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점점 기우는군.”
렌즈를 메운 광장의 교전을 보면서 스카이가 내뱉은 감상이었다.
그의 말에 곁에 있던 블레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30분을 버티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교전에 익숙하지 않은 엘레노어의 얼굴은 창백했다.
화면에 비친 것은 영화가 아니라 현실.
연출도 없었기에 가감 없이 적나라했다.
차마 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리자 스카이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야.”
눈치 빠른 남자답게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던 말을 먼저 꺼냈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마음 한구석에 찜찜한 구석은 어쩔 수 없었다.
“끔찍하네요.”
“그래. 이 싸움에서 지면 더욱 끔찍해지겠지.”
스카이의 말대로였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 블레인이 렌즈를 돌려서 정황을 살펴본 뒤 말했다.
“지원군은 아직 시가지를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도착하기 전에 전부 정리될 것 같습니다.”
패색이 짙어졌으나 세 사람의 표정은 완전히 어둡진 않았다.
“황궁 안에서 이기면 한 번에 뒤집을 수 있겠지.”
스카이가 중얼거리며 렌즈를 조정했다.
어느새 조작에 능숙해진 덕에 금방 원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저기 있군.”
그의 나직한 목소리에 엘레노어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렌즈로 시선을 가져가자 곧 리안의 얼굴이 비쳤다.
그는 언제나처럼 무표정했지만, 그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몹시 화가 났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건조한 입가와 다르게 그의 보라색 눈동자에는 격렬한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사람 하나 잡을 표정이네요.”
리안을 잘 아는 블레인이 그렇게 말했다.
“바닥을 보니 이미 많이 잡은 거 같은데.”
“아마 대부분 기절시켰을 겁니다.
저 사람들은 별로 죄가 없으니까.”
저 많은 인원을 하나하나 해치우는 것보다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게 훨씬 어려움은 말할 필요도 없다.
리안 주변을 살피던 그들은 무서운 속도로 나타난 마차를 보고 움찔했다.
“도착했네.”
광장에서 떠난 황녀의 마차가 분명했다.
리안의 눈에 깃든 분노는 그녀를 향한 것인 모양이었다.
마차는 리안을 뒤늦게 발견한 듯 곧 방향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마차를 호위하던 병사들이 리안의 주변을 감쌌다.
“놓치면 안 되는데.”
“그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엘레노어의 초조한 목소리를 곧장 블레인이 부정했다.
여기서 황녀를 놓치면 모든 일이 너무나 어려워진다.
그러나 이미 눈앞에 벌어져 있는 학살극에 기세가 꺾인 듯 소극적인 움직임이었고 거기에 압도적인 실력 차가 겹쳐지니 버텨내지 못했다.
호위병들은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그래도 인원이 제법 많은지라 마차와의 거리는 다소 벌어져 있었다.
“백작님의 말은 어디 있죠?”
“교전을 피해 근처 어딘가에 보내 뒀을 겁니다.”
황녀는 거의 전력으로 도망가는 중 이어서 아무리 가까운 곳에 있다 해도 말을 찾아 타는 사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릴 것처럼 보였다.
“지금은 아마 타지 않겠지만.”
마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블레인이 덧붙였다.
말을 타지 않는다고?
의문을 품는 것도 잠시.
눈앞에서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저, 저거 기사들은 다 저런 거예요?”
“저런 괴물을 기사라고 하지 말아주십시오.”
제법 익숙할 블레인마저도 질린 목소리를 냈다.
리안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느낄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그 럼에도 경악스러웠다.
그는 한 번의 도움닫기로 정원의 반을 가로질렀고, 그 상태에서 순간 사라졌나 싶더니 금방 마차 옆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수백 미터를 눈 깜짝할 사이에 주파한 것이다.
그러나 단지 따라잡았다고 해서 바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저 마차를 어떻게 세우죠?”
황녀를 호위하기 위해 특수 제작된 마차는 10명이 넘는 인원이 탈 수 있을 정도로 컸고, 외관도 몹시 단단했다.
그에 반해 리안이 차고 있는 것은 가늘고 얇은 검 한 자루뿐.
마차를 부수기는커녕 닿기만 해도 부러져 버릴 것이다.
이 정도 신기를 봤으니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가능할지 의문스러운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
박진감 넘치는 장면에 저도 모르게 움찔해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빠른 속도로 달리던 마차는 리안의 칼질 두 번에 동력을 잃어버렸다.
키이이이이익!
격렬한 마찰음과 함께 마차 주변에 자욱한 먼지구름이 일었다.
곧 마차와 연결된 끈이 깔끔하게 어는 침을 삼켰다.
‘체펠린 궁정백.’
그녀가 리안을 만나도록 주선했던 남자였다.
몇 번이고 돌아보며 찜찜해하던 표정이 되살아났다.
그때는 그가 기우가 많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단지 실패를 걱정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어쩌면 이런 상황의 일각을 조금쯤은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제국 기사단장이 황녀 전하가 탄 마차를 습격하시다니요.]
체펠린의 목소리가 장치를 통해 울렸다.
그의 항의는 금방 대답을 돌려받았다.
[황실이 제국민을 향해 칼을 겨누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까?]
광장과 거리가 있으나 오감이 발달한 리안이 교전을 감지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제국민들의 안전을 위해 베아트릭스에게 힘을 돌려주는 대신 아무 망설임 없이 자신의 혀를 자르겠노라 말했던 남자였다.
그가 이 상황에 가지고 있을 감정은 불을 보듯 뻔했다.
[타인의 목숨을 취할 때는 자신의 것도 내걸어야 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습니다.]
리안은 내리고 있던 칼을 들어 올리며 마차를 겨누었다.
그의 잇새로 타오르는 듯한 분노가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끌어내고 싶지 않습니다. 제 발로 나와 주십시오.]
보라색 눈동자는 체펠린을 넘어 마차 안의 인물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단지 칼을 들어 올렸을 뿐인데 휘두르며 협박하는 것보다 훨씬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블레인이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죽이면 안 된다는 걸 기억하고 있는 거겠지.”
황녀가 죽으면 종속의 서약으로 묶인 스카이도 함께 죽게 된다.
그것을 잊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살기등등한 모습이었다.
“이참에 짜증 나는 둘을 한번에 보내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는데.”
“……그거 당신 일입니다만.”
남의 일처럼 태평한 스카이를 보며 블레인이 혀를 내둘렀다.
“농담이 아니고 진짜 위험해 보입니다. 그러게 좀 적당히 긁지 그랬습니까.”
“백작의 열 받은 얼굴을 봤으니 저 세상에서도 후회는 없을 것 같네.”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렌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엘레노어가 입을 열었다.
“황녀가 마차에서 내리고 있어요.”
황녀의 윤기나는 분홍 머리가 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안에서 누군가 만류하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그것을 뿌리친 채 마차에서 천천히 내려섰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늘 그렇듯 가녀렸고, 흔들림에 헝클어진 옷차림이 처량함을 더욱 부각시켰다.
[백작님께서…… 어떻게, 어떻게 제게 칼을 겨누실 수가 있지요.]
황녀의 목소리에서는 깊은 한이 묻어났다.
정말 진심으로 리안을 원망하는 기색이어서 소름이 끼쳤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것이다.
[서로 물러날 수 있던 기회가 여러번 있었습니다.]
리안은 칼을 내리지 않은 채 조금도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 입장을 확고히 했지만, 당신에게는 닿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저도 제 입장을 확고히 했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당신을 사랑했고, 그 마음을 감추지 않았고, 단 한 번도 변한 적도 없다고요!]
황녀는 칼을 겁내서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앞으로 나서며 말을 쏟아냈다.
[제 운명의 상대였고, 당신에게도 저보다 나은 사람이 없었어요. 그런데 당신은 제 얘기를 들으려고 조차 하지 않았죠! 이렇게 저를 불행하게 하셨어야 했나요? 지금 이 상황을 보세요! 이게 백작님이 원하신 거냐고요!]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귀가 아플 정도로 울렸다.
[저는 당신을 사랑한 것밖에 없어요! 제가 정말 죄가 있다면 그 검으로 저를 찌르세요! 해 보시라고요!]
황녀는 검 쪽으로 몸을 던지려 했다.
비장하고 슬픈 몸놀림이었으나 어딘지 연극처럼 과장된 계산이 느껴졌다.
리안은 살짝 물러서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진작 그렇게 했을 겁니다만.]
그는 입속으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황녀가 듣지 못한 듯 되물었다.
[뭐라고요?]
리안은 대답하는 대신 검을 치켜들었다. 흠칫한 황녀가 뒤로 한걸음 물러서는 순간이었다.
피익!
공기를 가르는 파열음과 함께 거대한 화살 한 대가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렌즈의 시야가 좁아 누군가 접근하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세 사람은 혼비백산했다.
리안을 노리고 날아든 듯했으나 다행히 빗나갔다.
정확히는 그쪽을 보고 있지도 않던 리안이 가볍게 피해낸 것이다.
“누구죠?”
황급히 렌즈를 돌려 본 그들은 눈을 부릅떴다.
거대하고 화려하게 장식된 황금빛 마차에서 기사가 석궁을 겨누고 있었다.
마차의 주인은 너무나도 명백했다.
“황제가 어떻게 벌써 이쪽으로 왔죠?”
“칼라브리아 백작이 이리로 온 것을 눈치챘나?”
문이 열리고 황제가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앞을 가로막은 기사들과 함께 이쪽으로 다가섰다.
[폐하!]
황녀가 틈을 타서 곧장 황제에게 달려갔다.
리안은 그녀가 합류하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는 듯 움직이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황제의 등장에 별로 허를 찔린 표정도 아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황제 역시 리안만을 또렷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대는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심각한 괴물이로군. 설마 정말로 황가에 검을 들이대다니.]
황제의 입에서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대를 태어나게 하는 게 아니었다.]
[그럴 지도 모릅니다.]
리안은 가볍게 수긍한 뒤 말했다.
[그녀가 행한 잘못을 모두 알고 계셨습니까?]
[그걸 물어서 뭐 하려는 거지?]
[당신의 처분을 정하려고 합니다.]
광오한 말에 황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세계의 권력을 거머쥔 황제 앞에 겨우 단신으로 서 있는데 어떻게 저리 당당할 수 있을까.
비현실적인 것은 그의 말이 우습게 들리지 않는다는 거였다.
혼자 검을 들고 선 남자 하나에 기사단 전체가 위압되어 있었다.
[황녀가 잘못했다 하나 그것은 전부 내가 그대를 잘못 본 탓에 벌어진 일. 내가 그 애에게 아픈 경험을 주었다. 그 애가 혼자 서서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하진 않을 것이다.]
황제의 목소리는 비장하고 단호했다.
[그렇다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물러섬 없는 빛을 확인한 리안은 더 길게 말하지 않았다.
그가 검을 들어 올리자 호위들은 신속하게 황제를 둘러싸 보호하려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들이 본 것은 칼이 햇빛을 반사하며 만들어낸 한 줄기 섬광뿐이었다.
“아아아악! 폐하!”
황녀의 비명이 사방으로 울렸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황제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