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단상 위에 서 있던 미나즈는 광장을 휙 돌아보았다.
웅성대는 사람들 너머로 근위대의 벽이 세워지고 있었다.
미리 준비한 것처럼 신속하고 정확한 동작이었다.
사병들이 팰리시티로 진입해 광장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건 이미 파악했지만, 설마 정말로 움직이는 모습을 볼 줄이야.
혀를 내두르고 있던 그녀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칼라브리아 공작가의 문장!’
광장의 서쪽 부근을 둘러싼 것은 칼라브리아 공작 가의 제복을 입은 사병이었다.
‘벌써 공작 가의 군권을 회수한 건가.’
그런 시도를 할 거라 예상했으나 이렇게 빨리 투입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사태를 예측하고 대비한 그들도 당황스러운데 영문을 모르는 관중들은 훨씬 심할 것이다.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는 자칫 자그마한 혼란도 순식간에 대참사로 번질 수 있었다.
미나즈가 눈짓하기도 전에 클로드가 의사봉을 두들기며 소리쳤다.
“모두 정숙하시오!”
클로드의 호통에 일순 사람들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는 황제를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폐하. 판결을 직접 내리시겠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황제는 당돌하게 설명을 요구하는 젊은 대법관을 흘깃 본 뒤 단상으로 나섰다.
“이 재판은 미끼다.”
황제가 입을 열자 웅성거리던 광장이 다시 조용해졌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만인지상의 자리에 군림한 이의 목소리는 모두의 시선을 끄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 이곳에서 치러져야만 했던 재판은 따로 있지.”
이건 절대 좋을 흐름일 수가 없었다.
미나즈는 슬금슬금 단상에서 내려와 원래 앉아 있던 귀빈석으로 다가섰다.
“보르미아 공작님.”
낮은 목소리로 부르자 보르미아 공작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는 사이에 황제의 말이 이어졌다.
“제국 황실은 지금 역사상 유례없는 도전을 받고 있다. 수백 년간 제국을 수호해온 황실에 대한 경외를 잃어버린 반역의 무리가 기승을 부리며 자신의 사리사욕을 찾는데 두 눈이 멀었어.”
스스로 내뱉은 말에 점점 고취되는 듯 황제의 눈은 붉게 충혈되고 이마와 목에 핏대가 솟았다.
“감히 고귀한 황가의 피를 이은 황녀를 이런 곳으로 불러내 생애 다시 없을 굴욕을 주다니.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하겠다는 발상부터가 반역의 씨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황제의 반역 운운에 앞자리에 앉은 귀족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혹시 얽힐까 봐 눈을 들지 못하는 그들의 앞을 오락가락하며 황제는 열변을 쏟아냈다.
“짐은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했으나 이 재판이라는 희극에 대한 구역질을 참아내는 게 고작이었네! 별것도 아닌 지방 귀족 나부랭이의 거짓섞인 증언 따위로 황녀를 몰아세우다니. 이 모든 게 반역의 증거지.”
귀에서 피가 나올 것 같은 궤변에 이쪽이야말로 구역질을 참아내는 게 고작이었다.
미나즈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는 듯 썩은 표정을 한 사람들도 많았으나 창칼을 들이댄 사병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하는 듯했다.
“정말 그 증언이 거짓이라면 어째서 확인을 거부하시는 겁니까?”
“확인할 필요도 없어.”
클로드의 정당한 물음을 황제는 간단하게 일축했다.
“진실은 후대의 역사가가 평가해줄 것이다. 나는 황제로서 이곳에 모인 반역자를 모두 섬멸하겠다!”
그 말을 계기로 광장이 발칵 뒤집혔다.
공포에 질린 군중들이 광장을 벗어나려 애쓰고 사방에서 비명이 울렸다.
공황 속에서 미나즈는 칼라브리아백작저를 바라보았다.
황실 근위대가 저택을 향해 진군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그러나 거기에 있을 엘레노어와 스카이를 걱정할 틈도 없었다.
황제가 미나즈와 보르미아 공작을 가리켰다.
“황가를 능멸한 공작들을 붙잡아 내 앞에 무릎을 꿇려라.”
정말 막장이로군.
“이렇게 미친놈처럼 나올 줄이야.”
미나즈는 낮게 중얼거리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검으로 손을 가져가는 그녀를 향해 황제가 협박조로 을러댔다.
“저항하면 그 즉시 사살하겠다.”
그 말을 대놓고 무시하듯 미나즈는 일부러 더 강렬하게 검을 뽑아 들었다.
황제의 명령을 받은 황실 근위대가 그녀의 주위를 둘러쌌다.
그리고 팔을 잡으려 다가서는 순간이었다.
“물러서시오.”
낮은 외침과 함께 시커먼 그림자들이 나타나 두 공작의 앞을 가로막았다.
말할 것도 없이 리안이 미리 배치해 둔 비하인드 나이츠였다.
단상에 있는 클로드 앞에도 일라이가 서서 가로막고 있었다.
‘이런 미친 가능성을 예지한 건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군.’
병력이 배치되는 와중에도 설마 이렇게까지 가진 않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황제는 정확히 엘레노어가 예상한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황제는 갑자기 나타난 어둠의 기사들을 보고 이를 내보였다.
아무리 비하인드 나이츠라 해도 모두를 죽이고 나갈 수는 없으니.
“저항하고 사람들에 섞여 들어가면 모인 인파와 함께 모두 죽이겠다.
그대들은 이 광장을 벗어날 수 없어.”
제국민을 보호해야할 황제가 도리어 민간인의 목숨들을 인질로 잡고 공작을 협박하다니.
이제 털끝만큼 남아 있던, 황가를 향해 검을 거누어야만 한다는 사실에 대한 죄책감마저 모두 녹아 사라졌다.
“당신은 이제 더는 황제도 뭣도 아니야.”
미나즈는 눈을 부릅뜨고 황제를 노려보며 외쳤다.
“모두 나와서 대치해요!”
미나즈의 외침이 떨어지자 사방에서 검은 갑옷의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박에 배 이상으로 늘어난 최정예인원이 단상을 둘러싸자 황제가 입술을 꾹 깨무는 게 보였다.
“저들을 모두 처단해! 또한 군들은 진격하라!”
황제의 명령이 떨어지자 곧 광장을 둘러싼 사병들이 움직이려 했다.
“민간인에 손을 대지 마라! 우리를 막고 싶다면 너희들이 싸울 상대는 저쪽이다!”
클로드의 외침과 함께 광장 외부에서부터 교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미리 준비시켜 두었던 플로이드, 에이브로트, 로우앤 공작가의 사병들이었다.
‘너무 부족하군. 시간은 얼마 끌지 못할 거야.”
최대한 끌어모았으나 이목을 피해 들이는 데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그들의 사병은 대부분 아직 도성 밖에 있었다.
귀빈석 반대쪽에 앉아 있던 공작부인이 매를 날려 불러들였겠지만, 여기까지 오려면 한참 걸릴 것이다.
절대적인 열세를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황제를 잡아라!”
비하인드 나이츠가 달려들자 황제는 흠칫하더니 몸을 뒤로 뺐다.
순식간에 제국 기사단과 황실 근위대가 나타나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수적으로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인원이었으나 황제는 안심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 외쳤다.
“모든 병사는 전력으로 진격하여 나를 보호하고 수괴들을 잡아라!”
일부 교전 중인 부대를 제외한 사병들이 단상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학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진 않았으나 진군 방향에 있는 사람들의 피해가 불가피해 보였다.
관계없는 사람들의 희생이 목전으로 다가오자 미나즈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교전하는 사람들 뒤에 선채 안전한 곳으로 피하려 하는 황제의 등을 향해 외쳤다.
“이딴 짓을 하고 멀쩡할 수 있을 거 같아? 당신 역시 소중한 걸 잃게 될 거야!”
황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미나즈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우리가 가진 최강 전력은 지금 어디에 있을 거 같아?”
그녀의 외침에 드디어 황제가 반응을 보였다.
그녀의 말에 뭔가를 깨달은 것이다.
뒷모습이 뻣뻣하게 굳는가 싶더니 그가 명령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황궁으로 간다!”
황실 근위대가 물샐 틈 없이 호위하는 사이 황제는 그대로 뒤에 세워진 마차로 향했다.
비하인드 나이츠가 곧장 뒤쫓았으나 수많은 황실 근위대의 저항에 막 혔다.
병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고함소리들 틈에서 황제는 마차에 올라타는데 성공했다.
“쫓아가! 잡아야 해!”
“아니! 광장 사람들이 죽는 걸 막는 게 먼저입니다!”
클로드의 외침이 미나즈의 명령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지금 기회를 놓치면…..…!”
“괜찮을 겁니다!”
클로드가 진지한 목소리로 못을 박았다.
“그에게 맡겨둡시다.”
바로 눈앞에서 손을 놓은 채 목표를 놓치는 건 정말 싫었지만, 클로 드의 말이 옳았다.
미나즈는 타오르는 분노를 잡아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추격을 멈추고 상황이 종결될 때까지 모든 피해를 최소화해요!”
미나즈의 명령에 비하인드 나이츠는 돌아서서 광장으로 진격했다.
제국 역사상 처음 있는 수도 내 전투였다.
참담한 심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며 미나즈는 검을 휘둘렀다.
*
바로 앞의 광장에서 출발했으므로 황녀가 탄 마차는 금방 황궁에 도착했다.
마차에는 창문이 달려 있었기에 그녀는 광장에서 일어난 소요를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돌아가는 상황을 볼 때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 지는 명백했다.
‘그러게 빨리 치라니까.’
황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투덜거렸다.
드디어 황제가 그녀의 생각을 이해 하고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건 좋은데 시점이 너무 늦은 게 문제였다.
‘그런 굴욕을 당하기 전에 시작했으면 좋았잖아. 하여튼 꾸물거리기는.’
지하의 동정에 온 신경을 쏟고 있던 황녀는 황제가 지하에 사람을 보내 자신의 진실을 알아냈다는 사실을 알았다.
죄책감에라도 시달리는 건지 계속 두문불출하며 일을 키웠다.
결단을 좀처럼 내리지 못한 그가 답답했다.
‘이번 일이 지나면 내가 전면에 나서서 모든 걸 수습해야겠어.’
광장에서 황제가 병사를 동원한 이상 여론은 최악일 것이다.
그 모든 상황을 한 번에 반전시키려면 황제가 어떻게든 모든 걸 뒤집어쓰고 퇴위하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
황녀가 혼자서 이것저것 미래에 대한 계획을 거침없이 세워나가고 있을 때였다.
“모두 어디 갔지? 왜 아무도 없어?”
마차 앞에 난 창문으로 전방을 살피고 있던 체펠린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즉시 그쪽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와 있어야 할 로사그란데의 호위병들이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로사그란데 입구에 서 있는 것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저, 저 남자는 누구지요?”
동행하고 있던 시녀가 망토를 쓰고 후드로 얼굴을 가린 큰 키의 뒷모습을 가리키며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움직이기 편한 수수한 차림에 갑옷조차도 두르지 않은 그는 마치 암살자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떡 벌어진 어깨와 완벽한 체격에서 풍겨 나오는 존재감이 압도적이었다.
뒷모습만 봤는데도 누구인지 명백히 알 것 같았다.
황녀의 얼굴이 서늘해졌다.
곧 화단에 가려져 있던 땅이 드러나자 시녀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호, 호위병들이 전멸했습니다!”
로사그란데 앞 광장 바닥에 호위병의 시체가 가득했다.
백 명에 달하는 기사단이 겨우 광장에서 황궁으로 오는 짧은 사이에 전멸한 것이다.
창백해진 체펠린이 순간적으로 명령을 내렸다.
“마차를 돌려! 호위들은 전력으로 저 남자를 쳐서 황녀 전하를 보호하라!”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마차가 방향을 돌렸다.
마차를 따르던 호위들이 지시에 따라 남자에게 접근했다.
그 맹렬한 기세에 홀로 서있던 남자가 천천히 뒤로 돌았다.
푸른 하늘 아래.
리안 칼라브리아의 수려한 얼굴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