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엘레노어는 습관적으로 노크를 하려다 그냥 문손잡이를 쥐었다.
어차피 예의를 차릴 사이가 아니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문을 열자 난장판이 된 방 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단 커튼은 온통 찢어지고 호화롭게 장식되어 있었을 값진 물건들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기물을 부수라는 지시는 없었으니 현재 기거하고 있는 이가 직접 한 것이다.
“뭐 하러 왔어?”
날카로운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그쪽을 돌아보자 의자 위에서 웅크린 아일린의 푸른 눈이 인상적으로 도드라져 보였다.
완벽하게 사랑스럽던 고귀한 황족은 사라지고 초췌하고 눈에 핏발이 선 소녀만이 있었다.
모습만이 아니라 그녀의 모든 현실은 명백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감히 나를 내려다보며 오만을 떨러 왔어?”
악에 찬 외침에 엘레노어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그런 악취미에 낭비할 만큼 시간이 여유롭지 않아서.”
대답한 엘레노어는 끌고 온 카트를 밀며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가까이 다가오지 마! 이 천한것!”
황녀는 마치 야생 동물 같은 반응을 보였다.
안에는 아일린과 그녀 외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딱히 불안하진 않았다.
아일린의 발과 손이 족쇄와 수갑으로 결박당한 상태이기도 했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주변 어딘가에 일라 이가 있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태연하게 다가가 카트 위에 놓인 덮개를 열었다.
찻주전자와 찻잔, 그리고 달콤한 쿠키와 디저트가 가득 놓인 접시가 드러나자 황녀의 시선이 쏠렸다.
“뭐야? 착한 척이라도 할 생각인가?”
황녀는 쌀쌀맞게 반응했지만, 침이 넘어가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갇혀 있는 장소는 로사그란데여도 죄인에 걸맞은 대접을 하고 있었다.
산해진미만 먹다가 거친 빵과 묽은 스프만 나오니 최근 식사를 거부하는 중이라 들었다.
“이렇게 갇혀 있으니까 단 것이 끌리겠지요. 저도 최근에 갇혀 봐서 잘 압니다.”
비꼬는 목소리로 말하며 엘레노어는 찻잔에 차를 따랐다.
김이 모락모락 솟아나는 모습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착한 척하려 해도 소용없어. 그런 유치한 수작에 넘어갈 거 같아?”
“그럼 어느 정도 해야 하나요? 다시는 우리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풀어 드린다든가?”
“그런 짓을 하는 건 네 자유지만, 해도 딱히 내가 고마워할 이유는 없어! 나는 억울하게 갇혀 있는 거니까…….”
그렇게 말해도 기대하는 기색이 묻어났다.
엘레노어는 차를 마시며 딱 잘라서 말했다.
“알아요. 그래서 할 생각도 없고요.”
“뭐?”
“이건 내 식사인데요. 로사그란데의 차와 디저트가 유명해서 한번 맛보고 싶었거든요.”
사실은 혹시 풀이 죽어 있으면 살살 꼬드길 당근책을 쓸 생각으로 가져왔다.
하지만 통할 것 같지 않은데 굳이 인정을 베풀 이유는 없었다.
먹음직스러운 파이를 베어 무는 엘레노어를 보고 바짝 약이 오른 황녀가 소리쳤다.
“너 따위, 너 따위 천한 것이 황실의 식사를 해?”
“음, 내 생각에 네 문제는 너는 되는데 남들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반말인지 존댓말인지 묘한 말을 들은 황녀는 잠시 멍한 얼굴을 했다.
그것을 보며 엘레노어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너도 칼로 찌르면 똑같이 피 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야 할 거 같아요.”
“뭐가 어째? 이 미친..…!”
황녀는 자신의 욕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짜아악!
날카로운 파열음이 방 안을 갈랐다.
“뭐죠, 그 표정은? 사람을 지하 감옥에서 죽이려 해 놓고 뺨 맞을 각오도 안 했어요?”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손바닥이 얼얼했다.
그러나 충격에 젖은 푸른색 눈동자가 상당히 볼만해서 기분이 후련해졌다.
“지, 지금 너 무슨…….”
“다음은 귀하게 태어나신 분 혀는 칼로도 안 잘리나 볼까요?”
엘레노어는 카트 위에 놓인 잘 벼려진 칼을 집어 들며 미소를 지었다.
창백한 황녀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했다.
‘내가 여주에게 이런 협박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하지만 목적을 이루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릴 여유는 없었다.
손에 쥔 칼을 쾅 소리가 나도록 곁에 있는 테이블에 내려치자 황녀가 굽히고 있던 몸을 움찔했다.
“페이드라 공작에게 건 종속의 서 약을 해제해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황녀가 코웃음을 쳤다.
“허접한 협박이네.”
“나는 당신과 달리 별로 그딴 거 잘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계산할 필요도 없고.”
엘레노어는 칼을 직 그어서 황녀의 뺨 근처로 가져갔다.
빛을 반사하는 칼날이 다가오자 황녀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를 죽이면 그 양반도 죽는다는 걸 알 텐데?”
“내가 당신을 죽지 않을 정도로 고문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겠지요?”
“그딴 짓을 하면 바로 혀를 깨물거야!”
짐짓 여유로운 말투였으나 입가가 경련하고 있었다.
“당신은 절대 못 죽어요. 팔다리를 묶고 재갈을 물려 둘 거니까. 혀를 깨물어도 금방 조치해서 살릴 거고 죽지 못하도록 입에 깔때기를 끼워서라도 억지로 먹일 거예요.”
“감히………! 너처럼 천한 계집이 감히 나에게 그런 잔인한 짓을 할 수는 없어!”
엘레노어의 협박에 황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이 나라의 황녀이자 하스카토르 제국의 혈통을 이은 사람이야!
너 따위 벌레와는 전혀 다른 고귀한 사람이라고!”
성격도 별로지만, 정말 말버릇까지 나쁜 어린애로군.
“과연 그럴까요?”
엘레노어는 이 버릇없는 소녀를 좀 더 효과적으로 괴롭힐 방법을 떠올렸다.
“베아트릭스가 말해 줬지. 당신은 황제의 딸이 아니에요.”
“뭐라고?”
황녀의 푸른 눈이 찌푸려졌다.
“황제는 어느 날 찾아온 집시 여인의 말만 믿고 당신을 받아들였고 정을 줬지만, 사실 돈과 명예를 노리고 던진 거짓말일 뿐 당신은 황가와 아무 관계도 없어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황가의 피를 이었어! 그래서 베아트릭스도 다뤘잖아!”
“그건 베아트릭스가 당신을 이용해서 편히 지내기 위해 꾸며낸 거짓말이야. 당신은 그저 집시의 딸일 뿐이라고요.”
“그럴 리가 없어! 아니야!”
황녀는 거의 발작처럼 부정하는 소리를 질렀다.
“부정해도 소용없어요. 지금 바깥에도 전부 그렇게 알려져 있으니까.”
믿지 않는 듯 고개를 젓고 있으나 이미 완전히 동요한 기색이었다.
“그러니 이제 당신이 여기서 죽어도 아무도 신경 안 써요.”
“내, 내 친구들은 나를 믿을 거야!
아, 아버지도….”
“그럴 리가. 누구에게도 마음으로 다가가지 않고 조잡한 서약이나 주술에만 의존했는데. 모두 네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을 뿐 마음으로 따른 이는 아무도 없어요.”
냉정하게 말한 뒤 엘레노어는 황녀의 손목을 거칠게 쥐었다.
그 순간 스트링스톤으로 인해 나타난 장면에 줄곧 유지하고 있던 엘레노어의 평정심이 흔들렸다.
‘정말 지독하게도 많이 걸었군.”
황녀의 주변은 붉은 선으로 빼곡했다.
조금이나마 솟아오르던 동정심이 바로 자취를 감춰 버렸다.
엘레노어는 미리 준비해 온 주술진이 그려진 종이를 펼친 뒤 황녀에게 강요했다.
“자. 여기에 손을 얹고 서약들을 해제해요.”
“싫어..… 싫어.”
황녀는 혼이 나간 듯 중얼거리며 팔에 힘을 주고 버텼다.
“아무래도 말로 해선 안 될 모양이군요.”
엘레노어는 테이블에 꽂아 놓았던 단검을 뽑아 들었다.
“마침 잘됐네요. 당신은 내 친구의 손을 잘랐었죠.”
“아, 아아아아아아아악! 하, 하지 마!”
단검을 치켜들자마자 황녀의 비명이 울렸다.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손을 잘라 놓고 당할 처지가 되자 조금도 침착하지 못했다.
눈은 실핏줄이 터졌는지 새빨갛고 다리는 덜덜 떨렸으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우선 손을 하나 자르고 그 후에 거절하면 그 다음에는 입술을 가로로 찢을 거야. 그 예쁜 얼굴을 고루고루 그어서 흉측하게 만든 뒤에 다시 물어보도록 하죠.”
잔뜩 겁을 주며 엘레노어는 손목을 단단히 쥐었다.
“잘 생각해요. 이 예쁜 손끝도 제대로 붙어 있어야 의미가 있는 거니까요.”
그대로 검을 치켜들자 드디어 바라던 대답이 나왔다.
“하, 할게! 하, 할 테니까 자르지 마! 제, 제발 자르지 마! 하지 마세요!”
애원하는 황녀의 푸른 눈에서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엘레노어는 벌벌 떠는 손을 그대로 끌어다 주술진 위에 얹었다.
그리고 황녀의 몸에서 뻗어 나간 붉은 선들이 하나하나 자취를 감추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
“웁.”
황녀의 방을 나오자마자 엘레노어는 입가를 움켜쥔 채 벽에 기댔다.
어쩔 수 없이 하긴 했지만, 역시 남을 괴롭히는 건 그다지 성격에 안맞는 모양이었다.
자기가 내뱉은 말들이 끔찍해서 속이 좋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호흡을 정리하고 있는 그녀에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기뻐할 줄 알았는데.”
익숙한 저음의 목소리가 능글맞게 울렸다.
“내가 자유의 몸이 된 게 그렇게 싫어?”
스카이가 씩 웃으며 손수건을 내밀고 있었다.
“끔찍하네요. 협박 같은 건 다신하기 싫어.”
깊은 숨을 내쉬며 엘레노어는 손수 건을 받아들었다.
“어떻게 벌써 알았어요?”
“아아. 때마침 하반신을 보고 있었거든.”
엘레노어가 못 들은 척하자 그가 다시 느물거렸다.
“뭐 하고 있었는지 물어보지 않는 건가?”
“전혀 안 궁금하니까 말하지 마요.”
엘레노어는 딱 잘라 말한 뒤 손수 건으로 입술을 닦고 물었다.
“실패하면 어쩌려고 여기까지 왔어요?”
“당신이 실패할 리 없다고 생각했지.”
스카이는 태연하게 대답한 뒤 물었다.
“황녀가 그냥 집시의 딸이라는 거 정말인가?”
“그럴 리가요. 그 여자는 이미 황족의 피로만 부릴 수 있는 마수를 통과했고 베아트릭스도 다룰 수 있는데.”
“그럼 괴롭히려고 말한 건가?”
고개를 끄덕이자 스카이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거 꽤 괜찮네.”
엘레노어는 스카이가 내민 손에 의지해 몸을 폈다.
똑바로 서자 스카이가 다시 물었다.
“약속을 지키러 간다고 했다 들었는데. 설마 나를 구해 주겠다던 그 거?”
엘레노어는 고개를 끄덕인 뒤 불쑥 말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스카이는 난데없는 감사에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들었다.
“당신이 목숨 걸고 황녀를 잠재우지 않았다면 탈출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겠죠. 괜히 우쭐할까 봐 말하는 게 늦었지만, 덕분에 살았어요.”
스카이는 잠시 뿌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씁쓸한 기색을 내비쳤다.
“빚을 갚았으니까 이제 관계를 청산하자고 할 차례인가?”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뭐 언젠가는 그렇게 하자고 할 테지.”
스카이의 말투가 왠지 의미심장했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엘레노어가 날카롭게 질문을 던졌다.
“백작님은 지금 어디 계신가요?”
“공작들끼리 회합 중이야.”
“당신은 왜 안 가셨어요?”
“나는 더 중요한 볼일이 있으니까.”
스카이는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당신을 데리고 도망칠 마지막 기회잖아.”
“아직도 그런 말을 해요?”
대수롭지 않게 받아치자 스카이가 진지하게 물었다.
“방금 황제가 폐위됐어. 지금 공작들이 모여서 뭘 하고 있다고 생각해?”
엘레노어가 커다란 눈을 찌푸렸다.
답이 너무나 명확해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차기 황제를 정하는 거군요.”
“그거라면 별로 의논할 것도 없겠지. 이미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니까.”
스카이는 가볍게 고개를 저은 뒤 말했다.
“논쟁이 필요한 중요한 자리가 하나 더 있지 않나?”
그의 말뜻을 깨달은 엘레노어는 제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