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꺄아아아아아악!”
황녀가 양손을 거머쥐고 정신이 나간 것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호위병들이 창으로 리안을 위협해 물러나게 한 사이 체펠린은 황급히 황제에게 다가갔다.
“폐하!”
바닥에 늘어진 황제의 얼굴을 바로 해서 상태를 살폈다.
눈이 감겨 있었고 입가에서 한 줄기 피가 흐르고 있었으나 숨은 쉬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복부와 목덜미를 각각 때려 기절시킨 모양이었다.
생존에 안심하는 것도 잠시.
살짝 물러났던 리안이 다시 다가올 기미가 보였다.
체펠린은 자신의 몸으로 황제를 덮으며 호위들을 향해 소리쳤다.
“칼라브리아 백작을 포위해! 황제폐하를 보호하라!”
그나마 남아 있던 호위들이 앞을 가로막았으나 금방 제압당해 바닥으로 쓰러져갔다.
암울한 상황에서 체펠린은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굉음을 들었다.
황제를 뒤따르던 상당한 규모의 기사단이 이제야 황궁으로 진입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황제 폐하는 칼라브리아 백작을믿고 있었던 거다.
황녀의 위기 때문에 마음이 급하기도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리안칼라브리아가 정말 자신을 해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기에 기사단들보다 한발 앞서 도착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탓에 지금 이렇게 바닥에 눕는 신세가 되었다.
체펠린은 고개를 들어 리안을 바라보았다.
“정말 당신이……. 제국을 배신하는 겁니까?”
“제국을 지키는 겁니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려고 하는 걸 알 텐데 리안은 대답해 주었다.
이렇게 제국의 분열을 일으키고 황제의 뒤를 치는 게 어떻게 제국을 지키는 거냐고 호통을 치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의 폐하는 제국을 위해 없는 것이 낫습니다.”
가차없는 말이 체펠린의 폐부를 찔렀다.
아무 말도 못 하는 체펠린의 뒤로 기사단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수백 명에 달하는 황실 근위대 뒤로 인원이 훨씬 많은 제국 기사단, 그리고 그 뒤로는 사병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아무리 강해도 이 많은 인원을 대적할 수는 없을 것이다.
뒤늦게 도착한 지휘관은 상황을 보고 무척 당황한 기색이었다.
우선 진격을 멈춘 그들에게 체펠린이 뭔가 명령하기도 전에 리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제는 황가의 이기적인 번영을 위해 금지된 주술을 사용하고, 제국의 귀족을 기만하고, 마땅한 권리를 탄압했으며 민간인을 학살하라는 명령까지 내렸습니다. 제국의 법을 존중하고 정의를 수호해야 할 기사단장으로서 그의 신병을 구속해 만민앞에 세워 단죄하려고 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무슨 방법을 쓴 건지 넓은 황궁 전체를 뒤덮도록 쩌렁쩌렁 울렸다.
리안은 가볍게 몸을 놀려 마차 위로 뛰어 올라갔다.
그의 모습이 보이자 혼란스럽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기사들의 시선이 쏠렸다.
[모든 것은 제국법에 따라 처리될 것입니다. 제국 기사단장으로서 제국 기사단에 의미 없는 피를 뿌리지 말 것을 명합니다.]
기사들 대부분은 그저 꼼짝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당수가 전의를 잃어버렸음이 공기로 전해졌다.
리안은 비록 기사단을 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소년 시절부터 그가 단장이 될 거라 여기고 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제국 기사단에 있어서 세계 최고의 기사이자 차대 황제로 여겨지던 리안의 존재감은 황제보다도 더욱 무거운 것이다.
그러나 기사들의 동요를 좌시하지 않는 움직임이 있었다.
쐐애액!
날카로운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마차 위에 있던 리안의 몸이 사라졌다.
그리고 원래 그가 있던 자리로 화살 한 방이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놀라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본 체펠린은 분노한 얼굴의 프리차드백작을 볼 수 있었다.
“감히 황제의 목에 피를 뿌리고 아직도 제국 기사단장이라 칭하느냐!”
서릿발 같은 호령을 내린 것은 리카르도 후작이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싸우고자 하는 의욕이 온전했다.
이미 여기까지 나섰는데 그냥 돌아설 수는 없는 것이다.
“모두들 달려들어 황제 폐하를 구하고 저 반역자를 처단하라!”
고래고래 소리치자 굳어 있던 기사단들이 움직일 기미가 보였다.
이대로 다시 충돌하면 추가 피해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다시 마차 위에 나타난 리안이 미간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또다시 몸을 날렸다.
“칼라브리아 백작! 그건 무슨!”
체펠린은 두 눈을 의심했다.
리안이 결코 하지 않을 것 같았던 짓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를 지키고자 한다면 내 말을 따르십시오.]
그 고결한 기사가 쓰러진 황제의 몸을 들어 올리고 그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었다.
장면을 목격한 모두가 경악한 표정이었다.
“화, 황제 폐하께 그 무슨 불경한…!”
[당신들이 피를 보고 싶지 않은 만큼 나 또한 이곳 누구의 피도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한 수단이라면 무엇이든 사용하겠습니다.]
자세히 보니 리안은 입술을 움직이지도 않는데 그의 목소리로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황제가 인질로 잡히자 가뜩이나 술렁이던 수많은 기사와 병사들은 더욱 혼란에 빠졌다.
인원이 많아도 리안으로부터 황제를 다치지 않게 구해내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차마 프리차드 백작과 리카르도 후작도 황제를 신경 쓰지 말고 치라는 명령을 내리지는 못하는 듯했다.
그러나 사태를 부추기는 이는 한 명 더 있었다.
“공격을 멈추지 마세요!”
어느새 프리차드 백작 곁으로 물러난 황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폐하께서는 백작님에게 당해 눈을 감으시기 전에 이미 제게는 죄도 없고, 모든 걸 물려주겠다고 했어요!
저 배신자를 잡아서 내 앞에 꿇려 주세요!”
아마 황녀가 기대한 반응은 자신의 말에 사기가 돋구어진 기사들의 진격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리안을 처리하지 못해도 저지해 두면 그 틈을 타 도망쳐서 다시 훗날을 도모하려고 생각했을 터였다.
그러나 기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누구도 꼼짝하지 않는 가운데 황녀의 목소리만 계속해서 울렸다.
“여기서 굴복하지 말고 저 남자를 잡아 제 앞에 바쳐요! 감히 제국의 황실에 검을 겨눈 대가를 치르게 하라고요!”
목소리가 격렬해질수록 기사들의 표정은 굳어갔다.
황녀의 말에 비장한 각오를 다지기보다 아연해진 것이다.
황녀의 발언은 이미 황제를 죽은 자 취급하는 듯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전력으로 달려와 칼을 맞고 쓰러진 아비의 앞에서할 말이 아니었다.
심지어 천사로 일컬어지던 황녀가 할 말은 더욱더 아니었다.
그들 모두는 광장에서 황녀의 죄를 파헤치는 피해자들의 절절한 증언을 들었다.
티끌만한 믿음이 남았던 이들도 지금 외침에 도리어 등을 돌렸을 것이다.
“제 말은, 제, 제 말은 거짓말이 아니에요! 제국은 나의 것이 돼야 해요!”
눈을 돌리는 기사들 앞에서 황녀는 이제 거의 절규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고개를 돌리며 상황을 살피던 그녀가 체펠린과 눈이 마주쳤다.
“빨리 저를 지키고 제국의 영광을 바치도록 명령해요!”
체펠린은 그녀의 말에 답할 필요가 없었다.
리안이 일이 번지기 전에 원인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황제를 마차에 눕혀 놓은 리안은 곧장 다가와 황녀의 목을 쳤다.
[명에 따르지 않는다면 다음엔 당신 차례입니다. 프리차드 백작, 리카르도 후작.]
두 귀족은 호락호락 당하지 않겠다.
는 듯 검을 앞으로 그러쥐었지만, 얼굴은 명백히 창백해졌다.
호위들 틈에 선 황녀를 이 수많은 인파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쓰러뜨렸다.
이런 괴물에게서 몸을 지킬 수는 없다.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자신의 목숨은 반드시 사라지는 것이다.
[무기를 내려놓으시오.]
두 귀족에게는 삶을 버리더라도 전쟁을 승리를 이끌어 쟁취하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결국, 덜덜 떨던 손에서 검이 떨어져 내렸다.
그들이 검을 버리자 사방에서 무기를 버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수천 명의 대군이 단 한 사람 앞에서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는 장면이었다.
“광장으로 돌아가 소요를 정리하고 황궁을 정비하십시오. 곧 대법관에 의한 재판이 치러질 것입니다.”
짧게 말을 남긴 리안은 휘파람을 불어 자신의 말을 불렀다.
황제와 황녀를 신고 아무렇지 않게 사라지는 그의 뒤에서 기사들이 머리를 숙였다.
*
“이렇게 쉽게 정리 되다니. 보고도 믿을 수가 없네요.”
엘레노어의 입에서 황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거대한 제국의 쿠데타가 겨우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이루어지다니.
직접 계획에 참가했지만, 정말 이렇게 쉽게 이루어질 줄은 몰랐다.
너무나도 편안하게,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시나리오는 꺼낼 필요조차 없었다.
“쉽다기보다 원래라면 말도 안 되는 불가능한 상황이겠지.”
“그렇습니다. 대군을 대적하는 대신 소수의 인원으로 습격해서 머리를 저격한다……. 이론은 완벽하지만, 실현하는 건 말도 안 되는 탁상 공론이어야 정상입니다.”
스카이가 낮게 한숨을 쉬자 블레인 역시 얼떨떨한 어조로 격렬하게 동조했다.
그런 게 가능하다는 건 저 말도 안 되는 괴물 한 사람의 존재 때문이었다.
“일반적인 사례라면 후폭풍이 더 거세겠지만. 황제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파벌을 모집하고, 지방에서 차례로 반란이 일어나고 저항 운동이 벌어진다든가.”
그렇게 말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주체가 누구나 황제가 될 거라 여겼던 리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세력은 제국의 거의 모든 것이었다.
스카이가 살짝 손가락을 돌리자 렌즈는 오타주르 유니스, 그리고 보르미아 공작과 로우앤 공작이 보였다.
미나즈가 쓰러진 제국민을 옮기라 명령하며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장면에서 조작이 멈췄다.
“유능한 행정가, 법률가, 외교관에 재정까지 뒷받침되고, 곧 무가까지 장악하겠지. 지방 귀족의 여론을 잠재워줄 토착 세력들까지 있군.”
“제국민들은 아마 곧 받아들이겠지요.”
“그래. 이 싸움은 승리로 끝난 거야.”
확실히 뭔가가 더 일어나기보다는 정리되는 수순처럼 보였다.
정말 거짓말 같은 하루였다.
현실감이 없는 가운데 어쩐지 힘이 빠져 꼿꼿이 긴장하고 있던 등을 벽에 기댔을 때였다.
“그나저나 이제 저 남자의 준비가 끝난 모양인데.”
함께 앉은 스카이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준비요?”
“그렇네. 이 모든 게 당신을 반려로 맞이하기 위해 벌인 일들이잖아.”
엘레노어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의 말대로였다.
리안은 과부와 결혼하기 위해 가족에 맞서고 사람들에 맞서고 황제에 맞선 끝에 제국에 반역하고 실제로 그걸 이루어 버린 것이다.
“당신은 이제 어쩔 셈인가?”
스카이가 심술궂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