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뭐라고?”
미나즈가 반문했지만, 클로드는 대답 대신 머쓱하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말해 줄 생각이 없다면 스스로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공작이랑 결혼하고 싶다고 한 거 맞나?’
사실은 재확인할 수 있어도 생각이 거기서 더 나아가지를 못했다.
미나즈는 머리에 떠오르는 많은 가능성 중에 가장 현실성 있는 것을 꺼내 보았다.
“너 설마 리안을 정말로.…?””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클로드가 펄쩍 뛰었다.
“평소에 그렇게 눈에 하트 띄우고 뜨겁게 바라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그냥 좀 동경하는 것뿐입니다!”
차마 뜨겁게 바라본 것을 부정하지는 못하는구나.
미나즈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다시 물었다.
“아니면 뭐야? 페이드라 공작이야?”
클로드의 단정한 미간이 격렬하게 찌푸려졌다.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결론이 먼저 나옵니까?”
“하지만, 플로이드 공작 부인은 유부녀잖아. 보르미아 공작님은 네 할아버지보다도 나이가 많고, 칼라브리아 공작은 잡아 죽일 듯이 싫어하고.”
“당연히 그 사람들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더 그럴듯한 상대가 있는데.”
그래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미나즈를 보고 클로드는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있지 않습니까. 미혼이고, 같은 연령대에 제법.… 예쁜 여자 공작이.”
클로드는 쑥스러운 듯 잦아드는 목소리로 말한 뒤 눈을 돌렸다.
잠시 멈춰 있던 미나즈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뭐야! 나라고?”
놀란 나머지 목소리가 폭발적으로 복도에 울려 퍼졌다.
클로드는 신경 쓰이는 듯 흘깃 주변을 살폈으나 미나즈를 나무라지는 않았다.
“말도 안 돼! 농담이지?”
“내가 그런 농담을 할 사람으로 보입니까?”
부정하고 싶은 마음과 달리, 물론 클로드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농담하기는커녕 다른 사람이 농담을 시작할 기미만 보여도 불쾌한 표정을 짓는 쪽이니까.
그러나 도무지 머리로는 마음으로 든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그렇게 눈치가 빠르면서 왜 모르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같이 목욕도 했잖아! 내가 네 거기도 씻어 줬는데!”
미나즈의 말에 클로드는 당장 난간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표정을 지었다.
미나즈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황망하게 흔들고 있던 손의 엄지를 치켜 들며 외쳤다.
“요만했다고!”
“………부탁이니 고백한 상대에게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만한 말은 좀 참아 주지 않겠습니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클로드는 거대한 정신적 데미지로 인해 후 불면 바스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미나즈는 허둥거리며 자신이 벌인 참담한 사태를 수습하려 애썼다.
“하지만 나보다 일곱 살이나 어리잖아. 같은 연령대도 아니고, 애초에 서로 그런 상대로 생각한 적도
“당신은 없는지 몰라도 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고위 귀족치고 꽤 늦은 나이인데 클로드는 그 흔한 염문조차 없었다.
제법 반반한 얼굴이고 이상할 정도로 인기가 많은데 왜 결혼하지 않을까.
굳이 결혼하지 않는 건 클로드 특유의 고집이라고 생각했다.
‘저 녀석이 나를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다고? 정말로?’
아무리 들어도 머리로만 이해할 뿐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하릴없이 바닥만 바라보고 있으려니 클로드가 한 걸음 다가섰다.
“나는 이제 당신을 졸졸 따라다니던 그 어린애가 아닙니다.”
멍하니 얼굴로 시선을 올렸다.
지금까지 딱히 의식하지 못했는데 그의 얼굴은 생각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었다.
목소리는 마치 허리에서 울리는 것처럼 낮고, 단단한 목선에 목울대가 도드라졌다.
넓은 어깨도, 제법 탄탄한 팔도, 샤프한 턱선도 모두 그야말로 남자의 것이었다.
“나는…… 모르겠어. 너무 당황스럽기만 해.”
한참 머뭇거린 끝에 간신히 내놓은 말이었다.
궁색했지만 솔직한 심정이 그랬다.
클로드는 예상한 듯 별로 표정의 변화는 없었으나 눈동자에 뼈아픈 기색은 숨기지 못했다.
“백작을 설득하는 일은 맡기겠습니다. 진정되면 다시 얘기하죠.”
그렇게 말한 후 클로드는 미나즈를 내버려 둔 채 복도를 돌아 걷기 시작했다.
미나즈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평생 진정될 거 같지가 않다.
꼿꼿이 굳은 채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저만치 걸어가던 클로드가 갑자기 멈춰 섰다.
뭔가 빼먹은 말이 생각난 듯한 기색이었다.
그는 천천히 다시 돌아와 미나즈의 앞에 섰다.
그리고 그녀가 여전히 세우고 있는 엄지를 쥐었다.
“지금은 이만하지 않습니다.”
단호하고도 진지하게 말한 뒤 그는 검지를 펼쳐서 엄지와 함께 둥글게 원을 만들게 했다.
그것을 보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한번 끄덕인 후 다시 자리를 떠났다.
“바빴나 보군.”
황제의 서재로 들어서는 미나즈를 향해 공작 부인이 말했다.
복도에서 굳어 있느라 한참 늦게 도착한 탓이었다.
“네. 두 분은 이야기 잘 나누셨나요?”
미나즈는 움찔한 속내를 숨기며 태연하게 되물었다.
공작 부인이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호법청의 입법관들을 불러 업무를 지시했다던데. 법률 개정 준비를 하는 건가?”
“네. 그 부분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으나 함께 목숨을 걸고 거대한 적에 맞선지라 서로 전우애 비슷한 것이 쌓여 있었다.
그래서 미나즈는 말을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그들이 추진하고 있었던 일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런 고로 제국 법률상 황제가 평민 황후를 맞이할 수는 없어. 그러니까 우선은 엘레노어를 코르티잔(정부)로 맞이하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
리안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나는 모든 준비가 끝난 뒤 엘레노어를 정식으로 맞이하려 했습니다.
코르티잔이 되어 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좀 우리를 봐서라도 융통성을 발휘해 줘요. 법이 그런 거잖아요? 설마 제국의 법체계를 무시할 셈은 아닐 텐데.”
“제국의 법을 무시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럼 대체 뭐야?
묻는 눈으로 바라보자 리안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황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미나즈는 평생 몇 번 지어 보지 않은 표정을 오늘 벌써 두 번째 지었다.
대충 묘사하자면 멍해져서 입을 떡벌린 채 눈을 휘둥그렇게 뜨는 것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죠?”
“말 그대로입니다.”
“내 머리는 오늘 사용량을 초과했으니 좀 알기 쉽게 설명해 줘요.”
마지못해 등 떠밀려 맡는 연기를 하려고 자신이 황제가 될 줄 몰랐다는 등 과분하다는 둥 헛소리를 하면한 대 날려 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리안은 예상하지 못했던 척겸손을 떨지는 않았다.
“저는 처음 검을 잡던 그날부터 제국을 수호하는 기사로서 살아가고자 했습니다.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마음을 굳이 버릴 필요는 없어요.
제국은 기사의 나라입니다. 황제이자 기사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지금의 제게 그런 여유는 없습니다. 애초에 저는 별로 황제의 자질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황제 자리를 무슨 귀찮은 모임 총 무를 떠맡은 양 핑계를 대면서 거절하다니.
비범한 줄은 알았지만, 너무 지나쳐서 보통 사람의 머리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미나즈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말도 안 돼요. 당신은 황제로 태어난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우리 모두 그렇게 알고 자랐어요. 엘레노어도 그렇게 말하잖아요.”
일부러 엘레노어를 들먹였다.
그러자 리안은 금빛 속눈썹을 드리 우며 그림 같은 장면을 만들어 냈다.
“분명 그녀는 신비한 구석이 있습니다.……. 아무도 모를 사실을 많이 알고 있기도 하고요.”
그의 말대로 엘레노어는 평범한 평민 출신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혜안이 뛰어나고 명석했다.
그런 그녀가 리안이 자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황제가 될 운명이었다는 말을 하는 걸 몇 번이나 했다.
여간해서는 남의 의견에 휘둘리지 않는 미나즈도 왠지 그녀가 하는 말은 다 맞을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리안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 이야기 속의 나는 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엘레노어는 자신의 가정을 확신하는 거 같던데.”
리안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만약 내가 그녀의 이야기대로 됐다면.… 어떤 원하지 않는 흐름에 말려들어서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보라색 눈동자가 우수에 젖어서 위험할 정도로 아련한 분위기가 풍겼다.
진지한 말투와 표정을 볼 때 그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고 결론을 내린 듯 보였다.
“하지만 우리는 당장 새로운 황제가 필요하다고요. 당신이 하지 않으면 대체 누가 황제가 되겠어요?”
수많은 이들이 단 하루라도 이루기 위해 목숨을 내바칠 자리였다.
어설픈 자를 내세우면 납득하지 못한 자들이 들고 일어나 금방 혼란이 벌어질 것이다.
답답한 표정을 짓고 있던 미나즈의 시선이 공작 부인에게 닿았다.
두 사람은 방금까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참이었다.
“아, 혹시 공작 부인?”
플로이드 공작 부인이라면 꽤 괜찮은 대안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아하고 카리스마가 넘치며 유능하고 제국의 공작으로서 황위 계승권도 가졌다.
그녀가 퇴위하면 자연스레 리안에게로 이어질 거란 사실도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공작 부인의 고개가 좌우로 움직였다.
“나는 제국의 숫자를 조정하는 조절자로 사는 삶을 사랑하네. 또한, 매를 데리고 북방의 영지를 누비는 자유도 포기할 생각이 없어.”
리안을 낳자마자 북방으로 가 20년간 수도를 멀리한 공작 부인다운 말이었다.
그녀의 초연함은 뭐라 토를 달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해서 바꿀 여지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러면 아무도 없잖아요.
보르미아 공작님은 나이가 너무 많고 후계자도 없어서…….”
머리를 굴리던 미나즈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아까도 뭔가 이런 기분을 느낀 거 같은데.
공작 부인과 리안이 진지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당신을 추천할 생각입니다.”
정말 태어나서 가장 말도 안 되는 하루다.
미나즈는 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