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푸른 하늘에 선명한 붉은 공이 높이 떠올랐다.
그것을 쫓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그들은 얼마 후 소리를 듣고 달려온 어머니에 의해 손목을 잡혀 집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평온한 가운데 일견 평소와 같아 보이는 팰리시티가 예년과 다름을 알리는 단상이었다.
제법 무더워졌으나 광장을 식혀 주던 초대형 분수는 멈춘 채였고 여인들은 색색의 유행하는 화려한 드레스 대신 검은 옷을 입었다.
“당신이 만든 광경입니다.”
높은 침대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던 황제는 그를 향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름다운 보라색 눈동자가 탓하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내가 만든 광경이라.’
황제는 자신이 연루되어 있음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어딘가 생소한 창밖 정경은 2주전 이곳에서 일어난 비극이 남긴 잔해였다.
제국의 깃발이 걸려 있던 중앙의 깃대에 조의를 표하는 흰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광장 맞은편, 칼라브리아 백작 제 앞으로 늘어선 행렬.
그들은 저번 광장 전투에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모여든 인파였다.
처음보다는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느껴지는 게 없으십니까?”
이번 목소리는 다소 높고 좀 더 감정이 실려 있었다.
미나즈 에이브로트가 비꼬는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이쪽을 바라보았다.
황제는 그 얼굴을 보며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지 않은 모습을 본 지 무척 오래됐다고 생각했다.
“빠르게 안정되고 있군.”
황제는 무뚝뚝하게 답하며 방 안에 들어선 면면을 살펴보았다.
플로이드 공작 부인, 에이브로트공작, 보르미아 공작과 로우앤 공작.
한때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공작들이 싸늘하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이대로 평온을 되찾게 될 것처럼 보이지만, 누군가는 저기에 걸린 참 극의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로우앤의 딱딱한 말이 방 안을 울렸다.
“나를 어쩔 셈이지.”
황제의 눈빛에서는 제국을 호령하던 패기가 사라져 있었다.
황제는 그것이 없는 자신은 아마 다소 창백하고 여윈 체격을 지닌 보통 남자처럼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변명하자면 그는 현재 제법 심한 부상으로 병석에 누운 상태였다.
봐준 것이 명백한 리안의 공격으로도 늑골이 골절당해 몇 주를 앓아누워야 하는 상처를 입었다.
마음만 먹었으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취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황제의 질문은 똑바로 리안을 향했지만, 답은 다른 이에게서 나왔다.
“재판을 열어 죄를 묻고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겠지요.”
“지금, 여기서 말인가?”
“당신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으니 이곳에서 약식으로 진행하려 합니다.”
황제의 재판을 약식으로 진행한다.
라.
그러나 황제는 조금의 항의조차 하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 끌려가 수모를 당하는 건 이중 처벌이었다.
그 싸움에서 진 이상 그에게 재판에서 승리할 가능성 따위는 없었으니까.
“제국의 황제라도 법 위에 있지 못합니다. 그런데 법에 명시된 제국 귀족의 자유를 제한하고 핍박한 죄, 백성을 지켜야 할 황제의 사명을 저버리고 학살을 명한 죄, 제국법에 따라 진행되는 재판을 방해하고 멋대로 무시한 죄…….”
그에게 부여된 혐의가 건조한 말투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황제는 그것을 집중해서 듣는 대신 방 안의 인물들을 관찰했다.
냉담하게 등을 돌린 세 공작을 차례로 본 뒤 그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인물의 존재를 깨달았다.
한 발짝 뒤에 윤기 나는 흑발을 늘어뜨린 키가 크고 수려한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유일하게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황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스카이 페이드라.’
다른 누구보다 그에게 더욱 깊은 배신감이 느껴졌다.
딱히 더 잘못한 건 없지만, 대놓고 반발한 공작들과 달리 웃는 낯으로 환심을 산 후 직접 등에 검을 꽂은 격이라 더욱 그럴 것이다.
황제는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시선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렸다.
곧 리안의 얼굴에 붙잡힌 듯 시선이 멈췄다.
그는 별로 관심 없는 듯 무심해 보였다.
자신을 방해하는 이를 하나 무너뜨린 것쯤은 그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없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가장 배신감을 느껴야 마땅한 상대인데 미워할 수가 없었다.
“이 모든 죄상의 근거와 결과가 명백하여 굳이 제국민의 의견을 물을 필요조차 없다고 여겨집니다. 내게 부여된 제국 대법관의 권리로 판결을 내리겠습니다.”
지루한 나열이 끝났다.
이 대목에 이르자 담담하던 황제 역시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말았다.
“가스카일 하스카토르, 당신은 제국의 황제에서 폐위되었습니다.”
황제, 아니 가스카일은 멍하니 자신에게 내려진 판결을 들었다.
그는 하스카토르 공작으로 강등되었으며 제국민을 학살한 죄로 죽을 때까지 하스카토르 공작령에 유폐되어 살아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에게 부여된 하스카토르 공작위는 그가 생존해 있는 동안만 유효하며 후손에게 이어지지 않고 국가로 반환될 것이라 했다.
실리적인 로우앤 공작의 성격답게 무척 간결하고 알기 쉬운 판결이었다.
“오늘부로 에오가이노스를 떠나셔야 합니다.”
자신의 것이었던 성에서 떠나야 한다는 말을 듣자 멍해졌다.
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폐위된 황제가 되었음에도 자신이 멍청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마 제국에서 가장 최악의 황제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자신이 몇 번의 실수를 반복했을 때 그걸 두고 보지 않을 만큼 힘과 정의감이 넘치는 녀석들이 하필 동시대에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는 더 싸워 나갈 힘이 없었고 패배한 현실을 부정할 정도로 어리 석지도 않았다.
받아들일 각오를 했는데도 여전히 마음에 맺힌 질문이 있었다.
“칼라브리아 백작.”
리안을 부르자 그가 듣고 있다는 듯 잘생긴 눈썹을 살짝 올렸다.
“내겐 자네가 뜻을 이루지 못하도록 막을 기회가 많이 있었네. 체면을 지키고 손해를 최소화하려다 날려 버린 기회였지.”
이제 와서 생각해도 소용없지만, 피를 토하며 후회할 장면들이 너무 많았다.
이미 손안에 들어왔다고 자신만만하다가, 혹은 리안의 집념을 얕잡아 봤다가 벌어진 일들이었다.
어차피 다 끝난 일이니 마음에 한점 궁금증이라도 풀자는 생각에 질문을 던졌다.
“만일 내가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녀를 죽였다면 그땐 어떻게 했을 건가?”
“연루된 모든 이의 배를 가르고 내가 살게 된 지옥을 모두에게 보여줬을 겁니다.”
리안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으나 섬뜩했다.
가정만으로도 살기를 뿜어낼 정도니 처음부터 마음을 돌릴 방법은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대에게 모든 걸 물려주려고 했는데.”
나지막한 목소리에 리안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본인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을 강요하기 위해 가진 모든 걸 잃은 것인가.’
만인지상의 황제로 태어나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아니, 어쩌면 아직 하나는 남아 있었다.
가스카일은 더욱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일린도 내 곁으로 오게 되나?”
이 상황에서도 지키고 싶은 게 남았다는 건 다행인 걸까, 아니면 불행인 걸까.
었다.
“이렇게 되기 전에 그녀에게 말하셔야 했습니다. 남들을 해치지 말고 가진 것에 감사하며 살라고 말입니다.”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은……….”
“뒤를 남겨 둔 채로 앞을 향해 걸을 수는 없습니다.”
한 치의 여지도 없는 목소리였다.
황제는 양팔을 힘없이 늘어뜨린 채 참담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를 남겨 둔 채 공작들은 황제의 방을 떠났다.
*
에오가이노스 입구를 서성이고 있던 오타주르 유니스는 밖으로 나온 공작들을 보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어찌 되었습니까?”
“귀족 회의에서 결정한 대로라네.”
보르미아 공작의 답변에 오타주르가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
“폐하께서 수도를 떠나시는 거로군요.”
“이제는 폐하가 아닐세.”
황제의 방에서 전달한 내용은 마치 즉결 심판처럼 보였으나 사실 지난 일주일간 끊임없이 이어진 회의와 회합, 그리고 격렬한 토론 끝에 내려진 처분이었다.
그 과정에서 팰리시티의 고위 귀족은 대부분 참석해 입장을 표명했으며 그 외에도 많은 귀족의 의견을 들었다.
그것들을 취합하는 방식은 제국에서 생소한 것이었다.
“귀족 전체의 다수결이라니. 정말 놀랐습니다.”
귀족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하위귀족들은 모두 똑같이 한 표를 행사한다는 사실에 무척 감명을 받은 듯했다.
고위 귀족들 간의 이너서클에서 모든 게 정해졌으므로 그들은 자신의 뜻을 제국 정책에 반영하고자 한다면 상급자를 찾아가 뇌물과 함께 부탁해야만 했다.
그런 상황이니 결정권을 가지게 된 그들이 그런 권리를 준 사람의 뜻을 따르기로 한 것도 당연한지도 모른다.
“다수가 언제나 옳은 건 아니지만, 이번처럼 대세를 파악해 결정할 때에는 유용하지.”
미나즈는 여유롭게 답한 뒤 오타주르의 공을 치하했다.
“갈팡질팡하는 귀족들을 잘 설득해 줘서 고맙군.”
“제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그저 공작님들의 신의에 한마디를 보탰을 뿐입니다.”
“겸손할 것 없네. 앞으로도 그대의 도움이 필요할 테니까.”
“목숨을 걸고 완수하겠습니다.
황제의 유배지가 될 하스카토르 공작령은 팰리시티 남부의 호수 가운데에 있는 섬으로 정해졌다.
바다로 착각될 만큼 커다란 호수가운데여서 외부의 접근이 어렵지만, 기후가 나쁘지 않으니 여생을 보내는데 큰 괴로움은 없을 것이다.
그곳으로 황제를 호송하는 업무는 비하인드 나이츠와 오타주르가 맡기로 했다.
“체펠린 궁정백은 어떻게 됩니까?”
“아직 결정되지 않았네.”
황제의 범죄 행위에 동조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사이를 중재하려고 애쓴 노 백작을 처벌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체펠린의 평소 성품을 볼 때 황제를 따라서 유배지로 갈 게 뻔했다.
“잘 설득해서 계속 봉직하게 하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만.”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어떻게든 설득해 봐야지.”
미나즈가 설득을 말하며 어깨를 으쓱이자 주변에 있던 이들은 동시에 체펠린이 결국 남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기쁜 표정을 짓는 오타주르에게 뒤에 서 있던 보르미아 공작이 물었다.
“그럼 그녀는 지금 뭘 하고 있나?”
직접 호칭하지 않아도 ‘그녀’가 ‘엘레노어’ 임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로사그란데로 갔습니다.”
“로사그란데? 황녀에게 갔단 말이야?”
미나즈가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네.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고 하더군요.”
“약속이라고?”
모두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르자 스카이가 나섰다.
“제가 가 보겠습니다.”
“네? 하지만…….”
“황녀의 시선에 닿는 곳에 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스카이는 의문을 일축한 뒤 미소를 지었다.
“제국의 공작 여러분께서는 당장 정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안이 있으니까요.”
그는 바다색 눈동자에 도발적인 빛을 담은 채 리안을 또렷이 마주 보았다.
“엘레노어를 만나거든 곧 내가 찾아갈 것이라 전해 주십시오.”
리안은 그렇게만 말한 뒤 걷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따라 공작들은 모두 에오가이노스의 황제 집무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