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이제 어쩔 작정인지 정했어?”
아무 말 없는 엘레노어를 보고 스카이가 재차 물었다.
엘레노어는 뭔가 말하려다 주변을 의식하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이런 얘기는 나가서 해요.”
복도에는 주변을 감시하는 기사들과 시녀들의 왕래가 적지 않았다.
황녀와의 담판이 걱정되어 왔을 뿐 진지하게 도망치자는 제안을 하려고 온 건 아니었을 터.
엘레노어는 스카이와 함께 로사그란데를 나섰다.
그들이 걷기 시작하자 마주치는 모든 기사와 시녀들이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황녀궁의 시녀들이 당신을 향해 머리를 숙이는군.”
스카이의 중얼거림에 엘레노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실이 바뀌었어도 엘레노어는 이제 평민에 불과했다.
그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졌겠지만, 그녀는 지금 귀족일 때보다 오히려 훨씬 나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곧 이 궁의 주인이 될지도 모르니 당연한 일인가.”
로사그란데는 제국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여인이 기거하는 궁.
흠칫해서 농담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정말로 농담이 아닐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녀오셨습니까.”
황궁을 떠나 백작 저의 문으로 들어서자마자 크레니아가 깍듯한 인사로 그들을 맞이했다.
“피로하시지요. 차를 준비할까요?”
“아뇨, 괜찮아요.”
엘레노어를 무시하며 사라질 것을 종용하던 크레니아는 완전히 돌변해 있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저택에서 그녀를 미묘하게 차별하던 메이드들의 대우는 무척 공손해졌다.
고위 귀족들조차 그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했다.
마땅한 호칭이 없었으므로 ‘그녀’, ‘그분’ 등으로 칭하며 예를 표하는 분위기였다.
“표정이 좋지 않은데.”
엘레노어와 함께 응접실에 들어선 스카이는 굳어진 그녀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에게서 도망치자는 말은 수도 없이 들었는데, 진짜 흔들린 건 처음이네요.”
엘레노어의 말에 그가 잘생긴 눈썹을 들어 올렸다.
“황녀와 황제가 죽이려 할 때도 도망을 안 가더니 황후가 될 거 같으니 도망가고 싶다고?”
‘황후’라는 단어가 스카이에게서 직접 튀어나오자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이 나온 김에 엘레노어는 그간 계속 일부러 떠올리지 않으려 외면 했던 말을 입 밖에 냈다.
“백작님께서는…… 정말 황제가 되는 걸까요?”
“아마 그렇겠지.”
엘레노어는 힘이 빠진 것처럼 양손으로 얼굴을 짚은 채 소파에 털썩주저앉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스카이가 믿을 수 없다는 어조로 물었다.
“당신, 설마 정말 황후가 되기 싫은 거야?”
싫고 좋고 그런 문제가 아니지.
그건 여태까지 살아온 삶과 너무나 동떨어진, 도저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이런 건 말도 안 되잖아요.”
엘레노어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말도 안 된다.
평민 출신의 남편을 잃고 홀로된 여자.
이제는 귀족도 뭣도 아닌 통속 소설 작가일 뿐인데 황후라니.
되고 싶다거나 되기 싫다거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도 어림없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러니까 대체… 누가 연애하려고 이렇게까지 준비를 하냐고요.”
진짜 어디다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부모님에게 좀 반항하다가 현실의 철퇴를 맞고 포기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반역까지 일으키고 심지어 그걸 성공하다니.
바로 곁에서 그 놀라운 일들을 지켜본 결과 엘레노어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난 준비가 안 됐다고요.”
황후가 되면 황궁에서 외교관이나 만나고, 공작 부인이 ‘할머니 밖에 오지 않는다’ 라고 칭했던 따분한 자선 파티나 하면서 살아가야 하겠지.
아니 애초에 그 이전의 문제다.
아직 데이트 한 번 제대로 안 했는데.
흔한 연애편지도 교환 안 했는데 무슨 갑자기 황후야.
너무 준비가 과하다. 과해도 너무 과하다.
황후는커녕 한 남자에 정착할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다.
솔직히 부귀영화도 좋지만, 글도 쓰고 강연도 하고 가고 싶은 파티에 가면서 마음껏 즐기는 자유로운 삶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머리가 아픈가?”
머리를 싸매고 끙끙대는 엘레노어에게 스카이가 물었다.
그녀는 얼굴을 쓱 문지른 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머릿속을 복잡하게 메꾸는 생각을 몰아내려 애쓰며 말했다.
“벌써부터 생각할 필요는 없겠죠.”
엘레노어는 의미심장하게 말하며 피로한 듯 소파에 몸을 묻었다.
“어차피 지금쯤 저 대신 다른 사람들이 제가 황후가 되지 못할 이유를 수백 개쯤 찾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아마 결론도 대신해서 내릴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있을지 없을지 알수도 없는 문제로 골치를 썩이기 싫었다.
엘레노어는 대신 화제를 스카이에게로 돌렸다.
“그보다 당신은요?”
“나?”
“이제 페이드라 공국으로 돌아갈 건가요?”
솔직히 그가 곁에서 사라진다면 섭섭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를 붙잡는 건 이기적이고 무책임하다.
그래서 감정을 내비치지 않으며 묵묵히 스카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스카이가 말끝을 흐리며 잠시 생각한 뒤 고개를 작게 저었다.
“우선 그들이 어떤 결론을 내리는지 보자고.”
하려던 말을 삼킨 듯한 기색이었다.
그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엘레노어 쪽을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낮게 속삭였다.
“당신의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살짝 찡긋대는 바다색 눈동자는 예전보다 더한 매력을 담고 있었다.
그가 가지 않는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반가운 마음이 들어 버렸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 엘레노어는 고개를 숙였다.
*
같은 시각 에오가이노스의 집무실.
엘레노어의 예상대로 그곳에서는 격한 탐색이 벌어지고 있었다.
거대한 책상 곳곳에는 흉기나 다름없는 두께의 법전이 펼쳐져 있었고 제국 최고의 석학들이 눈에 불을 켜고 법조문과 판례를 뒤적이고 있었다.
다만, 그들이 찾고 있는 방향성은 그녀의 예측과 달랐다.
“그럼 방법이 없단 말이야?”
“지금으로써는 불가능합니다.”
미나즈의 질문을 받은 학자 한 사람이 휑한 표정을 지은 채 답변했다.
“제국법에 의하면 평민은 결코 황후가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서적을 뒤져 봐도 단 하나의 예외도 인정된 유례가 없습니다.”
아무리 정략결혼이 없다 해도 신분제 사회인 이상 평민이 황후가 되는 건 금기였다.
평민은 황제와 관계를 맺어도 정부가 한계.
수백 년의 판례를 뒤적여도 정비는 커녕 후궁이 된 역사조차 없었다.
그랬기에 아일린이 받아들여졌어도 그녀의 어머니는 황궁을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 리안이 돌아오면 뭐라고 할 거야?”
미나즈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말했다.
현재 리안은 플로이드 공작 부인과 대담 중이었다.
다행히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었지만, 곧 돌아올 것이고, 그때가 되면 어떻게든 결론을 내려야 했다.
“어떻게든 오늘 중으로는 새로운 황제의 즉위를 알려야 한단 말이야.”
제국이 혼란에 휩싸이는 것을 막으려면 폐위와 동시에 후계를 발표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리안이 차대 황제가 되는 것은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
그는 타고난 제왕의 자질을 지녔으며 정통성으로도 최고였다.
제국법상 5공작은 황위 계승권을 지니고 있었고, 그중 두 개 공작가의 결합으로 태어난 그의 혈통은 황제의 사생아인 황녀에 비해 뒤질 것도 없었다.
그러나 황후 문제라는 거대한 걸림돌이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즉위부터 황제가 제국법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시작은 앞으로의 통치를 위해 가장 중요한 한 걸음입니다.”
“그건 알지만, 어떻게든 해 봐야 되잖아! 설마 제국법을 들이밀면 리안이 납득하고 포기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녀의 말에 주변 사람들은 근심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반대의 파도가 몰아칠 것이라는 엘레노어의 예상과 달리 고위 귀족들은 그녀가 황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모든 상황은 황가가 자초한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은 그녀와의 결혼을 반대했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다.
황제까지 몰아낸 마당에 리안이 물러설 거라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저희 역시 다시 제국을 피바다로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하나 잡음이 일지 않기 위해서는 적법한 절차를 밟는 게 최고입니다. 우선은 법을 개정하고, 그 후에 황후를 맞이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그럭저럭 타협의 여지가 있는 제안이 나왔으나 미나즈의 미간 주름은 풀리지 않았다.
“리안이 과연 그걸 받아들일지…….”
고 있던 클로드가 고개를 절레절레저었다.
“칼라브리아 백작은 엘레노어를 그런 불안한 지위에 몇 년이나 두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든 설득 좀 해 주십시오. 그런 건 공작 전하의 특기가 아닙니까?”
학자들은 도리어 미나즈의 바짓가 랑이를 붙잡고 들어졌다.
그들이 제법 이치에 맞는 말을 하는 이상 매몰차게 거부할 명분도 없었다.
“아아, 알았어. 노력은 해 보겠지만, 잘 안 돼도 나를 원망하지는마.”
마지못해 대답하자마자 마치 때를 맞춘 것처럼 시종장이 그들을 부르러 왔다.
“칼라브리아 백작님께서 두 분 공작 전하를 찾으십니다.”
고개를 끄덕인 뒤 미나즈는 반대쪽 책상에 가득 쌓인 서류더미를 가리켰다.
“설득은 일단 내가 맡아 볼 테니 당신들은 새롭게 입법할 법안들을 제대로 준비해 줘. 주요 현안들은 저쪽 서류에 간추려 뒀으니까.”
학자들에게 명령한 뒤 두 사람은 집무실을 나섰다.
“우리가 리안을 설득할 수 있을까?”
“글쎄요. 제 생각에는 그 이전의 문제일 것 같습니다.”
“그 이전의 문제라고?”
“당신은 엘레노어가 무조건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합니까?”
클로드의 말에 미나즈는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이라면 황후 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가정은 할 필요도 없겠지만, 어쩐지 그 여자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쪽도 문제네. 그 커플은 도저히 예상이 안 된단 말이야.”
미나즈는 골치 아픈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었다.
“우선은 어떻게든 리안을 설득해서 시간을 벌어 보자. 법률 처리를 최대한 빨리 하겠다는 말로 약을 팔아 보자고.”
그렇게 말한 뒤 그녀가 은근슬쩍 덧붙였다.
“통과시키는 김에 우리도 통과시키고 싶은 법들을 슬쩍 끼워 넣자. 주술을 좀 더 철저히 금지하고 귀족간의 살인에 대한 처벌을 강화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건….”
“공작과 공작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안입니까?”
클로드가 말을 자르며 문장을 대신 맺었다.
어떻게 알았냐는 듯 쳐다보던 미나 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그 서류 가져온 거야?”
클로드의 손에는 ‘공작 간 결혼 금지 법안’의 초안 서류가 들려 있었다.
그녀가 그것을 받아 들려고 손을 내밀며 말했다.
“지금 초안 작업 중인데 가져오면 누락되잖아. 당장 돌려놔야……….”
“미안하지만, 그건 찬성할 수 없습니다.”
클로드가 서류를 휙 뒤로 치웠다.
미나즈가 다시 잡으려 하자 그는 손이 닿지 않도록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발 돋음을 하고 껑충 뛰어 봤지만, 굴욕적이게도 손은 닿지 않았다.
‘이 녀석, 언제 이렇게 큰 거야?’
업어 키운 게 엊그제 같은데 참으로 건방지게 자라 버렸다.
미나즈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쏘아붙였다.
“꼭 필요한 법안이라는 거 알잖아!
왜 자꾸 억지를 부려?”
미나즈의 불만스러운 물음에 클로 드가 헛기침을 한 뒤 나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야 내가 공작과 결혼하고 싶으니까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예상치 못한 말에 미나즈의 육감적인 얼굴이 멍하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