초유의 관심사였다.
괜히 더 이런저런 추측이 범람하기 전에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리는 게 깔끔할 터였다.
“제국을 이 지경으로 발칵 뒤집어 엎어 놓고 죄송 헤어졌습니다. 같은 소리를 하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미나즈의 말에 리안의 잘생긴 입매에 미소가 어렸다.
“그럴 염려는 없을 겁니다.”
담담한 대답에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애정이 짙게 배어났다.
그 모습이 너무나 수려해서 상관없는 여자들도 한 번 보면 마음이 뒤흔들릴 것 같다.
황제가 되면 저 얼굴을 문화유산으로 지정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미나 즈는 리안의 어깨를 팡팡 두들겼다.
“그럼 이제 가 봐. 해야 할 말이 있잖아.”
리안은 고개를 끄덕인 뒤 미나즈에게 예를 올렸다.
물러가려는 그의 등을 뿌듯하게 두드리며 미나즈가 짓궂게 말했다.
“그래, 그래. 간 김에 힘도 좀 쓰고, 자식은 최소 둘은 낳아야 하니까.”
농담처럼 말했지만 진심이었다.
칼라브리아와 플로이드 공가를 다시 분리하고 제국의 5대 공작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제국을 수호하게 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 형태였다.
“너 닮은 애 하나 낳아서 칼라브리 아를 주고 엘레노어 닮은 애 낳아서 플로이드 주면 되겠네. 하나만 낳으면 작위 환수할 거니까 힘 좀 내.”
“그거라면……… 염려 마십시오.”
웃는 리안의 얼굴에서 자신감이 넘쳤다.
그가 나가자 미나즈는 흐물흐물 녹아서 의자에 주저앉았다.
“하아, 어디 저런 호색한 또 없나.”
중얼거리다가 어마어마한 사태 때문에 잠시 잊고 있던 클로드가 떠올랐다.
‘그 녀석은 그쪽으론 기대가 별로 안 되는데.’
그렇게 생각했지만, 정작 미나즈의 얼굴은 슬며시 붉어졌다.
한참 커진 키와 제법 수려한 얼굴.
그리고 마지막에 남긴 의미심장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애 상대로 왜 빨개지고 난리래.”
생각을 몰아내려 고개를 휘휘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에오가이노스의 집무실.
그 말은 이제 이곳은 그녀의 성이 된다는 뜻이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 전신을 감싸 올랐다.
“우선은 축배를 들어 볼까.”
그녀는 벽에 장식된 훌륭한 명주를 제멋대로 꺼내서 잔에 따랐다.
술은 뜨거웠지만, 세상 무엇보다도 깊은 맛을 담고 있었다.
멀리서 신전의 종이 울리고 있었다.
엘레노어는 이제 제법 익숙해진,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탑에 앉아 있었다.
황제의 폐위를 알리는 의식이었다.
평민인 그녀를 제외하고 모두 참석하기 위해 백작 저를 떠났으므로 탑안에는 그녀뿐이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혼자는 아니었다.
[동화 속 왕자님이 왕이 되는 모습을 보겠군.]
베아트릭스가 킬킬거리며 말했다.
엘레노어는 만감이 교차하는 눈으로 광장을 내려 보았다.
수많은 인파.
저 모두가 리안의 즉위를 축하하고기뻐하기 위해 모인 이들일 것이다.
너무 굉장해서 자꾸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 어쩌면 좋지.’
막막한 기분 속에 의식은 계속 진행되었다.
이제 곧 제국의 스물두 번째 황제의 시대를 알리는 종이 울릴 것이다.
무거운 기분으로 그것을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어?”
순간 눈앞이 캄캄해져서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군가 그녀의 두 눈을 가린 것이다.
스카이가 몰래 돌아와 장난을 치는 걸까?
아니면 블레인이나 비앙카스타가 신경을 써 주러 돌아온 걸까.
“뭐예요? 누가 이런 장난을 치는 거야.”
핀잔을 주며 손목을 떼어 낸 엘레노어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시야를 메운 아름다운 얼굴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왜 이 남자는 항상 예상하지 못한 순간내에 곁에 있는 걸까.
그날 밤에도, 나를 찾아온 날에도.
그리고 지금도.
“왜 또 여기 있는 거예요.”
엘레노어가 낮게 중얼거렸다.
“당신과 있고 싶으니까.”
어쩐지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또 데네브라도 떴나요?”
“그럼 또 같이 밤을 보내 주는 겁니까?”
웃음 섞인 리안의 말에 엘레노어는 답하지 못했다.
그는 발그레한 엘레노어의 눈가를 문지르며 자신 쪽으로 끌어들였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나와 정식으로 교제해 주십시오.”
리안의 목소리와 함께 황제의 즉위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