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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100화 (100/120)

100화

단상 위에 선 에이드리언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광장에는 그가 태어나서 본 것 중 가장 많은 사람이 빽빽하게 들어차있었다.

대중은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다. 익숙하지 않은 에이드리언에게는 더욱 그랬다.

긴장으로 다리가 풀릴 것 같아 팔로 단상을 짚는 순간, 그는 둔한 통증을 느끼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꽤 지났는데.’

여전히 손목이 없는 자신에 익숙하지 못해서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다.

텅 빈 팔 끝을 보면 여전히 이루말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사람들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날을 눈물로 지새웠다.

에이드리언은 씁쓸하게 내리뜬 눈을 들었다.

슬픈 감상은 자신을 이렇게 만든 상대에 대한 분노로 흘렀다.

‘이걸 모두가 알아야만 해.’

그의 시선 정면에서 그 상대가 가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에이드리언은 침을 꿀꺽 삼킨 뒤 심호흡을 했다.

“탄신제가 끝난 밤이었습니다.”

그가 입을 열자 장내의 분위기가 고요해졌다.

에이드리언은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귀향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짐을 꾸리고 있는데 누군가 방문을 노크했습니다. 나가 보니 뭔가 둔탁한 것이 제 머리를 내려쳤고 눈을 떴을 때는 벌써 그곳이었습니다.”

눈을 떴을 때의 기분은 아직 생생했다.

에이드리언은 기억을 더듬으며 그때의 상황을 전하려 애썼다.

“그곳은 어둡고 습하고 좁으며 불결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저를 괴롭힌 건 벽에 새겨진 긁힌 자국이었습니다.”

손톱으로 벽을 긁은 흔적.

그 아래 여전히 남아 있는 핏자국.

군데군데 새겨진 살려 달라는 글귀들.

날짜를 가늠한 흔적.

그리고….

“거기에 갇혀 참혹한 꼴을 당한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습니다. 라인미아, 폴른, 체사레, 크리스티나…

저와 달리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한 이들이 필사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벽에 새겼습니다.

리피엘, 데이나, 한스…….”

그곳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알리고 싶어 이름을 남겼을 것이다.

그 절망적인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에이드리언이었기에 최선을 다해 그들 모두의 이름을 기억하려 애썼다.

그리고 그가 기억한 이름을 모두의 앞에서 불러 주자고 제안한 건 엘레노어였다.

기나긴 이름의 나열에도 대중들은 지루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에이드리언의 호명으로 지하에서 죽어 간 이들은 그저 희생자가 아니라 이름을 가진 하나의 인간이 되었다.

“아아.바이올렛.”

귀부인의 울음소리가 어딘가에서 울렸다.

“벽마다 황녀를 저주하는 글귀가 가득했습니다. 처음 며칠간은 황가를 향한 믿음이 남아 있었지만, 얼마가 지나자 저도 똑같이 분노를 벽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그 후 에이드리언은 자신이 지하에서 겪어야만 했던 고통을 나열했다.

열악한 환경과 수시로 이어지는 고문, 폭언이 그의 입을 통해 나올 때마다 청중은 탄식을 터뜨렸다.

비앙카스타의 말이 거짓으로 드러난 후인데도 대중들은 에이드리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들끓는 감정이 목소리에 묻어나 도저히 연기라 볼 수 없기도 했지만, 아마 모두 그가 언급한 수많은 이름중 같은 이름을 가진 이가 주변에 하나쯤은 있었을 것이다.

실제 피해자가 아니더라도 그의 호명으로 인해 청중은 자신의 소중한 이들을 그에 자연스레 대입했고 결과적으로 완벽히 감정을 이입했다.

“그녀는 미소 지으며 비앙카스타바이스 후작 영애에게 보낼 선물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후에 그녀의 뒤에서 나타난 기사가 검을 뽑아들었습니다.”

이야기가 절정에 이르자 사방에서 눈물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황녀가 벌떡 일어섰다.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요!”

황녀가 벌떡 일어나 파랗게 질린 얼굴을 가로저었다.

“너무하세요. 저는 그토록 끔찍한 일들은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요.”

황녀의 외침을 클로드가 가로 막았다.

“황녀 전하. 착석해 주십시오. 지금은 에이드리언의 증언을 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너무하잖아요! 방금도 말도 안 되는 주술에 대한 거짓말로 저를 누명 씌우려고 했는데!”

“그 부분은 지금의 증언과 상관이 없는…”

“상관이 없지 않다고요. 에이드리 언과 비앙카스타는 밀월 관계니까!”

황녀가 소리치자 다시 회장이 술렁였다.

“두 사람이 짜고 나를 나락으로 빠뜨리는 거예요. 억울해요. 내가 그렇게 잘해 줬는데 감히 어떻게…….”

“그만하십시오!”

이번에 외친 것은 에이드리언이었다.

그는 두 눈 가득 서슬 퍼런 분노를 담은 채 계속 소리쳤다.

“당신이야말로 감히 어떻게 내 앞에서 억울하다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습니까! 당신 때문에 손을 잃어버린 내 앞에서!”

에이드리언은 증인석을 벗어나 앞에 나온 황녀에게로 다가섰다.

호위병들이 앞을 가로 막았으나 그의 목소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울려 퍼졌다.

“당신으로 인해 내가 잃어버린 것은 단순히 손 하나가 아닙니다! 평생 수련해 온 검술을 잃었고, 깃펜을 들고 답장을 쓸 수도 없고, 사랑하는 연인의 손을 맞잡고 춤출 수도 없겠지요! 그 모든 의미가 당신 눈에는 그저 고깃덩어리로 보였을 뿐 이겠지만!”

몸속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온 그의 분노는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그를 막고 선 호위병도 그의 목소리를 만류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제가 그런 게 아니라고요. 뭔가 오해가…”

“절대 오해가 아닙니다. 나는 내 손을 자르던 끔찍한 검 자루의 주인은 기억 못 해도 자르라고 명하던 당신 입술의 움직임은 또렷이 기억합니다.”

에이드리언은 황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에게서 그날의 잔혹한 미소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겁을 먹고 부들부들 떠는 가녀린 소녀일 뿐.

그러나 그에게는 그녀의 뒤에 드리 워진 시커먼 그림자가 훤히 보였다.

“당신이 뭐라 부정해도 하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당신의 그 거짓된 얼굴에는 당신이 죽인 이들의 피가 빠짐없이 묻어 있으니까.”

여기까지 왔는데도 황녀는 여전히 고개를 젓고 있었다.

이쯤 되면 자신이 행한 범죄를 정말 진실이 아니라고 믿는 이중인격이 아닌지 의심될 정도였다.

“어떻게 그런 적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당신이 다스려야 할 제국민 앞에서 당신 때문에 피 흘린 내 앞에서 사과 대신 기만이라니.”

에이드리언은 자신을 붙잡은 호위병들을 뿌리치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단상 위에 앉은 클로드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대법관님. 제게는 황녀 전하의 추악한 실체를 무엇보다 명확하게 보여 줄 증거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지?”

대답 대신 에이드리언은 고개를 돌려 팔을 들어 올렸다.

정해진 신호였다.

“뭘 하는 거죠?”

고개를 갸웃거리던 황녀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의 뒤에서 나타난 어두운 금속갑옷의 기사를 본 것이다.

그들은 황녀에게 종속되어 명령을 따르던 지하의 기사들이었다.

“저 사람들은 뭡니까?”

단상으로 올라오는 기사들을 보고 이델체 백작이 물었다.

에이드리언이 대답하기 전에 황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여기서 뭘 하는 거야! 당장 돌아가요!”

그러나 멍한 눈빛의 기사들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에게 종속의 서약을 한 이들이 따르지 않으니 황녀는 무척 당황한 기색이었다.

“뭐야! 왜 내 말을 안 듣는 거야!

당장 사라지라니까!”

아무리 외쳐도 그들이 말을 듣지 않자 황녀는 곧장 호위병들에게 명령했다.

“저, 저들은 지하 감옥 소속으로, 대중 앞에 나서면 안 되는 이들이에요! 당장 내보내 주세요!”

그러나 클로드가 기사들을 잡으러 나서는 호위병을 제지했다.

“멈추시오. 그들을 이 재판의 증인으로 채택하겠소.”

“그건 말도 안 되는 거예요! 당장 그만둬!”

황녀의 목소리가 완전히 갈라졌다.

“재판정에서는 정숙해야 합니다.

전하를 자리로 모시도록.”

클로드의 명령에 호위병들은 황녀를 자리로 데려갔다.

끌려가는 그녀의 발악을 보며 에이 드리언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우리는 황실 근위대로 지하 통로에서 근무하는 기사들입니다.”

“지하에서 황녀 전하를 본 적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기사들의 등장에 회장의 웅성임은 가시지 않았다.

클로드가 의사봉을 두드려 조용히 만든 후 명령했다.

“당신들이 지하 감옥에서 보고 듣고 행한 것들을 모두 말하시오.”

명령이 떨어지자 지하의 기사들이 말을 시작했다.

“우리가 황녀의 명을 받고 에이드리언을 잡아 지하에 가뒀습니다.”

“제가 검으로 그의 손목을 잘랐습니다.”

“그것을 상자에 담아 로사그란데로 옮겼습니다.”

동시다발적으로 말하는 억양 없는 목소리가 소름 끼쳤다.

그들의 증언을 심각하게 듣고 있던 클로드가 엄격하게 보이는 코끝을 치켜들며 물었다.

“그대들은 황제 폐하의 기사들이 오. 황녀 전하를 위해 그런 끔찍한 명령을 수행한 이유는 무엇이오?”

“그녀가 우리에게 종속의 서약을 걸었습니다.”

조용해졌던 회장에 다시 파문이 일었다.

“거짓말이야!!”

황녀의 외침에 에이드리언이 벌떡 일어나 발악을 막았다.

“간단하게 증명할 방법이 있습니다. 스트링스톤이 있으니까요.”

클로드는 아까 비앙카스타의 서약을 확인하기 위해 받은 스트링스톤을 낀 상태였다.

“만일 정말 결백하다면 대법관을 향해 손을 내미십시오.”

에이드리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있었지만, 그 속은 완전히 긴장한 상태였다.

이건 일종의 도박수.

뒤 사정을 들은 바에 의하면 지하의 기사들은 스카이에게 종속된 이들이었다.

당연히 그들에게서 뻗어 나온 선은 황녀에게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확인을 거부해라.’

에이드리언은 속으로 기원했다.

종속의 서약은 타 서약과 달리 시전자로서도 즉석에서 풀 수 없었다.

그리 복잡한 의식은 아니었으나 지금 이렇게 이목이 집중된 상태에서 한다는 건 어불성설.

황녀로서는 당장 벗어날 방법이 없을 터였다.

들키지 말아야 할 텐데.”

지하의 기사들이 명령을 거역한 이상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눈치챌 수도 있었다.

당당하게 그녀가 손을 내민다면, 그 후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스카이가 직접 나서야만 했다.

초초한 기다림이 한동안 이어졌다.

“황녀 전하. 확인을 허락해 주십시오.”

클로드의 재촉에 뻣뻣이 굳어 있던 황녀의 입이 마침내 열렸다.

“시, 싫어!”

황녀는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친 후 그녀는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주변의 시선은 이제 완전히 그녀에게 싸늘해져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채로 외면하는 자신의 편들을 본 황녀는 어쩔 줄 모르다가 곧 돌아섰다.

그리고 절대적이고 믿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버팀목에게로 달려가 매달렸다.

“폐하! 아일린을, 이, 이 미친 반역의 무리로부터 구해 주세요!”

절박한 황녀의 눈물이 황제의 손을 적셨다.

황제는 멍하니 그것을 보다가 이내 입술을 깨물었다.

귀빈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미나즈가 일어서서 단상으로 다가왔다.

“폐하. 아시다시피 칼라브리아 백작은 종속의 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칼라브리아 백작과 종속의 서약이란 단어가 동시에 거론되었으나 주변은 이미 완전히 뒤집혀 그 부분에 주목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모두의 집중을 사로잡았다.

“황녀 전하를 믿으신다면 폐하의 눈으로 확인해 주십시오.”

무릎 꿇은 미나즈가 황제를 향해내민 쟁반 위에는 스트링스톤이 놓여 있었다.

리안의 서약이 해제되었다면, 황녀에게는 단 하나의 붉은 선도 나타나지 않아야만 했다.

분명 종속의 서약을 한 기사들에게는 선이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베아트릭스를 이용해 수없이 서약하고 사람들을 이용했을 터.

황제는 자신의 딸에게 뻗어 나온수없이 많은 붉은 선을 보게 될 것이다.

“폐하! 저, 저는…….”

황녀가 울먹이며 고개를 저었다.

황제는 그녀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리고 쟁반 위로 손을 뻗지도 않았다.

“체펠린.”

“네, 폐하.”

고개를 숙이는 체펠린에게 황제의 명령이 떨어졌다.

“황녀를 데려가 로사그란데에 가두게.”

“아아, 폐하! 그러지 마세요! 아일린을 믿어 주세요! 저는…!”

체펠린은 부하를 손짓해 발버둥 치는 황녀를 황제로부터 떼어 냈다.

그 모습을 본 클로드가 끼어들었다.

“죄송하오나 황제 폐하. 아직 재판 중이므로 전하께서는 자리를 떠나실 수 없습니다.”

“아니, 이 재판은 끝났어.”

황제가 클로드의 말을 끊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국의 최종 결정권자로서 판결은 짐이 내리겠다.”

황녀를 꼭 닮은 황제의 눈빛이 잔혹한 빛을 띠었다.

“황실 근위대는 광장을 둘러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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